명문(名文)을 붙여 놓던 형이 있었어.

교실 공용 참고서 사이사이나 액자로 가려진 벽면에, 시간표가 붙여진 보드에 가려지게, 심지어는 칠판 위 태극기 뒤에.



그 포스트잇을 처음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어.
나는 하루 일과가 다 끝나고 같은 반 형이 벽면에 붙어 있던 고흐의 해바라기가 들어 있는 액자를 들추는 것을 보게 되었어.

그리 친하지 않던 형이었어. 나는 학원에서 나이가 조금 어리다 보니 같은 반에서는 식사 시간에 운동을 같이 하던 서너 명, 그리고 룸메이트 정도와만 얘기를 했어. 그 형도 특별히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반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담배를 피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그룹에도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었어.

사실 기숙학원에서는 비정상적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간관계에 적절한 선을 그어 두는 것이 이상적인 형태겠지만서도 학원이 워낙 개판이다 보니. 우리 반에는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났다고 표현해야 할(속어로 찐따) 두 명을 빼면 대체로 친하게 모여 다녔거든. 그 형은 배척받는 건 아니지만 거기서 좀 벗어나 있는 두세명 중 하나였어. 나도 그랬고.


그런 사람이다 보니 나도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아마 그 형도 그랬을 거야. 책상 위에 항상 세계 철학사니 자살론이니 하는 책이 몇 권 올려져 있었다는 점, 그리고 가끔씩 선생님(금수저였음)과 대화할 때에 즐거워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도 없었고. 그런 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특별함이니까.

하지만 액자를 들춘다니, 이상한 일이잖아. 교실에 놓인 액자는 그냥 풍물처럼, 길을 가다 보면 수없이 지나는 가로수처럼 그 자리에 항상 놓여 있는 거 아니야? 길을 가다가 누군가 가로수를 오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면 당황스럽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저 사람이 왜 가로수를 오르려고 하나, 하고 궁금하지 않을까? 내가 느낀 감정이 딱 그거야. 나는 그 형에게서 묘한 호기심을 느꼈어.


시간은 열두 시를 막 지나려고 하고, 교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공부하던 사수생도 방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3층 기숙사에서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2층으로 내려와 교실에 불을 켜고 들어갔어. 그리고 액자를 들추어 봤어. 거기에는 파란색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어.
유명한 '변신' 의 첫 문장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거대한 해충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변신》

- 프란츠 카프카 -

5.



내가 이 포스트잇을 읽고 가장 먼저 한 생각은 1~4번은 어디에 있을까, 였어. 이 포스트잇이 5번이라면 당연히 1~4번도 존재하겠지. 솔직히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아서 설렜어. 갇혀서 하루 종일 공부만 하다 보면 별 게 다 즐거운 모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꽤 재미있는 상황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기이한 행동이잖아. 왜 그는 이런 것을 썼는가. 왜 그는 액자 뒤에 이것을 숨겼는가. 왜 하필 변신인가. 등등. 더군다나 평소에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2번은 꽤나 쉬운 위치였어. 노력은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라고 쓰여 있던 반대편 벽의 액자 뒤에 숨겨져 있었어.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

- 레프 톨스토이 -

2.



조금 시간을 들여야 했던 3번은 코르크보드에 핀으로 고정되어 있던 급식표 뒤에.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방인》

- 알베르 카뮈 -

3.



변신과 이방인, 안나 카레니나. 변신은 읽어 봤지만 정말 '보기' 만 했던 책이었고, 이방인도 그랬어. 책 뒤의 해설을 봐도 알쏭달쏭하기는 마찬가지였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던 책들이었어. 안나 카레니나는 총 세 부라는 두께에 눌려 펴 보지도 않은 책이었어. 그러나 저게 첫 문장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의 유명한 첫 문장 하면 꼭 목록에 있던 문장이었거든. 그러니까 셋 다 첫 문장인 거야. 유명한 첫 문장.


무슨 공통점이라도 있나 궁금해지기 시작했지만... 나에게는 왜 하필 변신과 이방인, 안나 카레니나인지 궁금해하기에도, 1번과 4번을 찾아내기에도 시간이 없었어. 그만 자러 가야 할 시간이었거든. 열두 시 삼십분이 소등 및 취침 시간인데, 찾아내는 사이에 열두 시 이십오분이 된 거야. 남은 포스트잇이 등잔 밑에 놓여 있다고 해도 부족한 시간이었지.

나는 일단 방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급하게 자리에서 연필을 챙겨 와, 5번 포스트잇 뒤쪽에 이렇게 적었어.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



라고. 그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문장이야.

그 날 밤은 괜히 잠이 잘 안 왔어.

ㅡㅡㅡㅡㅡㅡㅡㅡㅡ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d8efa11d02831ee99512b64ee64d67099c224c4024ea8fba54546f39a73cf9eea26c7f7e84847224342e282170dcf8b7e3c9f803fc83fb6971af4b25939df449c8264

공부하기 싫어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