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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만화를 보고 트위터에 썼던 단상을 정리했습니다.


어떤 평론가의 증언에 따르면 90년대에 돌풍을 일으킨 해외작가는 밀란 쿤데라와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96년생인 나로서는 그 진위를 학인할 방법이 없으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노르웨이의 숲』(혹은 『상실의 시대』)이 꾸준히 걸작으로 추천되는 것을 보아서는 아마 사실일 듯하다. 흥미롭게도 쿤데라와 하루키는 우리나라에서 상반된 취급을 받는다. 평론계의 원로인 유종호가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데, 그에게 있어 쿤데라는 언제라도 노벨상을 받아도 무방한 완연한 대가지만 하루키는 언급 자체가 불경한 대중 작가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우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부터 간략하게 살펴보자. 쿤데라의 기본적인 세계관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인간-일상은 한없이 가볍다 (2) 운명-역사는 한없이 무겁다. 쿤데라는 (1)과 (2)를 적절히 변용하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토마시아 테레자의 로맨스를 빌려 그것을 비교적 대중적으로 구현해냈다. '프라하의 봄'에 얽힌 여러 비극이 보여주듯 인간-일상(가벼움)은 운명-역사(무거움)에 무참히 짓눌릴 뿐이지만 때로는 아름답게 넘어서기도 한다며.


이는 인간과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전통적인 문학의 소임에 근접해 있다. 대위법을 흉내낸 전개 방식이나 니체부터 키치까지 연달아 이어지는 철학적 진술 등 결코 쉽게 읽힐 만한 소설이 아닌데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꾸준히 추천되는 이유는 이것이 가장 최신의 고전적 소설이기 때문이다(이청준이나 이승우, 혹은 필립 로스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노르웨이의 숲』은 별다른 갈등 없이 순도 높은 문장으로 와타나베의 하루하루를 묘사할 뿐이다. 와타나베는 조용한 나오코와 발랄한 미도리 사이를 왕복하며 끝없이 음울 속으로 침잠한다. 하루키는 인간과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데에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철머 보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서구적 교양을 가진 청춘의 허무한 내면이다. 모든 사건은 그저 일어나며, 모든 관계는 어쩌다 맺어진다.


이분법적으로 말하자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인간과 세계를 대상으로 삼은 거시적인 소설이고, 『노르웨이의 숲』은 내면을 대상으로 삼은 미시적인 소설이다. 엄중한 문학을 읽어온 고전주의자에게 전자를 향한 상찬과 후자를 향한 비판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하루키는 어떻게 90년대에 돌풍을 일으켰을까.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생각이니 굳이 읽지 않아도 좋은데, 아무래도 하루키의 독자층이 주로 대학생이었기 대문이 아닐까 싶다. 『노르웨이의 숲』의 근저에는 어떠한 사건도 어떠한 관계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있다. 자신을 절대적인 불행에 위치시키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성을 확보하려는 이러한 비관적 자기애는 그야말로 청춘의 표상과도 같은데, 『노르웨이의 숲』은 와타나베를 통해 그것을 독자에게 이입시킨다(다자이 오사무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와타나베는 '고급적'이라 칭해지는 취미를 향유하는데(피츠제럴드를 읽고 클래식을 듣는다), 이것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짓고자 하는 욕망을 대리적으로 충족시켜준다. 실제로 하루키의 소설은 80년대의 일본과 90년대의 한국과 2000년대의 중국, 그러니까 각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직전에 불티나게 팔렸다.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중산층이 자신을 타인과 구별짓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노르웨이의 숲』은 청춘의 심정을 대변하면서 고급적인 취향을 제공해주었기에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된 것일까. 나는 여기에 대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답하고 싶다. 어째서냐 하면… 그건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쓰도록 하겠다. 전작을 아직 읽지 못했기도 하거니와 가라타니 고진 등의 평론도 아직 검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나에게는 하루키의 소설이 굉장히 특별하다는 사실만 밝혀두고 싶다. 나는 청춘의 시기를 하루키와 함께 보냈다.


p.s. 예전에 약속했던 플로우차트는… 지금 보고 있는 환자 마무리하고 원고 마감한 뒤에야 올릴 수 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