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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에 대한 만화를 보고 트위터에 썼던 단상을 정리했습니다.
1.
『롤리타』의 매력은 뭘까. 황홀한 언어가 추잡한 합리화를 위해 도용될 때 거기서 발생하는 낙차의 충격이 아닐까. 『롤리타』를 읽으며 독자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윤리에서 한참을 벗어난 험버트가 너무도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인데… 독자는 끊임없이 도덕적 추(醜)와 미학적 미(美)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험버트가 믿을 수 없는 서술자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의 감각을 거친 묘사를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때문에 『롤리타』를 두고 소아성애를 옹호했다니 반대했다니 하는 논쟁은 전혀 유효하지 못하다. 그것은 문학에서 교훈을 찾으려 하는 저차원의 독해일 뿐이다. 『롤리타』의 목표는 극단적인 추와 미의 결합을 통해 독자를 교란시키는 데에 있다.
『롤리타』는 악마의 문학이다. 아름다운 언어를 미끼삼아 독자를 어두운 세계로 꾀어낸다. 나는 여기서 예술의 위대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본다. 『롤리타』는 예술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감정을 독자에게 선사해주며 또한 예술이 아니라면 드러낼 수 없는 음험한 욕망을 독자에게 이입시킨다.
2.
『롤리타』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 중 하나는 'therapist'를 'the rapiest'로 분절한 부분일 것이다. 이에 대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읽으면서 흥미로운 통찰을 앞서 내놓은 바 있다. 그들은 카프카가 독일어로 문학한 체코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카프카는 다수의 언어를 소수의 용법으로 사용하면서 끊임없이 웅얼거리고 버벅거리고 더듬었다. 그의 문학에 짙게 드리운 비명은 이러한 '문체'에 의해 지탱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접근을 배치론('-되기')으로 확장시켜 나가는데, 거기부터는 지면의 사정상 생략하도록 하고, 문학의 성패가 새로운 영역을 얼마나 창출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면 외국어로 문학하는 것은 꽤나 괜찮은 발상이란 생각이 든다. 중심의 체계를 탈취하여 변방의 방식으로 금방 비틀 수 있다면 너무도 손쉽게 '문학적'인 면모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출생이지만 프랑스어로 창작한 베케트나 러시아 출생이지만 영어로 창작한 나보코프처럼 말이다(나보코프에게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언급한 소수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지는 고민해야겠지만).
물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정말로 외국어로 창작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성의 언어를 여성의 용법으로 재구성한 마가릿 애트우드나 제국의 언어를 식민의 용법으로 재구성한 미셸 투르니에를 떠올리면 좋겠다.
잘 읽었다.
글 ㅈ나 잘쓴당 추천! - dc App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운이 좋았던 케이스긴 합니다. 맥크리(오버워치)라는 소재가 소재다 보니 곧바로 청탁이 왔으니까요. 소위 말하는 '등단'에 있어서 대산대학문학상의 위치가 어디에 있냐 하는 것은… 상당히 애매하긴 합니다. 출판사에서 주관하는 신인상의 경우 곧장 단행본 계약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또 신춘문예의 경우 여러 문예지에서 마련하는 특집에 곧바로
작품이 실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지속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 같네요. 그런데 이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그렇다고 신인상이나 신춘문예가 안정적인 지면을 확보해주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작품뿐이긴 하지요. 그래도 대산대학문학상은 비교적 관계자들한테
노출이 많이 되는 문학상입니다. 김애란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지요. 명쾌한 답변은 아니겠지만, 몇 년간 문학장의 생리를 조금씩 터득한 대산대학문학상 출신의 평론가로서는 이 정도밖에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네요.
잘 쓴다...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