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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사람들의 이상적인 욕망을 다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실이 이 높은 이상적인 기준에 맞지 않을 때,
현실적 욕망이 너무 커질 때 좌절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듯 싶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문체는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자연 그대로다. 작품 속에서는 컴컴하고 짓누르는 이미지를 느끼기 어렵다.
오히려 속세를 관통하는 듯한 야생 그대로의 날 것이 팽팽하게 우리 앞에 당겨져 있다. 그리고 이 야생을 연상케 하는 푸른 자연을 관통하는 건
<조르바> 그리고 글쓴이 <나>다.
누구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조르바 ... 혹은 거친 조르바 .. 자유인 조르바 ...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동의할 수 있을 듯.
조르바는 보통 인간들의 맵에서는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세계화 되고 모든 게 디지털로 연결된 시대에서는 자유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좀 더 쉽게 현실화 될 듯
이상적 욕망이 이루어질 줄 알았다. 근데 이루어 졌던가? 지금 이 글도 몇 십,몇백 명이 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 던져 놓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고립감을 느끼기 쉽다. 그리고 현대인의 일상은 자세히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다.
인간이 느끼는 고립감은 시대가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극복되기 너무나도 어렵다... 근데 이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한 조르바의 계속된 사투.
그리고 여자를 어떻게 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지 허심탄회 하게 이야기 하는 조르바.
물론 그 말이 지금 시대의 윤리적 가치에는 멀게 보일 수 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드러내지는 않아도 속에 강렬히 묻고 있는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건
꽤 나 매력적이다.
조르바는 기본적으로 인간 관계의 방향을 바꿔서 제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 혹은 문학 속의 많은 인물들은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 지에 대해서만 몰두하고 그에 맞게 자신의 가치 규범을 만들어 내고 행동한다.
소설 <닥터 지바고>에서는 어두운 밤의 헤드라이트가 밖이 아닌 나 자신을 비추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우리는 헤드라이트를 외부로 돌릴 생각을 하지 않을까?
가령 많은 미디어에서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 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공포 삼아 상업적으로 막대한 매출을 올리는 것은 .. 이런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조르바는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갔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 지>가 아니라 <내가 타인을 어떻게 봐야 하는 지 그 방법>을 성찰하고 연구하고 삶에서 생생하게 느끼며 적용하며 산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마초적인 것 같은 인간이 많은 인간들에게서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소설은 비단 이상적인 욕망만 다루지 않는다.. 현실을 대변하는 글쓴이 <나>가 있다.
나는 아무리 조르바가 보여주고 말로 알려줘도 쉽게 변할 수 없다. 자신만의 나아가야 할 길이 있고 나만의 가치가 있고 .. 근본적으로 <조르바>와는 다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끝끝내.. 현실에서의 이상적인 모습,결말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의미가 없지는 않다. 여전히 이상은 살아 숨쉰다. 한 인간의 형태로 <조르바>로
내심 누구나가 바라는 사실 아닌가? 자유가 무엇인지 확실히 정의하기도 어렵지만 자유를 추구하고 싶은 것은 ..
실제 조르바는 1941년 사망했다고 한다.
작가 카잔차키스는 1957년 사망했고 ..
두 명의 자유인 혹은 현실에서 살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이 반 세기 전 사망했다는 사실이 뭔가 더 신기하고 슬프다.
실제 조르바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