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서 서울로 오기 직전에 난 한국어 교환학생과 함께 Last Bookstore라는 곳에서 서점을 거닐었다. 그리고 헌책방을 기웃거리다 우리는 1990년대에 나왔었던 한국어 서적들을 찾았다. 그리고 한국문화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자 했던 내게 있어 한국어 서적들은 모두 서양 문학을 번역한 판본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내 교환학생은 내게 다음과 말했다. \"한국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를 읽어봐!\" 그런 뒤 그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한국어 번역본을 쥐어줬다.

헤르만 헤세. 내 세대의 얼마 되지 않는 미국인 독자들 처럼 난 헤세의 이름을 영문학 수업 시간에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는 1922년 시다르타라는 소설을 통해서만 존재했다. 1919년에 나왔던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젊은 독일인에 대한 소설인 데미안은 수업시간에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데미안의 문화적 중요성은 너무나도 컸다: 이동진 비평가는 \"데미안을 읽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눌 수 있다\"라고까지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 교육과정에서 이 책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건대 한국인들의 대부분은 아마 전자에 해당될 것이다. 시다르타는 미국에서도 마이너한 편이지만, 왜 금욕적인 스위스계 독일인 작가인 헤세, 오리엔탈 사상같은 구닥다리 스러운 사상으로 점철된 작가,가 한국인들에게 깊은 메세지를 던지는가?

그들은 최소한 헤세에 대한 열정이 크다. 파주 책도시같은 곳에서는 헤세의 테마로 운영되는 카페가 있다. 그리고 주류 미디어, BTS 같은 남자 아이돌 그룹의 대표곡이라는 Blood Sweat & Tears 마저 헤세의 가르침에 기초되었다고 선전된다. 코리아타임즈에는 신슬기라는 대학생이 독자들에게 가슴을 쫓으라고 얘기하며, 데미안의 첫 구절을 인용한다. \"난 그저 내 진실된 모습과 걸맞는 삶을 살고 싶었다. 왜 그것은 힘들었는가?\"

그녀를 이 원흉으로 한국 교육시스템을 지목하며, 학생들이 주입식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 비판한다. 한국 교육, 한국 사회, 한국 기업문화, 한국 정치문화, 등등 수많은 한국식이 붙는 것들은 자아를 억압하는데 사용되었을 지 모르겠지만, 신씨의 비판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흔하게 보이는 착각의 대표사례다: 서양인들은 자아, 미래, 비전에 대해 한국인들과 달리 더 잘 알고 있으며 개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착각 말이다.

그녀의 기사 끝은 스티브 잡스에 대한 인용으로 끝낸다. 스티브 잡스는 한국인들의 집착 대상인데, 다름이 아니라 그의 독창성과 사회에 대한 저항, 그리고 엄청난 부를 한데 갖춘 자로서, 한국인들 스스로 한국이 부족한 것을 잡스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븐 잡스 전기는 아마 데미안 바로 아래 (어쩌면 왜 인기를 끄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또 다른 책인 탈무드)에 랭크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들은 삶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두려움을 느끼지만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는 한국인들에게 있어 답변을 제시한다는 성스러운 서양서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때 Gord Sellar는 데미안을 이렇게 설명했다. \"겉모습을 벗어나 내면의 자아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다룬 소설로서, \"일반적인\" 사회인이라는 굴레를 통해 자아적 성취를 할 수 없는 카인의 낙인이 찍힌 자들을 위한 이야기\".

\"그리고 남한에서 자란 사람들, 겉모습이 내면보다 더 중요시되는 나라\"에서 이런 테마는 특히 어필이 크다는 것이다. 19세기 유럽에 연애 결혼을 금기시하거나 여성들이 남편의 커리어와 소득에 따라 따지고, 사람들이 가족의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그런 세팅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화와 마찰을 빚는 옛 유럽\"에 관한 이야기는 근대화와 마찰을 엄청나게 빚고 있는 한국에 의미가 뜻깊다는 셈이다. Sellar는 또한 이렇게 본다. \"해당 이야기는 한국인들 입맛에 맞는다: 비극적인 결말에 조금 더 온정적이고, 운명을 바꿀 수 없는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이 큰 독자들\". 이는 한국문학이 서양에 마케팅이 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양 독자들은 \"운명을 통제할 줄 모르는 캐릭터들과, 멜로드라마적으로 슬픈 이야기 진행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정반대로 비통함에 촛점을 맞춘 독일 소설들 (가령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롯데라는 재벌 명명의 영감이 된)이 한국에서 인기를 끔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1년 6개월을 산 뒤, 데미안을 다시 읽으면서 난 내 한국어 교환학생이 얘기하던 것이 뭔지 이해가 되었다.

아마 에밀처럼 한국인들은 대학교에 가 사회적 모임에서 비롯되는 술자리 문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화자인 에밀은 이렇게 본다. \"난 이런 것들을 하도록 강요받은 것 같았다. 난 내가 해야될 일을 했다. 그렇게 안하면 뭘 해야될 지 몰랐기 때문이다. 난 혼자 있는게 두려웠고, 내게 닥쳐올 무드를 통제하지 못했다.\" 그는 이를 \"18세의 젊은이의 100가지 면에서는 현명해도, 다른 100가지 면에서는 설익은 자\"라고 평한다.


이는 아마 서양인들에게 있어 한국 젊은이들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일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보다 100가지 면에서는 현명해도 다른 100가지면에서는 설익은 자들 말이다. 한편 한국인 독자들은 아마 데미안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을 읽어낼 것이다. 에밀은 기성세대를 보면서 \"여전히 젊은 대학교 시절의 술을 추억하며, 그들의 유소년에 대해 감상에 젖는다.\"라고 비판한다.
한국인들 역시 중장년층들이 여전히 저녁마다 술에 찌들고, 데미안의 구절을 읊는다. 데미안은 아마 이들에게 있어 일종의 위안거리로서, 언젠가는 그들의 의견과 이상, 책임감, 삶을 집단의 그것과 분리하여, 미래의 개인주의로 갈 수 있다라고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을 알듯이 이 이야기는 에밀에게 있어 좋은 결말이 아니다. 새로운 개인주의는 커녕 찾아온 것은 1차세계대전으로서, 데미안의 지도를 받지 못하는 에밀이다.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아팠다. 내게 찾아온 모든 것은 아팠다.\" 이는 최근까지 학창시절의 끝없는 공부부터 부모로부터 지나치게 늦게 독립, 그리고 성인이 되어 자아적으로나 커리어적인 실망의 연속으로 인해 인생은 고통스럽다라고 믿는 문화에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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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번역한건 아니고 다른사람이 번역한거 퍼옴.
난 이 저자의 의견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안 공감하는 부분도 있는데
한국에서 보다 감상적이고 자기위안적인 컨텐츠가 인기 있다는 지적은 맞는 말 같음.

여기 독갤에도 데미안 좋아하는 갤러들 좀 있는것 같던데
너네는 어떻게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