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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 (첫 문장부터 내용 다 말해주는 소설이라 스포일러라 할만한 게 없는 작품임 ㅇㅇ)

1936년 2월 26일, 육군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발발 3일 째 되는 날, 다케야마 신지 중위는 반란군에 가입한 친구들 문제로 번민을 거듭한 끝에, 황군끼리 서로 쏴 죽여야만 하는 사태로 치닫게 된 정세를 통분하며 집에서 할복자살한다. 그의 아내 레이코도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한다.


감상

칼로카가티아는 미(칼로스)와 선(아가토스)의 합성어이다. 삶을 미학적으로 이해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요컨대 칼로카가티아는 아름다움과 올바름이 하나된 상태, 즉 진선미의 일치를 뜻한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아름다움과 올바름은 항상 동일한 선상에 있지 않았다. 아름답지만 올바르지 않은 것, 올바르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 역시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칸트가 그렇다. 칸트의 취미판단에서 미는 ‘무사심성’을 띤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름다움은 어떠한 목적이나 이해관계에 얽매여서는 안 되고, 그저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칼로카가티아는 그리스인들의 다소 유치한 꿈으로 전락해버린다.

느닷없이 고대 그리스와 칸트를 언급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은 철저히 칼로카가티아의 입장에서 쓰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내용 요약을 읽은 독붕이들은 이 작품이 우정과 직무 사이에서 고뇌하는 다케야마 중위의 모습을 첨예하게 그려낸 작품일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작품이 아니다. 다케야마 중위는 고민하는 모습 따윈 보이지 않고 항상 확신에 차 있다. 아내 레이코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편의 ‘명령’을 충직하게 따른다.

결국 <우국>은 이들의 할복이 얼마나 참되고 아름다운지를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작품이다. 신의와 의무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보다는, 죽음을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이 더욱 두드러진다. (굳이 미시마 유키오라고 단정하진 않겠으나,) 이 소설의 서술자조차도 할복의 아름다움을 맹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다음 서술을 참고해 보도록 하자.

열녀 열부의 최후, 참으로 혼백마저 울릴 기개 있도다. (17p)

레이코는 지아비가 구현하고 있는 태양처럼 크게 빛나는 대의를 우러러보았다. (22p)

마치 고전문학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서술자의 개입’을 보고 있는 듯한데, 적어도 20세기 중반의 문학치고는 진부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서술자의 개입 이상으로 비판하고 싶은 부분은, 다름 아닌 평면적인 인물상에 있다. 앞서 밝혔듯이, 이 작품의 서사에는 어떤 반전이나 해학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할복을 결심하고 할복을 실행하는 내용일 뿐이다. 그 사이사이에는 다케야마와 레이코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이를테면 이렇다.

레이코의 몸은 희고 성스러웠으며, 한껏 부풀어 오른 유방은 몹시도 강한 거부의 결벽성을 보이고 있었지만, 일단 받아들인 후에는 그것이 오히려 잠자리의 따스함을 채워 주었다. 이들은 잠자리에서도 무섭고도 엄숙할 정도로 진지하였다. 점차 격렬해지는 광란 속에서도 그들은 진지함을 유지했다. (19p)

두 사람 모두 실로 젊고 건강한 육체의 소유자들이라 이들의 사랑 행위는 매우 격렬했는데, 이것은 밤에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훈련에서 돌아온 중위는 먼지 투성이 군복을 벗다가 그 틈도 참지 못해, 그 자리에서 아내의 가는 허리를 꺾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19p)

중위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과 우국지정 사이에서 그 어떤 모순과 당착도 찾지 못했고 오히려 이것을 동일하게 생각할 수조차 있었다. (30p)
한 마디로, 이 소설은 다케야마와 레이코가 올바르고, 아름답고, 강직한 인간임을 주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문학보다는 프로파간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그의 다른 작품 ‘파도소리’ 역시 명확한 칼로카가티아의 입장에서 쓰인 소설이다. (고대 그리스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파도소리’와 ‘우국’의 인물상은 4천 년 전의 작품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두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신지로 같으며, 둘 다 ‘믿을 신’ 자를 쓰고 있는데, 이게 과연 우연일까?

물론 미시마의 모든 작품이 다 이렇게 유치한 것은 아니다. 금각사는 칼로카가티아가 반전된 형태의 작품이다. 미조구치는 선에는 관심이 없지만, 미에는 무서울 정도의 집착을 보인다. 결국 나중에는 미를 버리고 힘을 택하는데, 그 과정에 있는 금각사 방화는 윤리의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지점에서 이뤄지고 있다. 때문에 금각사는 파도소리, 우국보다 더욱 절묘하고 입체적이다. 내가 금각사를 미시마의 최고작으로 뽑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풍요의 바다는 아직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이문열은 이 소설을 일컬어, ‘죽음을 통한 삶의 보완’이라 평했다. 다케야마 중위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할복을 택한다. 그러니 이문열의 평은 흠잡을 데 없다. 한때 나도 자신의 사상을 위해 자살하겠다는 악령의 키릴로프에게 은근한 동경을 품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지금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한 문장을 떠올린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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