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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주의운동은 31운동의 소산이었다. 이 점은 [공상단선언]의 어법을 빌려 이 상황을 묘사한, 뒷날 조선공상단 중앙위원을 지낸 구연흠(具然欽)의 다음 문장에 잘 표현되어있다. 



 [오호! 괴물은 침입해왔다. 지금으로부터 77년 전에 칼 마르크스, 엥겔스가 말한 유럽을 배회하던 그 유령의 발자국이 …… 한국에 침입한 때는 바로 1919년 3월 1일에 발발한 민족 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였다.]



 사회주의는 1919년 이래 한국의 일대 유행적 사조가 되었다. 

국내에서 발간되는 신문, 잡지의 지면에서 맑스주의를 소개하거나 소비에트 러시아의 사회주의제도에 관한 견문기가 연재되는 일은 1920년대 전반기에는 흔한 일이 되었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경향 각처에서 …… 입으로 사회주의를 말하지 아니하면 시대에 뒤쳐진 청년같이 생각하게 되었다(나경석 공경황사, 조선지광 1927.5.76쪽)"

고 말할 정도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사회주의에 반대입장을 표명한 한 파리 유학생은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수년 전만 하여도 맑스 등록상표 아닌 사상상품은 조선사상 시장에 가격이 적었고, 

맑스 신도가 아니면 시대의 낙오자라는 불미한 칭호를 얻게 되었다. 

억지로라도 맑스 도금술과 맑스 염색술을 발명하여 사상적 낙오자됨을 면하기에 노력했었다.(이창변-맑스에 대한 일 의문, 중외일보, 1927년 4월 18일자)]


 이 문장은 역설적으로 맑스주의가 한국의 청년 학생들에게 끼친 영향력이 거대했음을 전해주고 있다. 

억지로라도 '맑스주의자'를 자칭하지 않으면 '시대의 낙오자'로 지목될 정도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89-90p



사상에도 유행이 있어서 너도나도 반드시 그거를 해야만 하는 집단의식,,


1919 1920이면 딱 백년전인데 변한게 하나도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