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처녀충이지만 아내가 덮쳐졌을때도 콩이나 먹자고 하는 새끼
이게 아싸찐따들의 현실인 거에오
워낙 큰 인상을 받은 작품이라서 초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으로 독후감 비스무리한걸 써 보네요. 그니까 좀 븅신같은 부분이 있더라도 대충 넘어가 주세요.
요조는 태생부터가 사회와 어울릴 수 없는 인간이에요. 물론 유년시절 경험한 하녀의 19금 오네쇼타 착정쇼의 충격 때문에 변한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험을 한 모든 인간이 다자이 오사무가 되는건 아니잖아요? 그랬다면 아마 지금쯤 한국 서점은 조기야쓰로 우리아이 다자이 오사무 만들기 따위의 책으로 도배되었겠죠.
각설하고, 요조는 인간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과 명백히 "다른" 인간이에요. "틀린"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틀린" 인간은 사회의 경험을 공유하나 사회의 지향과는 반대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에요. 범죄자나 뭐 그런 사람들 말이죠.
하지만 요조는 달라요. 사람들이 기본 전제로 생각하기에 예외가 있다고 의심조차 해보지 않은, 근원적인 보편성조차 공유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죠. 공복의 감각조차 느껴본 적 없다는 구절은 이 요조의 특이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줘요. 생물의 기본 욕구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란거지요.
그래서 그는 타인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유리 상자 안에 새를 넣어서 바다에 넣는다고 해 봐요. 새는 바다 생물들의 생활을 관찰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새가 아가미의 작동 방식이나 물 속을 유영하는 개복치의 생활 양식을 이해할 리는 없잖아요? 요조도 마찬가지에요, 인간 사회 안에 들어와 있지만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거죠.
비유하자면, 범죄자들이 1+1이라는 질문에 -2 라고 대답하는 인간이라면 요조는 1+1을 당당히 공감각적 심상이라 답하고 그게 뭐가 문제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겠네요. "틀린" 답과 "다른" 답인 셈이죠.
그래서 요조는 도저히 세상에 융화될 수 없어요. "틀린" 사람의 경우는 쉬워요. 자신의 답에다가 -1을 곱하면 그게 답인걸 알기에 세상을 속이며 살 수 있죠. 하지만 공감각적 심상을 도대체 어떻게 건드려야 수학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요?
세상이 단순하게 돌아갔던 어린 시절에는 그럭저럭 해낼 수 있었어요. 공감각적 심상×2=2공감각적 심상이라 답할 수 있었어요. 물론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속일 수 있었죠.
하지만 미적분이나 삼각함수에 공감각적 심상을 대입하는게 가능할까요? 그래서 나이를 먹으며 요조는 복잡해져가는 인간의 심리에 점차 무너져 내려요. 창녀나 호리키에 대한 선호는 이것 때문이에요. 그들은 단순한 사람이기에 요조의 방식으로 속일 수 있어요. 하지만 미묘한 여자의 심리를 직면하고, 가볍기만 하던 호리키가 진지한 태도를 보이게 되자 요조는 그들을 견딜 수가 없었죠.
요조가 서서히 자기파괴적 행동을 반복해가는 것은 이것 때문이에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인간들 속에 내던져진 그는 자신의 연기가 이제 통하지 않는다는걸 눈치채고 서서히 연기를 포기해요. 마지막에 요조가 선택한 여자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었던 것은, 그리고 그런 그녀가 ntr 이후로 자신을 믿어주는 능력을 잃자 그녀를 떠나 홀로 살아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행동인거죠.
그렇기에 저는 요조를 선악이라는 잣대로 판정하는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부등식을 국어에 도입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죠? 7>황석영, 공감각적 심상, 직유법? 선악이라는 개념도 결국 대상이 최소한의 인간의 보편성을 가졌을 때나 도입이 가능한거죠. 요조를 선악으로 구분하려 하는건 동물이나 기계의 행동에 인간의 가치를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이에요.
죄의 반의어가 선이나 법일 수는 없다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 요조 역시 이런 류의 생각을 가졌을 거에요. 선은 인간이 만든 도덕의 질서 내에서의 개념이고, 법은 추상적인 선과 악을 구체화한 것이죠. 선과 악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삶의 방식에 따라 판정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이 아닌(=인간실격) 자신에겐 적용할 수 없어요.
하지만 기독교의 원죄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죄는 생명 그 자체에 부여될 수도 있죠.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해 구원받을 수 없었던 인간처럼 자신 역시 도저히 사회와 융화될 수 없는 원죄를 지닌 존재란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에 그는 죄의 반의어가 법일 순 없다고 판단하는 거에요. 반의어는 하나의 차이점을 제외한 나머지 속성은 같아야 하잖아요? 하지만 요조는 죄인일지는 몰라도 악인일 순 없고, 따라서 죄와 선(의 구체화인 법)은 반의어가 아니죠.
사회는 그런 요조를 이해하지 못해요. 요조를 정신병원에 넣고 인간 실격 판정을 내린 아버지가 그 대표적인 예시죠. 자신들의 보편을 벗어난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들에게 교정의 기회를 몇 번 주다가, 최후에는 광인이라는 딱지를 붙여 자신들의 시선 밖으로 치워 버리는거죠.
일본의 천재 작가 나스 키노코는 하늘을 나는 새를 억지로 바다에 집어넣어봤자 바다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는 몸을 얻는것이 전부라 평했어요.
요조는 그보다도 못했어요. 바다에 태어나 버린 새인 그는, 바다에서의 생존방식을 채득하지 못하고 천천히 죽어갔어요. 날개를 퍼덕여 앞으로 나아가는 정도의 수영은 가능했지만, 숨을 쉴 수 없었기에, 그 어떤 이해자도 얻지 못했기에 점차 죽어간거죠.
계속 해산물의 비유를 이어가자면, 결말에서 요조가 평온을 얻은 건 멍게의 삶에 빗댈 수 있겠네요. 멍게는 유년기엔 뇌를 가지고 헤엄치며 살지만 성체가 되면 뇌를 스스로 소화시키고 바닥에 붙어 일체의 움직임도 사고도 없이 살아간다고 해요.
시골에 붙박혀서, 행복도 불행도 없이, 모든것이 그저 지나간다 되내이며 살아가는 요조의 말로는 멍게를 닮았어요. 끝내 바다에 적응하지 못한 새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한거죠.
우리 사회는 하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기에 새들을 붙잡아 바다의 삶을 강요하고, 죽어가는 새들을 사회 부적응자라 비난하죠. 사실 요조가 바다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바다가 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역시도 당연한 것이죠.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고 포용하지도 않아야 할까요? 새들이 가진 색색의 날개는 산호초의 아름다움에 깃털의 빛깔을 더할 수 있어요. 칼로 주고 총으로 받는 박애주의 딜교천재 랭보나 층간소음 문제 해결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쇼펜하우어를 생각해 보세요. 정도의 차이는 있다만 그들이 사회에 적응했다고 말할 순 없겠죠. 하지만 그들의 작품은 우리들에게 거대한 영감과 감동을 남기잖아요? 그런 사고의 차이는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줘요.
물론 바다가 하늘과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바다와 하늘이 모두 푸르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리 힘든 일은 아닐 수 있지 않을까요?
태생적으로 본질적인 차이를 품고 있는 인간이란 테마는 제가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이고, 나름대로 끄적여 보고 있는 소설에도 이런 인물이 등장하기에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왜 이제서야 이런 책을 읽었는지 아쉽기도 하네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 알고 있는데 다자이 오사무가 푸코를 읽을 수 있었다면 다른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물론 제 푸코에 대한 이해는 개론서 몇 권 읽어본 정도가 다이기에 잘못된 추론일수도 있겠지만요.)
다른 사람의 의견에 영향받지 않기 위해서 책 뒷편 작품 해설조차 읽지 않고 쓴 독후감이기에 오독이나 잘못된 이해가 존재할 수 있지만 대충 봐 주세요.
그건 그렇고 어쩌다 보니 전체적으로 나스한테 큰 빚을 진 글이 되어버렸네요. 나스 키노코 글 수준 ㄹㅇ 실화냐? 진짜 페이트는 문학이다...
문학을 영어로 하면 Fate..
페이트도 안 해 본 놈들이 사랑을 알겠냐
나랑 같은 고딩 맞냐 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