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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의 학교에는 전설이라고 하기에는 뭣한, 미신이라고 부르기엔 귀여운 이야기가 존재한다. 학교의 인문학 건물인 서관과 법학 그리고 경영학 건물들을 이어주는 길인 '다람쥐길'에 관련된 우스갯소리다. 어느날 이후 그는 그 우스갯소리를 전설로, 신의 약속처럼 여긴다. 반면 수에게는 가당 찮은, 귀엽지도 않은 이야기일 뿐이다. 전설은 구전되고, 거짓은 진실이 된다. 수는 '남자들이 으레 그렇지.'라 여기고 마뜩 잖아 하는 정도가 다이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다람쥐길을 걷는 남녀가 다람쥐를 만나면, 아름다운 커플이 된다는 것이다.


  다람쥐들로써는 어이가 없을 뿐이다. 이런 이야기 때문에 자신들의 통로도 맘껏 사용하지 못한다. 건너편 도토리가 보여 잽싸게 가져오고 싶다가도, 남녀가 쌍으로 길을 지날 때는 '멈칫' 하는 것이다. 다람쥐는 일단 견적을 내본다. "음, 남자가 놈팽이 같아.", "저 여자는 너무 여우군." 이렇게 사려 깊은 다람쥐들인 것이다. 그렇게 구제해 준 남녀만 역사적으로 수만명이다.


  반면에 이 '톨이'라는 다람쥐는 예외다. 이 놈은 파국을 선견하는 데에 특출난 재능이 있다. 그리고 그런 남녀들에게만 "나 잡아 봐라!" 하고 나타나는 것 아닌가? 도토리고 자시고 이 조그만 톨이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라도 더 못생긴 인연을 만들지 못해 안달나 있다. 톨이가 만들어준 인연은 물줄기가 되어 연애라는 강가를 지나 눈물 바다를 만든다. 이별 후 남자들은 으레 여자의 집 앞에서 밤을 새며 "너가 떠나면 나는 죽어버리겠다."라고 말하기 일쑤이고 오뉴월의 여자들은 서리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톨이 이렇게 한을 심어준 남녀만 역사적으로 수백명이다.


  봉은 신이 났다. 썸을 타고 있는 수와 다람쥐길을 걸을 때 이 톨이란 놈을 만났으니 기뻐 팔짝 뛸 노릇 아니겠는가. 그는 오늘 꽃을 샀다. 오늘 저녁에는 수를 불러내 숨겨 놓지도 않았던 그의 소중한 마음을 수에게 줄 작정이다. 꽃집에 들려 그는 점원에게 "고백 하기에 좋은 아무 꽃이나 주세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점원이란 사람이 톨이 같은 양반 아닌가! 아침에 남자친구와 대판 싸우고 일을 나온 그녀는 "속절 없는 사랑"이란 뜻의 아네모네를 주섬주섬 챙겨 꽃다발을 만들어준다. 봉은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꽃말이 어쨌고 자시고 애초에 가능성이 없는 고백이었다. 수는 썸을 타면 탈수록 가벼워 보이는 봉의 행동과 말투에 싫증이 난 상태이다. 봉이 수에게 오늘밤 고백을 할 것이란 얘기가 과 내에 쫙 퍼져 수에 귀에도 들어올 정도니 말이다. 고백을 거절하는 것은 언제나 피곤하지만 더이상 소문의 확산을 막아야한다. 그녀는 봉을 만나러 방을 나서기 전 옷을 고른다. 계절에 맞는, 오뉴월의 과잠. 옷말은 "완강한 거부"


  봉과 수는 구 법관 앞에서 만나 서관으로 걷는다. 봉의 작전은 이렇다. 서관 앞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 아래서 고백을 할 작정이다. "저 꽃보단, 이 꽃이 더 예쁘지? 근데, 너란 꽃이 더 예쁘다."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 대사다. 꽃을 들고 다닐만한 자신감이 없는 봉은 가방 속에 꽃을 넣어 두었다. 하지만 꽃잎은 수 눈에 훤히 보인다. '아이구야, 아네모네?' 수는 생각한다. 지체할 수가 없다. 수는 다람쥐길 한 가운데서 힘들게 말한다.


"미안해,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 사람들에게 내 얘기 좀 그만하겠니?"


  봉은 잠시 벙쪄있다. 하지만 특유의 자존심과 가벼움은 숨길 수 없다. 가방 위 돌출된 꽃잎을 황급히 가리며 말한다.


"무슨 소리야, 나라고 너 좋아하는 줄 아니?"


  수는 진절머리를 치며 종종 걸음을 친다.


  아직도 벙쪄 있는 봉 앞에 톨이가 지나간다. 저기 저 가까이 먹음직스러운 도토리가 한무더기다! "봉 잡았군!" 톨이는 기뻐한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져 옆을 보니, 울그락붉그락한 봉이 자신을 노려본다.


"톨, 너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