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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발전과 전문가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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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동아시아는 혼란의 시기였다. 서세동점과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의 대리전인 열전까지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그럼에도 현재 동아시아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동아시아의 발전에 대해 서방 세계는 경외의 눈초리를 보내며 동아시아를 연구하였다. 동아시아가 서양을 모방하려 한 시기와 비교하면 많은 사람들은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동아시아의 발전 모델은 모방이었다. 이는 불가피한 부분이었다. 서양이 약 200년에 걸쳐 이루어낸 근대화를 동양은 100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이루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게 모방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향후 100년 간 동아시아 발전 모델의 시발점인 것이다. 이와쿠라 사절단이나 조선의 수신사와 보빙사 등이 보고 기록한 내용들이 국가 정책에 전부 다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신문물에 대한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된 연쇄적 충격에 가장 빠르게 대처한 국가는 일본이다. 일본은 흑선의 충격 이후 발 빠르게 서양 문물을 도입해 앞서나갔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조선의 수신사와 보빙사. 청의 푸안신 사절단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점은 정신문화를 대하는 태도였다. 청이나 조선은 서양의 기술에는 감탄했으나 정신문화는 등한시하였다. 반면 이와쿠라 사절단은 기술뿐 아니라 정신문화에 대해서도 면밀히 고찰하였다.

사절단의 고찰에서 필자는 일본식 변형의 원류를 찾을 수 있었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자기네 식으로 변형하기를 좋아했다. 서양 문물의 좋은 점은 받아들이면서 일본의 정체성은 잃지 않으려 했다. 넓게 보면 이는 신식 문물을 받아들일 때 일본 뿐 아니라 각 나라가 보여주는 기본적인 자세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극단적일 정도의 제도적, 기술적, 정신적 변혁을 이루는 데도 천황제 국가라는 만세일계의 정통성은 놓지 않았다.

일부 사절단원들이 종교에 대해 다각도로 평가했지만 결국 국가신도는 서양의 기독교와 다른 의미로 근대 일본에 자리 잡았다. 메이지 시기 인종 개량까지 목표로 할 정도로 극단적인 서구화 정책을 폈던 일본이지만 꼭 필요한 부분은 지키려 했던 것이다. 일본식의 변형은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경제발전기에서도 드러나는데, 일본은 앞선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여 모방한 후, 그것을 발전시켜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어 냈다. 일본의 방법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대한민국은 일본을 모방하여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시아는 모방과 발전을 통해 유래 없는 성장을 이루어 냈고 일본이 그 선두주자임은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태평양 전쟁 패전으로, 눈부신 경제성장 이후에는 잃어버린 20으로 추락을 경험하였다. 이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전문가와의 소통 부재가 원인이었다. 기실 일본의 근대화나 경제 성장은 동시에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집단은 관료 등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위기 때마다 전문가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1930년대에는 정치에 문외한인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일본을 태평양 전쟁이라는 파멸의 길로 몰아갔으며, 버블 경제 시기에는 곳곳에서 위험성을 경고했으나 정부와 국민 모두 충고를 무시하고, 더욱이 정부는 잘못된 정책을 펴서 잃어버린 20년의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전문가 집단의 충고를 무시하고 잘못된 통화 정책을 펴다 외환위기를 맞았고, 중국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당시 전문가 집단이 제 기능을 못 하며 참사를 맞았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유람은 이러한 의미에서 뜻 깊다. 사절단의 대부분은 당시 신식 문물에 익숙해 있었고 이후 정부의 요직에 오른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일본은 단시간 안에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선별된 전문가 집단이 정치를 이끄는 것은 동양 정치 체제의 특징이다. 동아시아는 서구보다 훨씬 일찍 과거 제도라는 전문가 선발 시험을 도입했다. 이를 거울삼아 전문가 집단을 우대하는 문화를 도입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필자의 의견에 의문을 보일 수도 있다. 동아시아는 발전 과정에서 전문가 집단은 입신양명의 대표 격으로 인식되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근대 이후 동아시아는 전문가 집단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쿠라 사절단만 하더라도 본래 목표인 불평등 조약 개정에 실패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이후에도 전문가 집단은 꽉 막힌 이미지로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관료 집단은 동아시아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관료 집단이 선진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각 국가의 현실에 맞도록 조정했기에 동아시아는 발전할 수 있었다. 전근대에는 발전된 중국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의 기틀을 잡았고 근대 이후에는 서방 세계의 문물을 받아들여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었다. 동아시아의 발전 동력은 관료와 학계를 포함한 전문가 집단으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지금까지 전문가 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국가와 전문가 집단에 대한 지지 형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와쿠라 사절단과 조선의 보빙사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두 사절단 모두 서구에 외교를 목적으로 갔으나 발달된 서양 문물을 보고 유학으로 목적을 바꿨다. 그러나 이와쿠라 사절단이 보고한 내용은 정책에 비교적 잘 반영이 되었으나 보빙사가 보고한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보빙사의 일원이었던 자들은 갑신정변으로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혹자는 보빙사 세력의 정책이 입안되지 않은 이유를 갑신정변의 실패에서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된 이유가 개화 정책의 거부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근본적인 이유는 개화파가 위 혹은 아래로부터 아무런 지지도 받지 못해서임을 알 수 있다.

메이지 유신도 물론 시행 과정에서 엄청난 반발이 존재했다. 그러나 적어도 상부에서 이를 찍어 누를 만한 힘이 있었기에 급진적인 개화 정책은 통과되었고 국민들도 근대화에 차츰 적응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더라도 그것이 위정자 혹은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시행할 수 없다. 이 당연한 이치를 생각해 보면 조선이 일본처럼 빨리 근대화를 이룰 수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의 정책을 지지해줄 세력이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가 집단에게 정책적 지지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전문가 집단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제 동아시아도 동아시아만의 발전 모델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와쿠라 사절단과 보빙사, 푸안신 사절단이 본 것은 서양의 문물이었고, 거기에는 동양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히 서구를 모방하고, 자신의 색깔에 맞게 적용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동아시아가 새로운 시대의 선두주자로 나서고 있는 현재에 비추어 볼 때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그 어떤 나라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1930년대의 군국주의 팽창과 1960~80년대의 고도성장 당시의 패러다임으로 국가를 운영하며 주변국들에게 위기감을 주고 있고, 한국 역시 1980년대에 산업화와 민주화가 사실상 완료되었음에도 현재까지 산업화와 민주화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현 시점에 와서는 일대일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듯 보이지만 이는 사실 전근대 중국에 이어 다시 한 번 세계의 패권국으로 도약하겠다는 구시대적인 패러다임에 지나지 않는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끄는 것도 결국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이다. 다만 이전까지의 전문가 집단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전문가들은 그 결이 다르다. 과거의 전문가 집단은 그 수가 매우 적었다.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고 유학파까지 그 범주를 좁히면 그 수는 더욱 줄어든다. 당연히 모든 패러다임은 소수의 위정자들과 전문가 집단만이 독점했고 따라서 지식권력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상황이 다르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환경만 갖추어진다면 누구나 최고 수준의 강의를 청강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면에서도 여러 변화가 있어 현재는 투표 이외에도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기회가 늘었다. 여전히 정책 결정권은 위정자들에게 있으나 대다수의 시민들은 시민사회, 뉴미디어 등을 통해 정부를 견제할 수 있다. 즉 현대사회에서는 이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준전문가가 될 수 있기에 과거보다 훨씬 의견의 폭이 넓어졌다.

이렇게 많은 수의 준전문가와 함께 패러다임을 만들어나가야 하지만 동아시아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우선 재야 학자들의 힘이 너무 약하다. 동아시아에서 재야 학자들은 위정자에게 언로가 막혀 조언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직접 정치에 나서지 않는 이상 자신의 생각을 정치로 구현하기 쉽지 않다.

두 번째 문제로 시민사회가 너무나 약하다는 점이 있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1987년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 이후 각종 고난을 거치면서 시민사회가 발전하였으나 일본은 기나긴 자민당의 집권으로 인한 정치적 무관심으로 시민사회 형성이 활발하지 못하고, 중국의 경우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정치적 자유가 제한되기 때문에 시민사회가제대로 클 수 없는 환경이다.

다소 권위주의적인 사회 분위기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해 내는 데에 문제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서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동아시아 사회 특유의 권위주의적 분위기로 사람들은 의견을 내는 것을 꺼려하고 있으며 좋은 의견을 낸다 하더라도 그 의견이 상부에 전해질지는 알 수 없다.

상기한 문제점들로 인해 동아시아는 아직까지도 주도적인 패러다임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많은 서방 국가들이 국가 주도로 눈부시게 발전한 동아시아 국가들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여전히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방 선진국들을 모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아직까지도 사방의 제도를 모방하려 하고, 국민들은 서구를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것은 전술한 동아시아 패러다임의 부족현상과 맞물려 극단적 문화 사대주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 . 3국 모두 경제 강국으로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에 대한 동경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국가의 발전을 이끌어온 전문가 집단이 지나치게 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기의 이와쿠라 사절단 뿐 아니라 중화민국 시기의 중국 지식인들, 대한민국 경제발전기의 한국 지식인들 모두 서방이나 그 영향을 짙게 받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의 발전을 이루었으니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 문명에 대해 환상을 가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극단적 서구문물 동경 현상의 시작점이 관료를 포함한 전문가 집단이라는 이들의 책임이 크다. 물론 소시민들도 매체에서 묘사되는 서구의 발전된 문물에 매료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국가를 이끄는 사람들이 서구에 대한 환상만을 주입시키고 동양을 폄하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서구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론과 대한제국 시기 독립신문이다.

탈아입구론은 의도적으로 아시아를 폄하하고 서양을 절대시함으로써 이후 일본이 극단적 서양화를 추진하는 데에 밑거름이 됨과 동시에 아시아 각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했다. 독립신문 역시 극단적 서구화와 자유무역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전통적 가치를 뿌리째 부정했다. 탈아입구론과 독립신문은 근대화 초기의 사례이지만 이러한 경향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지식인들은 여전히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는 서구권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대세고 관료들도 서구권을 참고한다.

이 같은 서구권 콤플렉스는 동아시아의 발전을 가로막는 원인이다. 동양은 서양에 비해 약 1700년 동안 앞선 문명을 보유했다. 하지만 그 이후 300년 동안 기술의 격차는 역전되었고, 지난 100년 동안에는 서세동점의 시기를 맞았다. 그리하여 생긴 콤플렉스는 동아시아가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스스로 없애려고 하는 원인이 되었다. 서구권을 참고하여 발전했지만 그 과정에서 쓸모없다고 인식되는 건 모두 버려진 채 동아시아만의 특색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서구권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동아시아는 아직도 100여 년 전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에게 심어놓은 열등감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민족주의 교육에 매달리며 국가적 자긍심을 높이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결국에는 서구권을 향한 보여주기 식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 일본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일본 대단해!’ 식의 국수주의 형식이나 한국 방송에서 외국인들, 특히 서구권 백인들에게 한국문화를 칭찬받고 싶어 하는 행태 등이 이를 방증한다.

이런 콤플렉스를 깨뜨려야 할 전문가 집단이 오히려 콤플렉스를 조장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전까지는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서 그들을 모방해왔지만 이제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그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전문가 집단이 할 일이다.

이와쿠라 사절단과 보빙사가 각각 서구권에 갔을 때로부터 약 150년의 시간이 흘렀다. 150년 전 그들의 신식 문물을 보고 놀라던 국가들은 이제 명실상부한 경제 강국이 되었고, 서양인들이 침탈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동아시아는 찬사를 보낼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 원동력은 서구를 모방하고 올바른 정책으로 발전을 이끈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현재 정체 상태에 빠져 있다. 동아시아 고유의 패러다임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문가 집단이 너무 과거의 방식에만 몰두해 미래 가치를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 동아시아 사회에 서구권 콤플렉스를 심어줌으로써 동아시아 특유의 가치를 생산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동아시아의 발전에 전문가 집단이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전문가 집단은 150년 전 이와쿠라 사절단이나 보빙사가 보여준 모방의 가치가 아니라 2020년에 맞는 혁신의 가치를 창출해내야 한다. 그래야만 동아시아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