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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일본인의 질서와 계층 제도에 대한 신뢰는 인간 상호 관계 및 인간과 국가와의 관계에 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 전체의 기초가 된다. 가족, 국가, 종교 생활 및 경제 생활 등과 같은 그들의 제도를 기술함으로써 일본인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씨족집단은 신사나 성소를 매개로 이어진다. 이들은 같은 씨신을 제사 지내는 촌민이지만 그저 같은 땅에 정주한 결과로, 공통된 선조를 공유하는 혈연집단은 아니다.


일본에서 효도란 직접 얼굴을 마주치는 한정된 가족 간의 문제이며, 그 직계 비속 집단 내에서 세대, 성별, 연령에 따라 자기에게 알맞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뜻한다.


가부장은 가장 위에 존재하며 다른 가족 구성원은 어떤 일을 할 때 가부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장남은 가부장에 준하는 위치와 특권을 갖는다. 그리고 성별에 따라 계층 제도 속 위치가 달라지는데 아내는 남편의 뒤를 따라 걸어야 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부장의 독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인들이 가계지출을 담당하고 가정사를 관장하거나, 아우가 전통에 얽매인 형보다 높은 경제적 지위를 가질 수 있으며, 가문에 중대한 일이 일어날 경우 친족 회의를 소집해 모든 이의 의견을 수렴한 후, 가부장은 책임을 지고 결정을 내린다. 이러한 가정 내부의 계층 제도의 습관은 경제 생활이나 정치 생활 등 넓은 영역에 적용된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황실과 궁정 귀족∙무사∙농민∙공인∙상인∙천민의 계급적 카스트 사회였다. 천민들은 터부시된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로서 정식 사회 조직 바깥에 방치된 자들이었다. 상인은 천민 바로 위에 있는 계급이었는데 그 이유는 상인들이 부를 축적해 권력을 행사하려 들면 봉건제가 붕괴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 있다.


농민은 무사에 비해 법률상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무거운 세금을 냈으나, 농지 소유권과 같은 몇 가지 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가혹한 조치에 항의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들의 요구는 막부 당국의 판결에 따라 받아들여 지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 폭동 지도자는 엄격한 계층 제도의 법을 어긴 것이므로 처형됐다.


낮은 계급의 무사는 높은 계급의 무사인 다이묘에 소속됐다. 이들은 하위 계층보다 큰 특권을 누렸고 자신이 속한 번의 다이묘로부터 봉록을 받고 생활했으며, 평화로운 에도 막부 시기에는 관료 및 예능의 전문가로 활동했다. 다이묘는 각 번을 다스리는 자치권을 가진 영주였다. 그러나 최고권력자인 쇼군은 이들을 제어하기 위해 서로 교류를 못하게 하고 산킨코타이 제도나 거대한 토목공사를 명령해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황실과 궁정 귀족은 교토에 유폐돼 궁중 의식을 행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카스트 제도에도 부유한 상인이 무사 가문과 정략결혼을 맺는 등 약간의 유연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아래부터 위까지 명확하게 규정되었으며 각자의 역할과 의무가 정해진 일본 계층 제도는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공고했다.


제4장


도쿠가와 막부에 반대하며 존왕양이 사상을 가진 도자마 영주의 세력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일으켜 이중 통치를 종언시켰다. 이들은 극도로 보수적이었으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존 신분제를 해체하는 등 급격한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이 세력의 주축은 하급 무사들과 상인들이었는데 그들의 행동방침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부국강병이었다.


먼저 그들은 이중 통치의 종말로 최고 지도자를 천황으로 일원화했고 영주의 번은 폐지하여 행정구역인 현으로 했다. 이로 인해 영주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 사이의 모순을 없앴다.


두 번째로 모든 활동 분야에 있어서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국가와 국민 간의 ‘알맞은 위치’의 의무를 세밀히 규정했다. 가장 높은 정치적 권력을 가진 계층은 천황을 배알할 수 있는 중신, 천황의 직접적인 조언자 및 천황의 옥새가 찍힌 사령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이었다. 그 밑에 각료, 도지사, 판사, 각국의 장관, 기타 고관이 있고 선거로 선출된 관리나 의원들이 그 다음이었다. 일반 국민들은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다. 지방 자치에서는 국민들은 일정한 권리를 누리기는 했으나 교육, 치안, 사법은 중앙 정부의 관할이었다.


세 번째로 종교분야에 있어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국가신도라는 하나의 형식적 제도를 만들어 냈다. 그들은 국가신도가 국민적 상징에 정당한 경의를 표하는 것을 기본 취지로 하기 때문에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신앙의 자유의 원칙에 저촉됨 없이 모든 국민에게 국가 신도를 요구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 가르쳤다. 국가신도는 ‘만세일계’의 통치자인 천황을 숭배하는 종교이다. 이 종교는 국가에 의해 관리되었고 신관들은 정치적 계층처럼 수직적 계층제에 의해 지배됐다. 그러나 국민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것에 대해 침해 받지 않았다.


네 번째로 메이지 시기 창설된 육∙해군은 정부로부터 독립돼 그 수뇌부는 직접 천황을 배알할 수 있었다. 이것은 헌법에 규정된 것은 아니었으나 관례로서 군부의 지상권 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정치인들이 도입한 것이었다.


다섯 번째로 산업의 발전을 위해 정치인들은 계획에 따라 정책을 실행하고 선택된 소수의 재벌들을 키웠다. 이러한 정책은 큰 자본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중공업 분야에 적용되었다. 적은 자본과 저임금으로 경영될 수 있는 경공업 분야는 대부분 낡은 도제 제도에 의해 운영되었다. 재벌들은 여론에 의해 공격받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공격받은 것은 나리킨 즉, 벼락부자였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나리킨이 정해진 계층의 위치 밖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모든 분야에 있어 계층 제도를 고려하면서 그 사회의 질서를 다듬어 나갔다. 하지만 이것을 수출하려 할 때 문제가 생겼다. 일본의 계층 제도와 같은 것은 다른 곳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식민∙점령지 주민들에게 당연히 나쁜 제도로 인식돼 분개를 불러 일으켰다.


한 지역의 의식은 역사가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나 보다. 일본인의 위계 의식은 전근대를 지나 근대에도 변주되어 나타났고 전후에도 어렴풋이 느껴진다. 여전한 천황제부터 부라쿠민이나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