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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까지 나는 알베르 카뮈에 대해 쓸 기회를 요리조리 피해왔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나라의 걸출한 불문학자인 김화영의 문장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는 여기서도 『이방인』을 새롭게 읽거나 다르게 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보다 흥미롭게 읽어보려고 한다.


우선 시제부터 말해볼까. 『이방인』은 '단순 과거' 대신 '복합 과거'를 활용한 소설로 유명하다. 불어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단순 과거'와 '복합 과거'가 얼마나 커다란 차이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단순 과거'가 문어체에 쓰이고 '복합 과거'가 구어체에 쓰인다는 설명에 비추어 이렇게 상상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오늘 엄마가 죽었어.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지.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론 아무런 의미도 없어.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지."


감정을 상실한 것마냥 어머니가 죽었다는 문장을 건조하게 내뱉는 뫼르소의 모습에 1940년대의 프랑스가 열광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직접 몸으로 겪으며 허무를 체험했던 그들에게 뫼르소는 거울상과 같았을 것이다. 실제로 롤랑 바르트는 『이방인』을 두고 건전지의 발명과 다름 없는 사건이라 평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뫼르소는 어떤 인물일까.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지만, 그는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평소처럼 유흥을 즐기다 아랍인을 총으로 죽여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다. 여기에는 세 번의 부정(否定)이 숨어 있다.


잠시 신약을 참조하자면 베드로는 예수가 체포되는 순간 그를 세 번이나 부정했다 닭이 울자 잘못을 깨닫고 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후 이것은 하나의 모티프가 되어 서구문학에서 꾸준히 변주되어 왔는데, 그중 가장 카뮈와 가까웠을 작품은 앙드레 지드의 「배덕자」였을 것이다.


「배덕자」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미셸은 사랑 없이 마르슬린과 결혼한 다음 유럽 남부를 여행하던 중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만다. 다행히 그는 마르슬린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금세 쾌차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마르슬린이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만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유럽 남부의 활력이 마음에 들었던 그는 인정(人情)과 도리(道理)에 얽매이지 않은 채 그것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었다. 마르슬린이 사경을 헤맬수록 자신의 마음이 환희로 가득차는 것을 느꼈던 그는 마르슬린이 죽음을 직감하고 그에게 묵주를 쥐어주자 들뜬 마음에 그것을 세 번이나 놓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배신한 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베드로의 서사에서 지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를 지운 다음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다'를 삽입했다. 주지하다시피 카뮈는 장 그르니에, 앙드레 말로, 마르셀 프루스트 등 당대의 불문학을 열렬히 탐독하던 문청이었고, 지드는 그가 사랑하는 작가들 중 하나였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배덕자」의 미셸이 행한 세 번의 부정을 확대하여 어머니에 대한 개인적 애도를 부정하고 살인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부정하며 구원에 대한 초월적 종교를 부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다. 진실.


2.

뫼르소는 세계가 요구하는 연기(演技)를 전혀 따르지 않는다. 그는 '어머니를 잃은 사람'답지 않게 우연히 만난 여자와 희희덕거리고, '살인을 결심한 사람'답지 않게 사소한 이유로 총을 들었으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답지 않게 절대자에 귀의하지 않는다. 『이방인』이 미국에 출간됐을 때 카뮈가 밝혔던 대로 뫼르소는 진실을 위해서라면, 그러니까 스스로에게 솔직하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성하거나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는 충분히 감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렸다면 재판이 아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뫼르소의 죄목은 살해 경위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불량한 행실에 의해 결정된 것이므로.


하지만 뫼르소는 그러지 않는다. 그에게 삶이란 원래부터 부조리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유일한 대응은 그것을 인정하고 매사에 진솔하게 임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결말에 이르러 이렇게 단언한다.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 그래,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지." 카뮈가 뫼르소를 두고 '오늘날의 그리스도'라고 평했던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그는 진실을 추동삼아 부조리한 생애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모든 것을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거지.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껴.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


3.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카뮈는 자신의 문학 세계를 세 단계로 정리했다. 부정, 긍정, 그리고 사랑. 부정에 해당하는 작품은 『시지프 신화』(에세이), 『칼리굴라』(희곡), 『이방인』(소설)이며 긍정에 해당하는 작품은 『반항하는 인간』(에세이), 『정의의 사람들』(희곡), 『페스트』(소설)이다. 『이방인』에서 볼 수 있듯이 부정에 해당하는 작품은 고독에 근거하여 조리와 무관하게 펼쳐지는 세계를 그려내려 했고, 『페스트』에서 볼 수 있듯이 긍정에 해당하는 작품은 연대에 근거하여 그런 세계에 저항하는 인간을 그려내려 했다.


4.

이제 사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이방인』을 펼친 날 나는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간신히 소설을 전부 읽어냈다. 반면 『페스트』를 펼친 날 나는 거의 밤을 새워가며 흥미롭게 소설을 전부 읽어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방인』의 서사는 별다른 부연 없이 흘러간다. 카뮈의 유려한 문체로 인해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을 뿐, 냉정하게 말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마리와의 연애로 화제가 전환되는 과정은 또 살라마노의 비탄에서 레몽과 정부의 다툼으로 화제가 전환되는 과정은 그다지 필연적이지 않다. 『이방인』의 주제를 생각하면 이러한 작위는 다분히 의도된 것인데, 필연성에 기반한 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당연히 읽기가 버거울 수밖에 없다. 뫼르소의 불가해한 내면이 어느 정도 해명되는 결말에 도달할 때까지 나는 그야말로 안개를 헤집는 기분이었다.


반면 『페스트』의 서사는 『순교자』(김은국)나 <단간론파>(스파이크)를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통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기 때문에 꽤나 익숙하게 흘러간다. 갑작스러운 재난, 서서히 절망하는 인간, 그러나 진실을 앞세워 매사를 성실하게 버텨나가는 영웅. 『페스트』가 겨냥하고 있는 지점은 너무도 명확하다. 어떤 이유도 없이 거대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부조리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페스트』는 그것을 향해 굳건하게 나아간다. 완벽한 교향곡처럼 소설은 촘촘한 구성을 통해 도피하는 인간(랑베르)과 초월하는 인간(파늘루)을, 그리고 반항하는 인간(타루와 리유)을 그려낸다. 『이방인』에서 다소 모호하게 나타났던 군상들은 그렇게 아름답게 드러난다.


5.

『이방인』의 이면을 들춰볼 시간이다. 2015년에 공쿠르상의 최우수 신인상은 『뫼르소, 살인 사건』(카멜 다우드)에게 돌아갔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뫼르소, 살인 사건』은 정면으로 『이방인』에 시비를 거는 소설이다. 첫문장만 보아도 그렇다.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 있네."


『이방인』에서 가장 회자되는 장면 중 하나는 단지 햇빛이 따갑다는 이유로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총을 겨눈 장면일 것이다. '부조리'라는 카뮈의 화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일 텐데, 『뫼르소, 살인 사건』은 그것이 지닌 차별과 혐오의 기제를 문제삼는다.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는가. 가해자인 뫼르소는 끝까지 삶에 반항하려 했던 영웅으로 승격되지만, 피해자인 아랍인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소설에서 지워진다. 『뫼르소, 살인 사건』은 이러한 불균형의 원인을 뫼르소의 '프랑스-백인'이라는 정체성과 아랍인의 '알제리-황인'이라는 정체성에서 찾는다.


『뫼르소, 살인 사건』의 주인공인 하룬은 사람들이 가해자인 뫼르소에 대해서만 기억하고 피해자인 자신의 형 무싸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않는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부조리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뫼르소의 삶은 피식민자의 입장에서 수많은 날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 사기극에 가깝다.


알제리에서 태어났지만 카뮈는 알제리가 겪었던 역사적 고난에 대해 무심하고 무감했다. '실존주의'를 매개로 친분을 쌓았던 사르트르와 '알제리 독립 투쟁'을 계기로 영원히 갈라섰을 만큼 말이다. 『뫼르소, 살인 사건』이 지적하고 있는 대로 『이방인』이 분출하는 부조리는 지배층의 기만적인 관념일지도 모른다.


6.

흥미롭게도 『뫼르소, 살인 사건』은 『이방인』의 제국주의적 시선을 전복하려 하면서도 『이방인』의 부조리라는 주제는 계승하려 한다. 뫼르소가 햇빛 아래서 아랍인을 죽였듯이 하룬은 달빛 아래서 프랑스인을 죽이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의 죄보다는 그를 둘러싼 정세에 관심이 많다. 그가 어떠한 상황에 처했으며 어떠한 사건을 겪었는지 등등.


아무래도 카멜 다우드는 비판과 존경을 담아 카뮈에게 소설을 바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이방인』이 보여주는 차별과 혐오,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추악한 자기 변호는 단호히 거부할 수밖에 없지만, 『이방인』이 보여주는 하나의 진리-결국 인간은 부조리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며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이방인』을 읽는 오늘날의 독자가 어느 정도 공감할 마음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