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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해도 될까요?
시지프신화랑 이방인 같이 썻오요. 허접이니까 착하게 봐주세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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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는 인간은 태어나서 생각하는 습관보다 살아가는 습관을 먼저 배운다고 말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살고 있는 생존 기계들의 숙명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살아가는 습관 속에서 자살을 한다. 철학자인 카뮈는 자살을 삶이 무의미함을 고백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자살을 삶이 유의미함을 나타내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두 지성인은 각자의 분야의 관점에서 삶에 인간적인 이유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자살은 정반대의 가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하여튼 카뮈는 리처드 도킨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자살하는 사람은 현실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로 분류했다.
가장 진지한 철학적 문제인 자살에 대해서 긍정과 부정 두 가지의 대답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카뮈는 문제에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모순적으로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본질을 회피라고 부른다.
자살을 긍정하는 것은 일상의 불합리함,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 살아가는 습관의 우스꽝스러운 면 등등 이러한 부조리들을 해소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조리는 무엇이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람은 어느 시대나 살아가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은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이다. 이런 일상의 연속에서 권태를 느끼는 것으로 의식은 깨어난다. 깨어난 의식은 세상을 볼 수 있다. 의식이 보는 세상은 비합리적인 것들의 투성이다. 맨 처음으로는 아마 반복되는 일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비합리적인 것들을 의식은 이성을 통해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성은 이런 비합리적인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모순의 존재다. 이성과 비합리성의 대립으로 생겨나는 것이 모순이고 부조리다. 비합리적인 것들을 비합리적인 것 그 자체로 놔두는 것은 인간을 자살로 몰아세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이러한 반복되고 무의미한 부조리한 삶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자살을 한다.
현실은 비합리적이지만 미래에는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반복되는 일상을 버틴다. 이를 희망이라는 단어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자살에 대한 부정이 아닌 회피다. 희망을 가지고 사는 인간은 내세나 장밋빛 미래 등을 바라보며 현실의 비합리성을 초월해서 산다.
자살과 희망은 본질적으로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자살은 비합리성을 인정함으로 비합리와 이성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희망은 이와는 다르게 비합리성을 무시함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회피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부조리를 안고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 인간은 부조리를 안고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카뮈는 부조리를 이러한 부정적인 것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부조리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살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러한 부정을 3가지의 형태로 표현한다.
하나는 반항이다. 반항은 부조리를 끊임없이 보는 것이다. 부조리를 끊임없이 확인하지만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부조리는 끊임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반항은 죽음을 의식하는 동시에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유다. 인간은 대개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자유를 부정당해도 생각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하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것으로 말이다. 미래를 생각하는 것, 무언가를 자기 뜻대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은 무한한 자유라는 환상 속에서 인간은 목표를 정하고 이루고자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유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죽음은 다가온다. 다가오는 죽음은 인간에게 시간을 약탈한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인간은 그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러나 부조리를 아는 인간은 삶이 자유롭지 않음을 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기에 무한하고 영원한 자유의 환상에서 독립한다. 독립된 자유는 유한하다. 자유의 환상도 무한하다는 착각을 일으킬 뿐 죽음에서 끝이다. 미래, 내일이 자유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인 현재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열정이다. 우리는 두 번째 결론에서 자유는 유한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 부조리를 아는 인간의 삶인 것이다. 부조리를 아는 인간은 유한한 자유와 경험을 통해 느끼는 것에 의미를 둔다. 그들은 자유를 누리며 경험하는 것을 한정된 시간에 최대한 많이 채워 넣는다. 현재에 집중하고 빈틈없이 채워가는 것이다.
나는 위의 시지프 신화의 내용을 토대로 뫼르소가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현대인이라 생각한다. 사형선고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설 이방인은 총 3번의 죽음이 나온다.
첫째는 엄마의 죽음이다. 뫼르소는 엄마의 부고 소식을 받고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 때 태양은 뜨겁게 뫼르소를 내리쬐고 있었다.
둘째는 아랍인의 죽음이다.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인했다. 아랍인의 죽음은 이후 셋째 죽음에 큰 영향을 줬다. 하지만 뫼르소에게 아랍인의 죽음을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엄마의 죽음 때처럼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었고 아랍인은 죽어 있었다.
셋째는 뫼르소의 죽음이다.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뫼르소의 죽음 역시 다른 죽음들과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일상이어야 했다. 하지만 뫼르소는 독방에 갇혀 죽음과 함께 있던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볼 수가 없다. 태양을 보면서 느끼던 더위와 현기증, 그늘에서의 시원한 바람 역시 느낄 수 없다. 당연히 반복되던 일상이 어긋났다. 독방은 반복되는 일상과 떨어져 생각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권태로운 공간이다. 뫼르소는 독방에서 이전에 겪었던 일상을 되새기기 시작한다.
권태로운 되새김 속에서 뫼르소의 의식이 깨어나 세상을 본다. 의식은 재판에서 살인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사형이 결정된 부조리함을 본다, 죽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유한한 시간을 본다, 나에게 남은 것들을 본다.
죽음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인생에 반항한다.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있고 남은 것들을 모두 소진하려는 열정이 있다. 그렇기에 뫼르소는 죽음이란 운명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행복하다.
현대인의 삶은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시지프 혹은 뫼르소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생각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유한한 시간 속에서 적어도 나는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번다. 매일매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비슷하고 권태로운 생활을 반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고 독방에 갇혀 생각하는 뫼르소의 모습은 알베르 카뮈가 바라는 반항하는 현대인의 표상이 아니었을까.
시지프신화랑 이방인 같이 썻오요. 허접이니까 착하게 봐주세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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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는 인간은 태어나서 생각하는 습관보다 살아가는 습관을 먼저 배운다고 말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살고 있는 생존 기계들의 숙명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살아가는 습관 속에서 자살을 한다. 철학자인 카뮈는 자살을 삶이 무의미함을 고백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자살을 삶이 유의미함을 나타내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두 지성인은 각자의 분야의 관점에서 삶에 인간적인 이유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자살은 정반대의 가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하여튼 카뮈는 리처드 도킨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자살하는 사람은 현실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로 분류했다.
가장 진지한 철학적 문제인 자살에 대해서 긍정과 부정 두 가지의 대답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카뮈는 문제에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모순적으로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본질을 회피라고 부른다.
자살을 긍정하는 것은 일상의 불합리함,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 살아가는 습관의 우스꽝스러운 면 등등 이러한 부조리들을 해소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조리는 무엇이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람은 어느 시대나 살아가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은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이다. 이런 일상의 연속에서 권태를 느끼는 것으로 의식은 깨어난다. 깨어난 의식은 세상을 볼 수 있다. 의식이 보는 세상은 비합리적인 것들의 투성이다. 맨 처음으로는 아마 반복되는 일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비합리적인 것들을 의식은 이성을 통해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성은 이런 비합리적인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모순의 존재다. 이성과 비합리성의 대립으로 생겨나는 것이 모순이고 부조리다. 비합리적인 것들을 비합리적인 것 그 자체로 놔두는 것은 인간을 자살로 몰아세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이러한 반복되고 무의미한 부조리한 삶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자살을 한다.
현실은 비합리적이지만 미래에는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반복되는 일상을 버틴다. 이를 희망이라는 단어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자살에 대한 부정이 아닌 회피다. 희망을 가지고 사는 인간은 내세나 장밋빛 미래 등을 바라보며 현실의 비합리성을 초월해서 산다.
자살과 희망은 본질적으로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자살은 비합리성을 인정함으로 비합리와 이성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희망은 이와는 다르게 비합리성을 무시함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회피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부조리를 안고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 인간은 부조리를 안고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카뮈는 부조리를 이러한 부정적인 것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부조리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살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러한 부정을 3가지의 형태로 표현한다.
하나는 반항이다. 반항은 부조리를 끊임없이 보는 것이다. 부조리를 끊임없이 확인하지만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부조리는 끊임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반항은 죽음을 의식하는 동시에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유다. 인간은 대개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자유를 부정당해도 생각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하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것으로 말이다. 미래를 생각하는 것, 무언가를 자기 뜻대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은 무한한 자유라는 환상 속에서 인간은 목표를 정하고 이루고자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유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죽음은 다가온다. 다가오는 죽음은 인간에게 시간을 약탈한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인간은 그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러나 부조리를 아는 인간은 삶이 자유롭지 않음을 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기에 무한하고 영원한 자유의 환상에서 독립한다. 독립된 자유는 유한하다. 자유의 환상도 무한하다는 착각을 일으킬 뿐 죽음에서 끝이다. 미래, 내일이 자유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인 현재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열정이다. 우리는 두 번째 결론에서 자유는 유한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 부조리를 아는 인간의 삶인 것이다. 부조리를 아는 인간은 유한한 자유와 경험을 통해 느끼는 것에 의미를 둔다. 그들은 자유를 누리며 경험하는 것을 한정된 시간에 최대한 많이 채워 넣는다. 현재에 집중하고 빈틈없이 채워가는 것이다.
나는 위의 시지프 신화의 내용을 토대로 뫼르소가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현대인이라 생각한다. 사형선고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설 이방인은 총 3번의 죽음이 나온다.
첫째는 엄마의 죽음이다. 뫼르소는 엄마의 부고 소식을 받고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 때 태양은 뜨겁게 뫼르소를 내리쬐고 있었다.
둘째는 아랍인의 죽음이다.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인했다. 아랍인의 죽음은 이후 셋째 죽음에 큰 영향을 줬다. 하지만 뫼르소에게 아랍인의 죽음을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엄마의 죽음 때처럼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었고 아랍인은 죽어 있었다.
셋째는 뫼르소의 죽음이다.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뫼르소의 죽음 역시 다른 죽음들과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일상이어야 했다. 하지만 뫼르소는 독방에 갇혀 죽음과 함께 있던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볼 수가 없다. 태양을 보면서 느끼던 더위와 현기증, 그늘에서의 시원한 바람 역시 느낄 수 없다. 당연히 반복되던 일상이 어긋났다. 독방은 반복되는 일상과 떨어져 생각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권태로운 공간이다. 뫼르소는 독방에서 이전에 겪었던 일상을 되새기기 시작한다.
권태로운 되새김 속에서 뫼르소의 의식이 깨어나 세상을 본다. 의식은 재판에서 살인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사형이 결정된 부조리함을 본다, 죽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유한한 시간을 본다, 나에게 남은 것들을 본다.
죽음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인생에 반항한다.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있고 남은 것들을 모두 소진하려는 열정이 있다. 그렇기에 뫼르소는 죽음이란 운명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행복하다.
현대인의 삶은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시지프 혹은 뫼르소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생각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유한한 시간 속에서 적어도 나는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번다. 매일매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비슷하고 권태로운 생활을 반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고 독방에 갇혀 생각하는 뫼르소의 모습은 알베르 카뮈가 바라는 반항하는 현대인의 표상이 아니었을까.
내가 쓴 감상문보다 훨 낫네
굿굿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묶어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