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교양 수업에서 레포트로 냈던 거라 분량이 좀 많음
한 줄 요약하면 암튼 개꿀잼이었다ㅋㅋㅋ
일본의 카프카가 모래의 여자를 통해 보여준 일본의 부조리한 삶
모래의 여자는 일본의 카프카라고 불리는 아베 코보의 대표작이며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영화화되어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도 했다. 평소에도 카프카, 카뮈, 사르트르, 베케트, 쿤데라 등등의 작가들, 실존주의 문학, 부조리 문학을 좋아하던 나는 일본의 카프카라는 말에 혹해 이 작품을 선택하여 읽게 되었다. 인간의 실존에 대해 물음은 던지는 작품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앞서 말했던 작가들 못지않게 나에게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었다.
아베 코보의 본명은 아베 기미후사이다. 191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이듬해부터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만주에서 살았다. 의사였던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도쿄 대학교 의학부에 들어가지만, 의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학교를 졸업하고 의사의 길을 단념했다. 1947년 아방가르드에 눈을 뜨고 ‘세기의 모임’을 결성했다. 이 무렵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열성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1951년 「빨간 누에고치」로 전후문학상을, 「벽-S.카르마 씨의 범죄」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으며, “1950년대 일본 풍토 속에서 당연히 출현하지 않으면 안 될 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1962년 「모래의 여자」를 출간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급부상했다.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로 심도 있는 실존주의적 작품들을 써서 ‘일본의 카프카’로도 불린다.
모래의 여자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남자가 일상에서 도피하기 위해 모래땅으로 곤충 채집을 나선다. 그가 찾아간 해안가 모래 언덕에는 기이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부서져 가는 벌집처럼 지하로 20미터 가까이 깊게 팬 모래 구덩이마다 바닥에 집을 지어 놓았다. 남자는 마을 사람들의 계략으로 여자 혼자 사는 모래 구덩이에 갇히게 되고, 흘러내리는 모래에 집이 파묻히지 않도록 매일 삽질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여자는 자기 혼자서는 그곳 생활을 견디기가 벅차다고, 한 집이 붕괴되면 사구에 자리 잡은 마을 전체가 붕괴되기 때문에 작업을 멈출 수가 없다고 해명한다. 남자는 자기에게도 좀 더 그럴듯한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냐고 절규하며 수차례 탈출을 시도한다. 결국 그는 치밀한 계획 아래 구멍을 빠져나오지만, 소금밭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그는 마을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시 구멍으로 돌아간다. 그러던 중 남자는 우연히 모래 속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유수 장치를 발명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마을 사람 누군가에게 유수 장치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도망칠 여건이 생겼음에도 탈출을 뒤로 미룬다.
카프카에스크라는 말이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이름에서 유래된 말로 수수께끼 같고 구체적이지 않은 협박, 환영과 같은 어두운 힘 앞에 내버려진 존재에 대한 섬뜩한 감정을 말한다. 이 형용사는 수많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기본 분위기에서 생겨난 말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들은 침울한 코믹에서 비극에 이르기까지 이유도 모른 채 협박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행동한다. 모래의 여자는 바로 이러한 카프카에스크가 잘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일본의 카프카라고 불리는 것이다. 모래의 여자에서 남자 주인공인 니키 준페이가 바로 카프카의 소송, 성에서의 요제프 K인 것이다.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소송에 걸려 결국 죽고 마는 요제프 K처럼 준페이는 실없는 이유로 사구에 갇혀 결국 모래에 순응하며 살며, 사회에서는 실종된 그를 민법 제30조에 의해 끝내 사망으로 처리하고 만다.
본격적으로 모래의 여자를 들어다보자. 이 작품에서 정말 뛰어난 점 중 하나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모래의 느낌을 정말 잘 표현하고 묘사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영화보다도 더 모래에 묻혀있다는 느낌, 모래에 온몸이 버무려져 있는 느낌이 더욱 생생하다.
“쌓인 모래가 얼굴, 가슴, 머리에서 주르륵 떨어진다. 입술과 코 언저리에는 땀에 엉긴 모래가 들러붙어 있다. 손등으로 비벼 떨어내면서, 조심조심 눈을 깜박거린다. 화끈화끈, 까끌까끌한 눈두덩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그러나 눈곱에 엉겨붙은 모래를 씻어내기에 눈물만으로는 부족했다.” (47쪽)
“입술과 이 사이에 고여 있는 모래가 그 타액을 빨아들여 입안 가득 퍼진다. 봉당에다 침을 뱉었다. 하지만 아무리 침을 뱉어도 입안의 까끌거림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뱉어낼 침이 없는데도 모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치 이 사이에서 새 모래가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48쪽)
“고인 침을 삼키려다 목구멍이 거부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목구멍의 점막은 모래의 맛과 냄새에 유난히 민감한지 시간이 그만큼 흘렀는데도 잘 적응해 주지 않는다. 침은 거품투성이 갈색 덩어리가 되어 입술 끝으로 비어져 나왔다. 침을 뱉자 까끌거리는 모래의 감촉이 더욱 심하게 느껴진다. 모래를 뱉어내려고 혀끝으로 입술 뒤를 구석구석 핥으면서 침을 내뱉는데, 끝이 없다. 끝내는 입속이 바짝 마르고 염증이라도 생긴 것처럼 따끔거렸다.” (55~56쪽)
마치 내가 직접 사막에 가서 사구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묘사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을 사구로 끌어들인다. 준페이처럼 너희들도 지금 사구에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독자들을 사구로 끌어들이는 것일까? 모래가 무엇이기에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들을 모래로 뒤덮어버리고자 하는 것일까?
모래는 쉬지 않고 모든 것을 썩게 만들고 파괴한다. “모래는 절대로 쉬지 않는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표를 덮고 멸망시킨다.”(19쪽), “「그런데도 썩는다니까요…… 모래에 묻힌 채로 그냥 놔두면, 금방 산 신발도 반 달도 채 못가, 녹아버린다고 할 정도니까요」” (31쪽). 심지어 모래는 인간의 삶의 터전인 집조차도 무너뜨릴려고 한다. “「집이 무너지면 어쩌라고요…… 모래는, 어디서건 흘러내리는데……」” (42쪽), 모래는 쉬지 않으며 모든 것을 파괴한다. 형태가 있는 거라도 그 형태를 모래는 파괴한다. “모래 쪽에서 생각하면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하다. 확실한 것은 오로지 모든 형태를 부정하는 모래의 유동뿐이다.” (46쪽). 그리고 이러한 모래의 파괴성을 우리는 거스르지 못한다. “어차피 모래의 법칙을 거스를 수도 없을 텐데” (22쪽)
그렇기에 이러한 모래에 맞서 여자는 매일 묵묵히 모래를 퍼다 나르며 자신의 집을, 일상을 지킨다. 반면, 난데없이 감금당한 준페이는 이러한 노동에 끊임없이 저항하지만 한번은 목마름을 이기지 못하고, 한번은 사구를 벗어났지만 사막 자체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노동에 순응하게 된다. 그도 결국엔 모래를 걷어내는 노동을 하며 그의 일상을 살아간다.
사구에는 예전부터 살아가는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인 것일까? 그녀의 모습을 보면 모래의 여자가 쓰여진 1950~60년대의 일본 여자의 모습이 투영된다. “「하지만, 정말, 여자 혼자의 몸으로는 힘들어요, 이곳 생활……」” (62쪽), “내가 식사를 끝내자 여자는 개수대로 돌아가서, 머리에 비닐을 덮어쓰고 조용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66쪽). 여자는 남자에 의존적이고 순종적이다. 그리고 무력하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준페이가 사구에 감금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그저 무기력하게 그리고 순종적으로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준페이가 사구를 탈출하려고 하다가 모래에 파묻혀 한동안 앓았을 때, 그녀는 그를 군말 없이 정성껏 돌본다. 그리고 준페이가 그녀를 포박하고 포로로 삼아도 그녀는 그에 순종할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지는 않는다. 준페이가 자신의 집을 뜯어 사다리를 만들려고 하자 그녀는 그를 필사적으로 막는다. 즉 여자는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것이든 순종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것에만 순종한다는 것이다. 바다 구경을 위해 잠시만이라도 사구에서의 자유를 요구하던 준페이에게 노인이 모든 마을 사람들 앞에서 여자와의 성관계를 보여주면 그러하겠다는 협상을 제안하자 준페이는 여자를 범하려고 하지만 여자는 끝까지 저항한다. 여자는 단지 ‘가정’을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다. 즉 여자에게도 자아가 있으며 이는 ‘가정’을 위해서 한해서만 자아를 희생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준페이는 결국 굴복했지만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집도 절도 없는 부랑자가 아니라고…… 세금도 내고, 주민등록증도 있고…… 수색이 시작되면, 보기 좋게 당할 테니까!」” (63쪽). 사회구성원으로서 준페이 자신은 필요한 존재이며, 사회가 호락호락하게 자신이 희생당하지 않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 믿음은 금방 깨지고 만다.“「글쎄, 벌써 열흘이나 지났는데도, 파출소에서 조사를 하러 나오지도 않았고……」”, “「열흘이 지났는데도 아무 일 없다는 것은, 역시, 글쎄 어찌된 걸까……」” (144쪽). 작가는 마지막 장이 끝난 다음에 ‘실종 신고 최고장’과 ‘판결’을 실으면서 결국 사회는 준페이를 사망으로 처리했음을 보여주고 작품을 끝낸다. 그는 결국 사회에서 버려졌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이제 완전히 모래의 부락에 일원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강제로 모래 노동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거부했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모래 퍼내는 것쯤, 훈련만 받으면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난 좀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인간에게는 자기가 갖고 있는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의무가 있단 말이야……」” (147쪽). 모래 노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의 의무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모래 노동은 자아실현을 할 수 없는 그저 단순 노동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원래 그가 하고 있던 노동인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그의 자아실현의 노동이었을까? 아니었다. 그가 곤충 채집에 그렇게 열을 가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결국 그의 일은 자아실현의 차원에서 본다면 즉, 인간으로써의 의무로 본다면 사구에 갇히기 전이나 후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애써 부정하며 어떻게든 사구를 벗어나 자아실현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에 보여줄 구절이 이를 잘 보여준다. “<노동을 극복하는 길은 노동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노동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 노동을 극복하는…… 그 자기 부정의 에너지야말로 진정한 노동의 가치입니다.>” (153쪽). 그리고 이는 결국 까마귀 덫을 놓으면서 이루어진다. 여전히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보이던 준페이는 까마귀를 잡을 계획을 한다. 까마귀를 잡아 발에다가 구조 쪽지를 묶어놓고 그 까마귀를 다른 마을로 보낸다면 자신의 이 사구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준페이 자신도 이를 읽는 독자들도 까마귀를 통해서 구원받지 못할 것을 안다. 그리고 이 까마귀 덫은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된다. 까마귀 덫은 넣으면서 준페이는 덫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모래에서 수분을 얻는 유수장치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사구에 들어오기 전, 곤충 채집과 같은 새로운 노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에 몰입하게 되고, 결국 탈출 기회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수장치에 몰입하느라 탈출 계획을 미루게 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 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하다.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 오늘이 아니면, 아마 내일, 남자는 누군가를 붙들고 털어놓고 있을 것이다.”,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227쪽)
작가는 결국 사구에 던져져 있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이다. 즉 사구에 갇혀 그저 모래를 걷어내면서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삶을 통해 1950~60년대 살아가던 일본인들의 부조리 더 나아가 인간의 부조리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핵심은 모래이며 앞서 살펴본 내용 말고 추가적으로 모래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중간에 준페이와 동료 선생이 모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 있다.
“「어떻습니까? ……나는 인생에 기댈 언덕이 있다고 하는 교육 방법이, 도무지 미덥지가 않은데…… 」”
“「뭡니까, 그 기댈 언덕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없는 것을 말입니다,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환상 교육이죠…… 그래서, 모래가 고체면서도 유체역학적인 성질을 다분히 갖고 있다는 점에 아주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리얼리즘 교육을 하라, 이런 말입니까?」”
“「아니, 내가 모래를 예로 든 것은……결국 세계는 모래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모래는 정지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그 본질을 파악할 수가 없으니까…… 모래가 유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유동 자체가 모래라는…… 그러니까, 뭐라고 잘 말은 못하겠지만……」”
“「알 것 같습니다. 실용 교육에는 어쩔 수 없이 상대주의적 요소가 파고들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모래가 되는…… 모래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한번 죽으면, 더 이상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우왕좌왕할 필요도 없어지니까……」”
“「하지만 나는 학생도 모래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니까요……」”
“「이상주의자로군요. 선생님, 거 혹시 학생들을 무서워하는 것 아닙니까?」”
(96~97쪽)
모래는 세계 그 자체이다. 즉 우리의 삶 그 자체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 모래는 우리 그 자체 이다.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는 존재. 기댈 곳 없이 우리는 서로가, 그리고 세계가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모래에 계속해서 침식하기도 하고 썩어가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하고 죽어가기도 한다. 우리의 실존이 모래에, 사구에 던져져 있으면서, 동시의 우리의 실존은 모래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마지막 부분에서 편도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편도표란 어제와 오늘이, 오늘과 내일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맥락 없는 생활을 뜻한다. 그렇게 상처투성이 편도표를 손에 쥐고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왕복표를 거머쥘 수 있는 사람에 한한다.” (156쪽), “왕복표가 절대로 통용되지 않는 모래의 노래를, 다소 음정이 틀려도 상관없으니까 들려주었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175쪽). 모래에 뒤덮어 사는 삶은 편도표만이 있는 삶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래에서 벗어나 왕복표의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던 마지막 문단을 생각해보면 이는 헛된 생각임을 알 수 있다. 준페이는 왕복표를 가지고 있음을 믿지만 왕복표를 이용하지 않는다. 사실 그도 알고 있다. 왕복표의 삶은 없다는 것, 그가 가지고 있다고 믿는 그 왕복표가 사실은 편도표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사구에 던져진 삶을 살고 있다. 더 나아가 작가는 사실 우리 자체가 모래이며, 세계 또한 모래라고 말하고 있다. 단순하게 바라보자면 우리는 사구에 던져져 모래에 갇힌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더 정확하게 바라보자면 결국 우리 그리고 세계 또한 모래임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1950~60년대의 일본인의 삶이 모래로 보였던 것이며, 이러한 모래의 삶이 단순히 일본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해당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베 코보는 이에 더해 이를 서술하고 있는 작가 또한 마찬가지임을 말한다.
“자기가 어떤 인간인가를 자각하게 하는 것만 해도 훌륭한 창조가 아닙니까?”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은, 즉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쪽이 되고 싶다는, 자기를 꼭두각시와 구별하고 싶은 에고이즘에 지나지 않죠.”
“작가와 쓰는 것 자체는 어느 정도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그렇죠? 그래서 저는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겁니다. 작가가 될 수 없다면, 딱히 쓸 필요도 없고요!”
“……그건 그렇고, 심부름값을 제대로 못 받은 아이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109~110쪽)
작가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자신의 작품과 분리하려고 해도 결국 분리될 수 없다. 즉 모래의 여자의 작가인 아베 코보 또한 자신도 모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래의 작가가 모래의 작품을 발표하고 모래의 세계에 사는 모래의 인간이 모든 것이 모래임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모래의 묘사가 그토록 생생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토록 까끌까끌하고 모든 수분을 빨아들이며 모든 것을 건조하게 만들고 파괴하는 모래를 독자에게 계속해서 느끼게 하는 이유를 말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우리에게 모래의 까끌까끌함을 남기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모래에 뒤덮어있는 자신을, 사구 속에 갇혀버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 dc official App
난 왜 노잼이았을까..
카프카-카뮈-사르트르 실존주의 루트 탄 후에 보면 개꿀잼임 ㅋㅋㅋㅋㅋ - dc App
난 개인작으로 변신보단 모래의 여자가 더 낫던데. 모래의 여자 읽으면서 모더니즘이나 실존주의에 대해 느끼진 못했는데 주인공이 처음 마을에 갖히면서 반항하다가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여인에게 화를 풀다가 서서히 마을과 동화되어가는게 좀 소름 끼쳤다. 거기에 소설 전반에 깔린 야릇함과 모래와 모래로 둘러쌓인 마을의 답답함과 편집증이 느껴질만한 묘사가 인상적이었음
처음 읽었을땐 노잼이었는데, 윗댓처럼 다른 작가 책들을 읽어보면 좀 재밌으려나
잘봤읍니다 근데 실존에 대해서 좀만더 분석해줬으면 더조을듯..;ㅅ;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