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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주 오래전 일이다
자존심이 무척이나 세었던 나는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꺼내지않았다

20살의 겨울 문턱에 들어섰을 때, 나는 내 주머니사정을 생각해서 아르바이트를 하지않을 수가 없었다
내 주머니 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주머니는 커녕 손아귀에도 쥔 게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이후 일년 내도록 나는 물에 손이 마를 날 없이 일을 했었다
정말로, 물이 마를 새가 없어 피부병이 걸리기도 했었다
물이 닿으면 피부에 물집처럼 혹은 빨간 반점처럼 오도도도 돋아나 곧 손 뿐만이 아니라 몸에도 번지기 시작해 호프집아르바이트라던가 카페아르바이트를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첫 과외를 시작했을 때 번번히 나는 다른 경쟁자들에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내 자격지심이겠지만,
우리 학교보다 상위권인 학교의 학생들, 그리고 내 후줄근한 옷차림이 문제였지 않을까- 대강의 짐작이다

나는 독하고 악바리같았다
우리 집이 싫어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내 허리께 쯤 잠긴 늪은 이상하게도 발버둥을 칠 수록 더욱이 나를 삼켜만왔다
마치 나는 여길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인 냥
나는 태생이 이런 사람인 냥
나는 그래서 더 독했고 더 악바리 같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이야길 들으면 변명이라고 하겠지
근데, 난 남들만큼 가지려면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남들이 기본적으로 가진 하나라도 주워먹으려면 그래야 했다

과외가 떨어지는게 익숙해 질 때 쯤, 한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단지 외모를 말하는 거라면 보통의 인상좋고 늘씬한 30대 중반의 여자
그녀는 아름다웠다
언젠가 내가 읽었던 그리스로마신화의 아프로디테는 장미를 떠올리게하는 아름다움이지만
그녀는 장미의 향을 지닌 백합과 같았다

초등학생의 아들과 함께 내가 문에 들어서자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선생님께 인사는 항상 이렇게 해야해, 알았지 우리아들?"

그 때 나에겐 '우리' 아들이라는 말이 참 낯설어 그 집의 냄새와 분위기, 어둑해질 무렵의 시간까지 나에겐 스냅사진처럼 남아있다

' 하루에 두시간 반을 중학교 영어와 수학, 일주일 세번, 그렇게 60만원.
숙제를 내주었는데 안해왔다면 이유를 들어보고 타당하다면 이해해주시고 아니라면 훈계를, 숙제를 해오지않았다면 다음시간까지 오늘의 숙제까지 다 해오게만들어주시고, 누나처럼 이모처럼 내 미래의 아이라 생각하고 가르쳐주세요.'
가 그녀가 한 말의 전부였다
매를 들어도 된다는 말을 하시고 언제부터 할 수있는지 나에게 물었다

나의 이야긴 아무것도 듣지않고 당장 수업날을 잡자니 나에겐 안좋을리가...

그렇게 내 첫과외는 쌉싸름한 겨울과 함께 시작되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과 마치고나서는 그녀와 아이는 꼭 현관문앞까지 나와
나에게 허리를 숙여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였고 수업중간에 항상 맛있는 간식들을 내주었다
내가 보지도 먹지도 못할 비싼 과자들을 보면서 운이 참 좋다 생각했다

그녀의 아들은 그녀와 같아 바르고 똑똑하고 아이지만 어른같았다
조등학교 6학년이지만 스스로 공부를 하고싶어 과외를 시켜달라고했고,
숙제를 빠트린 적도, 게을리 한 적도 없었다
말을 할 땐 한 박자 쉬고 생각을 했고 질문에 대한 답의 끝은 '고맙습니다'였다

날은 추워져갔고 얇은 내 옷사이로 바람은 살을 부벼댔었다

그녀의 막내 딸을 보며 부러웠었다
과외를 하려 들어설 때면
엄청나게 넓은 그 집에서 동화속의 공주님처럼 항상 예쁜 옷을 입고 눈물 한방울 흘려 본 적없는 눈을 하고 날 올려다보았다
"오빠 션샌닌와떠"
아직 어린 그 아이는 나 처럼 독하게 악바리처럼 살지않아도 되겠지
누구를 미워하거나 부러워한다는 감정을 가져보지도 않겠지
나는 고작 4-5살 먹은 아이에게 슬며시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는, 그런 못난 사람이였다

두번째 월급을 받을 때, 오늘은 내가 배웅할 테니 너는 인사만 하고 들어가라며 아들을 보내더니 나에게 그녀가 쇼핑백을 건네었다
꽤 크고 무거운 쇼핑백이였다
"집에 가서 풀어보세요. 고생하셨어요, 조심해서 가세요"라고 하얗게 웃었다

집에가서 풀어보니 코트와 패딩, 두꺼운 니트 몇벌과 셔츠, 기모바지였다.

그녀가 나에게 왜 이런 선물을 줬는지 너무나 잘 알고있다.
나는 옷이 없었다
다른 계절에 비해 더 비싼 겨울 옷을 살 사치를 부릴 여유조차 없었다

아래는 하늘색의 쪽지가 있었다
<부담가지지말고 꼭 받아주셨으면해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구구절절 설명이라도 했다면 내가 더 비참했을까, 혹은 이 정도의 쪽지가 나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을까
내가 아는 그녀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생각해 겨우 이 쪽지를 썼을것이다
나는 비린내가나는 그 겨울에 따뜻함을 코에 대어보았다

그 옷을 입고 간 첫 날, 그녀의 환한 웃음이 보였다
"너무 이뻐요."
잘 어울린다느니, 잘 고른거 같다느니 그녀가 선물을 했다고 파악할 만한 언질은 단 한마디도 하지않았다
그녀는 종종 그렇게 나에게 자그만 선물을 주었다
어느 땐 연예인 누가 발랐다던 립스틱, 요즘 20대들에게 유행한다는 아이섀도, 겨울이니 얼굴관리 잘해야한다며 기초제품을 선물하기도했고, 부르터 버짐이 핀 것 같은 내 손은 또 언제봤는지 핸드크림을, 목도리를, 향수를 주기도하였다
그에 대한 변명은
"아아...제 사촌동생선물사러갔다가 어울릴거 같아 사봤는데..."였다
그녀의 사촌동생이 참 부러워짐과 동시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어느 날이였다
비가 엄청나게 왔었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과외가 늦어져 조금은 늦은 밤.

그녀는 나에게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옷을 차려입었다
한사코 거절하는 날보며
"요새 험한 일 많이 일어나요. 데려다줘야 내가 맘이 편할 거 같아서 그래요"라며 날 따라나섰다

나에게는 그 날 처음으로 외제차를 타본 날이였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그 날을 기억하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차는 그녀의 고고함만큼 멋있었다
이런 여자라면 이런 차를 탈거라는 위엄과 우아함, 멋있음까지 전부가 그녀의 것이였다
그녀의 모든것은 그렇게 다 멋있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그녀의 으리으리하다못해 숨바꼭질을 하면 하루내에 찾을 수 없을것만 같은그 집에서 나는
숨을 수 조차도 없는 우리 집으로 향하고있었다

"나도 이 학교를 나왔어요. 아 캠퍼스는 다르다. 난 미술을 전공했거든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그녀는 생각보다 호탕했고 재잘거리는 소녀같았다
소녀같아야할 나이의 나보다 더 소녀같았다
그녀는 하이얀 종이를 떠올리게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이렇게 될까-싶을 정도로.
나같은 사람이랑 접촉을 한다는 게 폐가 될까 두려웠다

그녀는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연히 모르겠지만,
우리 애가 선생님 말은 잘 듣냐, 선생님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은 쓰냐,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지는 않냐는 말이 이어졌다
첫 과외라 몰랐는데, 지금은 그녀가 매우 독특한 엄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부모는 -우리 아이가 공부는 잘 따라가나요, 숙제는 잘 해오나요, 단어는 잘 외우나요, 또래에 비해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요-의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또 다른 학원이나 과외를 시키기 마련이였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거죠. 선생님은 돕는거고. 사람이 되는 걸 가르쳐주면 공부의 이유를 찾겠죠.'가 그녀의 답이였다

갑을로 따지자면 그녀가 갑이고 나는 을, 사회적지위로 따져도 그녀는 갑 나는 어쩌면 을이아닌 정 혹은 그보다 아래일텐데 그 아름다운 그녀는 나를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선생님으로 생각을 했다
그래, 정말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도착하지 않았으면 하는 우리집에 도착을 했고 그녀는 내가 집을 들어가는 걸 보고나서야 차를 몰았다

언젠가 그녀의 남편을 보았다
그녀의 남편은 내가 과외를 조금 늦게 갈 때마다 그 넓은 거실 바닥을 신데렐라노래를 부르며 걸레로 닦고있었고,
런닝을 입고 쓰레기봉투를 들고있었고, 공주님과 함께 바비인형을 들고 인형놀이를 하고, 공주님의 화장상대가 되고있었다

그런 그녀의 남편을 보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나에게 인사를 하러 나왔었다
그녀의 남편또한 알 수 없이 그녀의 묘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난 그녀를 부러워했는지, 그녀의 남편을 부러워했는지, 혹은 그 가정을 부러워했는지, 그 모든것이 부러웠는지 아직도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부러웠단거다.

어느 늦은 밤, 그녀와 아들 과외얘길 하다가 -어느 때 처럼 아이가 사춘기가 왔는데 짜증은 안내는지 따위를 물어보고있었다- 말하는 그녀를 지켜보다 내가 "부러워요."라고 얼떨결에 내뱉어버렸다.
그녀는 살짝 당황했고 나는 수습을 할 방도를 못찾아 나 또한 당황했을 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젊은 과외쌤이 더 부러워요. 나도 그 때로 돌아가면 좋겠다."
"저는 가진게 나이어린거 밖이지만 사모님은 다 가지셨잖아요."
나의 비뚤어짐으로 그녀에게 내뱉은 것일까
하지만 그녀는 활짝 웃더니
"부정은 못하겠네요. 걱정도 없고 남부러울 것도 없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녀가 인정을 하면 역겨울 거 같았다 어쩌면 나는 샘이 났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듣자 나는 안심이 되었다. 행복하시구나. 역시 아름다우시구나.
그녀 또한 의외였다. 겸손하고 아니라고 손사래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인정했다
이런건 속물적인걸까, 솔직한걸까, 이런게 오히려 겸손한 것일까.
어쨌든간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 모습조차 아름답다

"그리고 사모님 아름다우세요."
그녀는 제일 밝은 모습으로 웃었고
"선생님도, 참 아름다워요."

나는 이 날을 잊지 못한다.
아름다운 그녀는 나에게 아름답다 말했고, 오물이 덕지덕지묻어 씻기지도 않을 내 못남이 성수로 목욕을 한 사제같았다-라고 내 일기장에 썼다

그 꿀과외를 그만두었던 건 내가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한 후였다
'우리 아들'은 반장과 전교부회장 전교1등을 도맡아하는 수재였고, 공주님은 앞니가 빠져 혀짧은 소리대신 바람새는 소리나는 무렵이였다.

선생이 되겠다라, 그냥 끌렸다
그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서 이렇게, 저렇게라도 흉내를 내면 좋은 선생님이 되지않을까-.란 생각이였던거 같다
왜 '선생님'이 되고싶은지 사실 그 이유도 잘 몰랐다
그녀는 항상 나에게 사람대접을 해주었다
여기저기서 날 지칭하던 '이 년' '저 년' '독한 년' '주제도 모르는 년'이 아니라 '사람'으로 오롯이 나를 대했다
그 타이틀에서 벗어나기 싫어서 선생이 되기로 결심을 했나, 아닌가.

한달 뒤면 그만두어야겠다는 말을 어렵게 전하니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한달이나 남았으니까 그때까지만 잘 부탁드려요."

마지막 날에 그녀는 "정이 들어서 눈물이 나오네요."라며 눈물을 한움큼 머금고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불면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불면증에 효과적이라는 차들과 과외할 때 내가 잘 먹던 과자들 등등 그녀는 끝까지 멋있었다

온 가족이 나와 나를 배웅해주었다
짧고도 긴 시간이였지만 그 집의 일원이 된거 같은 주제넘은 생각과
그 넓은 집의 들락거릴 수 있다는 특권의식,
나를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아름다운 그녀를 보며 대단한 작위를 수여받은듯한 느낌,
과외를 시작하기 전의 나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였다
그 모든것은 비뚤어짐과 잘난 척이아닌 책임감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20여년간 짐승이였다
사람으로 사는 방법을 알고싶지도, 필요도 없었다
당장 나에겐 중요한게 아니였으니
나는 당장 먹고 살 일이 중요했었다
그래서 독했고 악을 써서 용을써서 여기까지 버텨왔었다

그녀는 그녀의 집에서 20여년간 결핍된 채로 살아온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녀의 아들은 나에게 가르침을 받았지만,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더한 가르침을 받았다
가르칠려고 한 건 아니였겠지만, 그녀를 보며 아름다움이란게 무엇인지, 사람이란게 무엇인지를 알게해주었다
나는 평생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하루살이라 생각을 했다
늪조차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가 모여 일년이, 십년이, 백년이 되니 결코 모지리라 날 욕하지않았고,
내가 벗어날 수 없던 늪조차도 꽃밭으로 바꿔놓았다

우리집 사정은 달라졌지않다
그런데 나는 달라졌다

멋있는 자살을 생각하며 돈을 모으던 나는
멋있는 미래를 생각하며 돈을 모으게되었다

돈을 생각하며 일을하던 나는
꿈을 생각하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모든것들을 나도 못했는데
날 아름답게 보던 그녀는 해냈다

이 글을 쓰는 건 그녀를 찾고싶어서가 아니다
혹시나 그녀가, 이제는 성인이 되었을 그녀의 아들이 이 글을 본다면, 꼭 알았으면 한다
그 때의 못난 그 20살의 학생은 아름다운 그녀때문에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태어났다고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의 제 2의 엄마이다. 다 죽어가던 나의 인생에 숨을 불어준 사람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호의를 베풀었지만 그조차 받지 못했던 나에겐 세상의 전부였고, 새로 시작할 힘이였다고 고마웠다 말하고싶다
내 직업에 대해 고민이 들 때마다 아름다운 그녀라면 어떨까-라고 생각을 하곤 한다
내 인생의 롤모델이 된 그녀에게 평생의 감사인사를 전한다

나에게 그녀는 아름다웠고, 아름다움은 곧 그녀였다
무얼하든 멋있었던 그녀는 40대 중후반을 달려가고 젊은 날을 부러워하겠지만,
그녀는 내가 본 사람 중 최고로 젊은, 멋있는, 아름다운 사람의 표본이다.


출처 한양대 대나무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