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작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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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 제1부 - 




옷을 갈아입자 스테판 아르카디이치는 몸에 향수를 뿌리고 셔츠의 소매 끝을 당겨 바로잡고 나서 익숙한 동작으로 여러 호주머니 속에 담배와 지갑, 성냥, 겹사슬과 조그만 장식품들이 달린 회중시계 등등을 나누어 넣고 손수건을 한번 털더니, 불행한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쾌하고 향긋하고 건강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활기찬 자신을 느끼면서 가볍게 뛰어오르는 듯한 걸음으로 식당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관청에서 보내온 서류와 편지들이 커피와 함께 나란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쾌한 익살을 좋아하는 스테판 아르카디이치는 이따금 기왕 선조를 자랑하고 싶다면 류리크에서 얼버무려 정작 인류 최초의 시조인 원숭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며 점잖은 사람들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 즐거웠다. 결국 자유주의적 경향은 스테판 아르카디이치의 습성이 되었고, 자신의 뇌리에 엷은 안개를 피어오르게 한다는 이유에서 그는 식후의 담배와 마찬가지로 이 신문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신문을 다 읽고 나서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고 버터 바른 빵을 먹고난 다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끼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털어버리고 널따란 가슴을 쭉 펴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이렇다 할 유쾌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소화가 잘 되었다는 생리적 쾌감으로 유발된 미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즐거운 미소는 곧바로 그에게 모든 것을 다시금 생각나게 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마차 준비가 다 됐습니다." 마트베이가 와서 말했다. "그런데 여자 진정인 한 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덧붙였다.

"오래 기다렸나?" 스테판 아르카디이치가 물었다. 

"반시간쯤 됐습니다."

"사람이 찾아오면 바로 알리라고 그렇게 귀 아프게 일렀잖아!"

"그렇지만 커피라도 드신 뒤라야 하지 않나 생각했습죠." 마트베이는 도저히 화를 낼 수 없게 만드는 친근하고 격의 없는 말투로 얘기했다. 

"그럼 빨리 이리 들어오시게 해." 오블론스키는 홧김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순 그녀는 생기와 건강으로 빛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렇다, 이이는 행복을 느끼고 만족해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지? ...' 그녀는 생각했다. '게다가 이 진저리 나는 온화함은 또 뭐람? 세상 사람들은 이이의 온화함을 좋아하고 칭찬하기도 하지만 난 그저 징그러울 뿐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입술은 오므라지고, 신경질적인 창백한 얼굴의 오른쪽 뺨에 바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로 하여금 직장에서 이같은 일반적 존경을 얻게 한 주된 특질은 첫째로 그가 자기의 결함을 의식하고 있는 데에서 비롯된 타인에 대한 극도의 관용이었고, 둘째로 그의 자유주의, 말하자면 신문을 읽고 터득한 것이 아니라 그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온전한 자유주의였다. 그는 상대방의 재산과 신분의 귀천 여하를 막론하고 어떤 사람에게나 평등과 공평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는 - 이것이 가장 중요하였지만 - 그가 종사하고 있는 직무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이었다. 그 결과로서 그는 결코 열중하거나 과실을 범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집안이 좋고 남 못잖은 재산도 있고 나이는 서른둘인 그가 쉬체르바쓰카야 공작영애에게 구혼하는 것보다 더 손쉬운 일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여겨졌을지도 모르고, 또 어느 모로 보나 그는 훌륭한 배필로 인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빈은 한창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키티는 어디 하나 티끌만한 흠도 없이 완전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존재로 여겨졌고, 그에 반해 자신은 그녀의 남편으로 나무랄 데가 없다고 주위 사람들이나 그녀 당사자에게 인정받으리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을 만큼 지상에서 가장 저열한 존재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는 그저 (남의 눈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시골에서 혼자 두 달을 지내고서야 그는 그것이 청춘기가 시작될 때 경험했던 것과 같은 풋사랑이 아니라는 것, 즉 그 감정이 그에게 한순간의 안정도 주지 않는다는 것, 자기는 그녀가 그의 처가 될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지 않고는 한시도 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자기의 절망은 단지 상상에 불과하며 자기가 거절당하리라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번에야말로 구혼해야겠다, 그래서 만약 승낙을 얻게 되면 바로 결혼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품고 모스크바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절당하면 자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나를 제발 이대로 내버려두시기 바랍니다. 이것 하나만이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바라는 나의 유일한 소망이올시다. 


니콜라이 레빈


레빈은 다 읽고 나서, 고개를 들지 않고 편지를 손에 쥔 채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지금 이 불행한 형에 대해선 얼마 동안 잊었으면 하는 바람과, 그것은 옳지 않은 짓이라는 의식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이것만은 알고 있다" 하고 그는 덧붙였다. "바로 겸손의 교훈 말이다. 난 동생인 니콜라이가 지금과 같은 자가 된 뒤로는 비천한 자들에 대해서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보다 관대한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자가 한 짓을 너도 알고 있을 게다..."




활짝 갠 쌀쌀한 날이었다. 




레빈에게는 이러한 군중 속에서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쐐기풀 속에서 장미를 찾아내는 것처럼 손쉬웠다. 모든 것이 그녀로 인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온갖 것을 환하게 밝히는 미소와 같았다. '과연 나는 얼음 위를 지나 저기까지, 그녀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가 있는 곳이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지처럼 여겨졌다. 순간 그는 이대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만큼 그는 두려웠다. 때문에 그녀의 주위로 온갖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이상 자신도 그리로 얼음을 지치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까지 상당히 애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마치 그녀가 태양이라도 되는 듯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을 피하면서 얼음판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레빈은 그녀를 앞에 두고서도 이처럼 용감하고 무심할 수 있는 자신에게 놀라는 한편, 비록 그녀가 있는 쪽을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한시도 그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는 태양이 자기 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구석에 있던 그녀는 그때, 목이 긴 스케이트를 신은 가느다란 두 다리를 조심스럽게 딛고 잔뜩 겁을 먹은 모습으로 그가 있는 쪽으로 미끄러져왔다. 




그녀의 스케이트 솜씨는 그다지 야무지지 않았다. 그녀는 끈으로 매어 늘어뜨린 조그마한 머프에서 손을 빼고 넘어질까 두려운 듯 팔을 뻗었다가, 그를 쳐다보고 레빈이란 걸 알자 그를 향해 자기의 두려움을 변명하듯 생긋 웃어 보였다. 구석을 돌아오자 그녀는 탄력 있게 한쪽 발로 얼음을 밀면서 곧장 쉬체르바쓰키 쪽으로 미끄러져왔다. 그러고는 사촌오빠의 손에 매달려 방긋 웃으면서 레빈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 가운데서도 언제나 그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녀의 유순하고 잠잠하고 진심이 깃든 눈빛과 그 미소였다. 그 미소는 언제나 레빈을 마술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어렸을 적에도 흔히 느껴보지 못했던 부드럽고 감동적인 느낌을 그에게 선사했다. 




"당신은 무슨 일이나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요." 그녀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레빈은 얼굴에 저절로 떠오르는 행복한 미소를 간신히 억누르면서 대답했다. '그렇다.' 그는 생각했다. '이게 바로 인생이다. 이게 바로 행복이다! 함께라고 그녀는 말했다. 함께 타요,라고. 지금 얘기해버리면 어떨까? 그러나 난 지금 정말 행복하니까, 희망만으로도 행복하니까, 어쩐지 얘기하기가 두렵다... 그런데 만일?... 아니, 그러나 얘기해야 한다, 해야 해. 약한 마음은 쫓아버려야 한다!'




태양이 먹구름 뒤로 숨어버리는 것처럼 갑자기 그녀의 얼굴빛은 상냥함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리고 레빈은 그녀의 얼굴에서 뭔가 의식적으로 참는 듯한 낯익은 표정을, 그 매끈한 이마에 주름이 도드라지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틀니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옛 친구처럼 그를 맞았다.

"그래요. 모두 이렇게 변해요."




레빈은 다시 키티에게 달려갔을 때 그녀의 얼굴에서 딱딱한 빛은 벌써 사라지고 두 눈동자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진지하고 상냥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레빈은 그녀의 그 상냥함 속에서 어딘지 심상치 않은, 짐짓 안정을 가장한 듯한 태도를 엿보았다. 그는 서글퍼졌다. 




"어찌 모르세요?"

"모르겠습니다. 실은 당신에게 달렸으니까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이내 자기가 한 말에 경악했다.

그의 말을 듣지 않았는지 아니면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지, 하여튼 그녀는 두어 번 발을 투덕투덕 구르고는 얼른 옆으로 미끄러져나갔다. 그녀는 마드무아젤 리농에게로 미끄러져가서는 뭐라고 두서너 마디 얘기하고 부인들이 구두를 갈아신는 오두막집 쪽으로 가버렸다. 




레빈은 기도하면서, 동시에 강렬한 운동의 욕구를 느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안팎으로 원을 그리며 돌아다녔다. 




'좋은 분이야, 정다운 분이야.' 키티는 이때 마드무아젤 리농과 함께 오두막을 나오면서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대하듯 정답고 조용한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정말 잘못한 걸까. 내가 뭔가 나쁜 짓을 한 걸까? 사람들은 내가 교태를 부린다고 하겠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저분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난 저분하고 같이 있는 게 즐겁다. 저분은 저렇게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저분은 왜 그런 얘길 했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당신도 오세요. 기다리겠어요." 공작부인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 무뚝뚝한 태도가 키티를 발끈하게 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냉담을 보상해야겠다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저녁에 봐요."




"갈까, 가지." 방금 들었던 '그럼, 저녁에 봐요' 하는 목소리의 울림과 그 말을 할 때의 그녀의 웃는 얼굴을 되새기며 행복에 젖은 레빈이 대답했다. 




길을 가는 동안 두 친구는 말이 없었다. 레빈은 키티의 얼굴에 나타났던 표정의 변화가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면서 때로는 희망이 있다고 스스로 믿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에 빠져 자기의 희망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녀의 미소와 '그럼, 저녁에 봐요' 라고 했던 말을 보고 듣기 전의 자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스테판 아르카디이치는 도중에 만찬의 메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온 마음은 키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고 그의 두 눈은 승리와 행복의 미소로 빛났다. 




그는 레빈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레빈은 즐겁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왠지 답답했다. 그는 마음속에 있는 일 때문에 이런 식당에서 여자들을 거느린 패거리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별실 사이에 끼어 이같은 혼잡과 소요 속에 있기가 어색하고 갑갑했던 것이다. 청동 기물, 거울, 가스등, 타타르인, 그러한 것들이 모두 그의 속을 쑤셨다. 지금 그의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감정을 더럽히게 될까봐 그는 두려웠다. 




쉬체르바쓰키 가족은 항상 자네 얘길 묻는단 말야. 마치 내가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 것처럼.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저 자네는 언제나 아무도 하지 않는 짓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뿐이거든."




레빈은 얼굴의 모든 근육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보나?"




지금 레빈에게는 세상의 모든 처녀가 명백히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한 부류에는 키티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처녀들이 속해 있고,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온갖 약점을 지닌, 말하자면 아주 범상한 처녀들이었다. 그리고 또다른 부류는 약점이라곤 전혀 없는, 모든 인간성을 초월한 오직 그녀 한 사람뿐인 것이다. 




나는 여러모로 자신과 싸운 결과, 그녀 없이는 내 삶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래서 어떻게든 결말짓지 않으면 안 되겠어서..."

"그런데 어째서 도망친 건가?"

"아아, 잠깐만!




"미안한 얘기지만 난 뭐가 뭔지 도대체 모르겠어." 레빈은 우울하게 얼굴을 흐리면서 말했다. 




이제야 그는 스테판 아르카디이치와 이 얘기를 시작한 것을 마음속 깊이 후회했다. 그의 특별한 감정은 페테르부르크의 한 사관과의 경쟁 운운하는 얘기와, 스테판 아르카디이치의 지레짐작과 충고에 의해 무참히 더럽혀지고 말았다. 

스테판 아르카디이치는 미소를 띠었다. 그는 레빈의 마음속에 일어난 생각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했다. 




"오오, 도덕군자여! 그러나 자네도 잘 좀 생각해봐. 알겠나? 여기 두 여자가 있다고 하고, 그중 한 사람은 그저 자기의 권리만 주장한단 말야. 그 권리라는 게 자네의 사랑인데, 그건 자네가 도저히 그녀에게 줄 수 없는 것이란 말야. 그러나 또 한 여자는 모든 것을 자네에게 바치고 무엇 하나 바라지 않아, 자아, 자네는 어떻게 해야 하겠나?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 말이야. 이게 바로 무서운 비극인 거야."




"자네는 정말 순수한 인간이야. 그게 자네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해. 자네는 자신이 순수한 성격이기 때문에 전 인생이 순수한 현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지만, 그건 여간해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자네는 또 사회적 직무에 따르는 활동이라는 것을 멸시하고 있어. 그건 말하자면 자네가 일과 목적이 언제나 일치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지만, 그것도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자넨 또 한 인간의 활동이 언제나 목적을 가져야 되는 것처럼 사랑과 가정생활이 언제나 동일하기를 원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 역시 그렇지는 않은 거야. 인생의 온갖 변화와 매력과 아름다움은 모두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거니까."




갑자기 두 사람은 그들이 비록 친구 사이이고 식사를 같이 하고 한층 더 친분을 두텁게 하는 술까지 나누어 마셨지만, 각자가 자기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상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통감했다. 오블론스키는 이미 여러 차례 식사 뒤에 친밀함을 대신하는 이러한 극도의 소외감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계산!" 그는 이렇게 외치고 옆의 홀로




그녀는 어머니와 같은 것을 바라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그것을 바라는 동기가 불쾌했던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저, 한쪽에만 희망을 갖게 하고..."

"어머니 부탁이에요, 이제 정말 그만 얘기하세요. 그 이야길 하는 것은 정말 무서워요."




저녁식사가 끝나고 야회가 시작될 때까지 키티는 싸움터에 임한 젊은이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고동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 죽은 오라버니와 레빈의 우정에 대한 기억은 그와 그녀의 관계에 독특하고 시적인 아름다움을 주었다. 그녀가 확신하고 있던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은 그립고 즐거운 것이었다. 




브론스키와 같이하는 미래를 상상하면 그녀 앞에는 곧바로 행복에 찬 빛나는 광경이 전개됐지만, 레빈과 같이하는 미래는 그저 어슴푸레한 안개에 싸인 듯 보일 뿐이었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고 내가 그분한테 얘기할 수 있을까? 그건 거짓말을 하는 게 된다.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나? 다른 분을 사랑하고 있어요, 라고 말할까? 아니야,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난 달아나야겠다, 달아나야겠다.'




'아냐!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비겁하다. 내가 두려워할 게 뭐가 있담? 난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될 대로 되게 마련이다. 바른대로 얘기하자. 저분과 나 사이에 거북한 일이라곤 있을 수 없을 테니까. 여기 오셨다.'




"그것은 당신에게 달렸다구요." 그는 되풀이했다. "난 말하고 싶었습니다... 난 말하고 싶었습니다... 난 이번에 이 일 때문에 나왔습니다... 저어... 내 아내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지껄였다. 




무의식중에 빛났던 그녀의 시선 하나로 레빈은 그녀가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기라도 한 것처럼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세상에는 자기의 운좋은 경쟁자를 만나면 언제나 상대가 지닌 일체의 장점은 외면하고 그저 단점만을 보려고 하는 사람과, 그와는 반대로 경쟁자에게서 자기보다 뛰어난 구석을 발견하려는 생각으로 마음이 옥죄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그저 장점만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브론스키는 검은 머리에 키가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의젓하고 지극히 침착한, 선량해 보이는 아름답고 굳건한 생김새의 남자였다. 그의 용모와 풍채는 짧게 깎은 검은 머리칼과 산뜻하게 면도한 턱에서부터 품이 넉넉하게 새로 지은 군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말쑥하면서도 동시에 화사했다. 




키티는 탁자를 가져오려고 일어섰다. 그러고서 레빈 옆을 지나가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가 가여웠다. 그의 불행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을 할수록 더욱더 가여워졌다. '만약 나를 용서하실 수 있다면 용서해주세요' 라고 그녀의 두 눈은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행복하니까요.'

'나는 모든 사람을 미워합니다, 당신도,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그의 눈은 대답하고 있었다. 




"당신도 물론 와주시겠죠?" 그는 키티를 돌아보고 말했다. 

노공작이 자기의 곁에서 떨어지자마자 레빈은 살며시 자리를 비웠다. 이 야회에서 그가 가지고 나온 최후의 기억은 무도회에 대한 브론스키의 질문에 대답하며 생글생글 웃는 키티의 행복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즐겁다.' 그는 쉬체르바쓰키네 집에서 돌아오면서 언제나처럼 이렇게 생각했다. 




'사랑에 취한 그 귀여운 눈! 네, 정말... 하고 말했을 때의 그 눈빛.'




마치 상대방에게 어떤 느낌을 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이 곧잘 사납게




기차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은 역 안의 왁자지껄함, 짐꾼들의 달음질, 헌병과 역무원들의 출현, 마중나온 사람들의 도착 등에 의해서 차츰차츰 뚜렷이 나타났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존경하고 있지 않았고, 똑똑히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의 분위기와 자기의 교양에서 비롯된 극도의 순종과 공경의 태도 외에는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적으면 적을수록 겉으로는 더욱더 순종하고 공손해지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 가운데서 노닐기도 하고 반짝이는 두 눈과 살포시 짓는 미소로 실그러진 붉은 입술 사이를 팔딱팔딱 뛰어 돌아다니기도 하는 짓눌린 생기 




마치 과잉된 뭔가가 그녀의 몸속에 넘쳐흐르다가 그녀의 의지에 반해서 때론 그 눈의 반짝임 속에, 때론 그 미소 가운데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 빛은 그녀의 의지를 거슬러 그 엷은 미소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냈다. 




요 며칠 동안 돌리는 내내 아이들하고만 지냈다. 그녀는 자기의 슬픔을 이러쿵저러쿵 지껄이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또 이런 슬픔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서 다른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결국엔 안나에게 모두 다 실토하고 말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이 그녀를 위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남편의 누이동생인 안나 앞에 자기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놓고 충고니 위안이니 하는 미리 준비된 문구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했다. 




위로가 되어왔던 것, 괴로움과 노고의 보상이 되어왔던 것도 모두 사라져버렸어요... 당신은 내 말을 믿을 수 있나요? 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쉬아를 가르치고 있었어요. 전에는 이런 것도 즐거움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괴로움이에요. 무엇 때문에 나는 애를 쓰고 고생을 하고 있는 거죠? 아이들은 무엇 때문에 있는 거죠? 내 마음이 이렇게 갑자기 뒤집혀버렸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지금 내 마음속엔 사랑과 부드러움 대신 그이에 대한 증오가 있을 뿐이에요. 그래요, 증오예요. 나는 정말 그이를 죽여버리기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키티는 왈츠를 추는 안나를 넋을 놓고 바라보면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에게 왈츠를 청해주기를 기다렸으나 그는 청하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스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을 붉히고 허둥지둥 왈츠를 청했으나, 그가 그녀의 가는 허리에 팔을 돌리고 막 첫발을 내디뎠을 때 갑자기 음악이 뚝 그쳐버렸다. 키티는 바로 자기의 눈앞에 있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응시, 그녀가 사랑에 가득 찬 마음으로 바라보았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던 이 응시는 그 뒤에도 오랫동안, 몇 해 뒤까지도 괴로운 치욕으로서 그녀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녀는 그 눈 속에서 떨리며 불타오르는 광채를,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지게 하는 행복과 흥분의 미소를, 그 동작에 나타나는 한층 또렷한 우아함과 확실함과 경쾌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작은 객실 안쪽으로 가서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공기처럼 부푼 치마는 그녀의 가냘픈 자태 주위로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처녀답게 보드라운 맨살이 드러난 가느다란 한쪽 팔은 힘없이 처져 장밋빛 튜닉의 주름 속에 가라앉고, 다른 한 손은 부채를 들고 날렵하고 짧은 동작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부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막 날개를 쉬려고 풀잎에 내려앉았던 나비가 금방 또 날아올라 무지개 같은 날개를 펼치려고 하는 풍정을 느끼게 했으나, 이러한 외양과 달리 그녀의 마음은 무서운 절망감으로 죄어들고 있었다. 




언제나 그토록 의연하고 듬직하던 브론스키의 얼굴에 아까 그녀를 자극했던, 영리한 개가 나쁜 짓을 저질렀을 때 짓는 것과 같은 당황과 순종의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았다. 




안나가 미소를 지으면 그 미소는 그에게로 옮아갔다. 안나가 생각에 잠기면 그도 진지해졌다. 그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키티의 눈을 끊임없이 안나의 얼굴로 이끌었다. 




키티는 짓밟힌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역력히 그것을 드러냈다. 브론스키는 마주르카가 한창인 때에 그녀와 마주쳤으나 언뜻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는 달라져 있었다. 




"그럼 당신은 내일 바로 떠나시는 겁니까?" 브론스키는 물었다.

"네, 그럴 생각이에요." 안나는 마치 그의 대담한 질문에 놀란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했을 때 억제할 수 없이 떨리던 그녀의 눈과 미소의 반짝임이 그의 마음을 불살랐다. 




더구나 그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모든 것은 그 일이 얼마만큼 교묘하게 의식적으로 행해지느냐에 달려 있어요.




"너도 알겠지만, 자본은 노동자를 압박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노동자와 농민은 모두 노동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데다가 아무리 뼈가 녹아나게 일을 해도 그 가축 같은 상태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게 돼 있단 말야. 사실 노동으로 인한 모든 수익이라는 것은 그들이 처지를 개선하고 자기들을 위해서 여가를 얻고, 그 결과로 교육도 받는 데 쓰여야 하는 거지. 하지만 그런 이윤이라는 게 모조리 자본가들에게 수탈당하고 있지 않은가 말야. 이처럼 오늘날의 사회는 그들이 일을 하면 할수록 상인이나 지주들의 배는 살찌지만 그들 자신은 영구히 노동하는 가축으로 지내고 마는 제도로 형성되어버렸단 말이야. 그래서 이런 제도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지."




그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느꼈고 그 이외의 다른 사람이 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이전의 자기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민중의 가난과 비교해서 자기의 넉넉한 상태를 불공평하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마음속으로 자기를 철두철미 바른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도록 이전에도 열심히 일하고 사치를 피하며 살아오긴 했지만 앞으로는 더 많이 일하고 사치도 더욱 줄여야겠다고 새삼 결심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아주 손쉽게 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에, 오는 내내 더없이 즐거운 공상 속에 빠져 있었다. 새롭고 보다 나은 생활에 대한 희망에 가득 차서 밤 여덟시가 지나 그는 자기 집에 도착했다.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의 방 창문에서 집 앞 넓은 마당에 쌓인 눈 위로 밝은 불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그 일은 실현될 것이다. 그는 지루해하지도 않고 지껄이는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읽은 내용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와 동시에 집안 살림이며 미래의 가정생활에 대한 갖가지 광경이 두서없이 그의 상상 속에 떠올랐다. 그는 자기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짜여지고 조절되고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우리들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보다 나은, 훨씬 좋은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




괜찮아요, 도련님. 몸이 성하고 양심이 깨끗하기만 하면요.




라스카는 줄곧 그의 손 밑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가 어루만져주자 라스카는 곧 그의 발치에 둥그렇게 몸을 오그리고 옆으로 내민 뒷다리 위에다 머리를 얹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는 표시로 가볍게 입을 열어 입술을 핥고는 끈적끈적한 입술을 나이 먹은 이빨의 언저리에 보기 좋게 붙이고 행복한 안정 상태로 잠잠해졌다. 

레빈은 이러한 라스카의 마지막 동작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해야겠다!" 그는 혼잣말을 했다. "나도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니다...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있다."




키티도 머리가 아프다는 전갈만 보내고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돌리와 안나는 자기들끼리 아이들과 영국인 가정교사를 상대로 식사를 했다. 아이들은 변덕이 심해서인지, 아니면 너무 예민해서 안나가 오늘은 자기들이 그토록 그녀를 사랑했던 전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으며 이제는 자기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인지, 아무튼 고모에 대한 장난과 그녀를 따르던 행동을 갑자기 그쳐버렸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와주지 않았더라면 정말이지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당신은 정말 행복한 분이에요, 안나!" 돌리가 말했다. "당신의 마음씬 정말 깨끗하고 선량해요."

"어머나, 그렇지도 않아요.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는 제각기 자기만의 비밀이란 게 있어요, 영국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말예요."

"어머나, 그럼 당신에게도 어떤 비밀이 있어요? 당신의 마음은 언제나 그렇게 뚜렷한데요."

"그래도 있어요!" 안나는 불쑥 말을 뱉었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 뒤에 어울리지 않게 짓궃은 미소가 그녀의 입술에 떠올랐다. 




하지만 정말, 내겐 잘못이 없어요. 설사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아주 조오금 있을 뿐예요."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조금' 이라는 말을 길게 잡아늘이면서 말했다. "어쩜 당신은 스티바하고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돌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안나는 모욕을 느꼈다. 




그녀는 이러한 말을 입에 담음과 동시에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를 의심했을 뿐만 아니라 브론스키를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에 동요를 느꼈으므로 더이상 그와 만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예정보다 빨리 떠나기로 한 것이었다. 




"난 언제나 내가 당신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들도 모두 날 사랑해줬으면 해요.




처음에는 주위의 혼잡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방해를 했으며,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에는 그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왼쪽의 창문을 두드리며 창틀에 쌓여가는 눈송이, 방한구에 싸인 몸뚱이의 한쪽에 눈이 덮인 채 옆을 지나가는 차장의 모습, 지금 밖엔 사나운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이러한 것들이 그녀의 주의를 산만하게 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줄곧 똑같은 것의 연속이었다. 무엇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를 내는 기차의 진동, 한결같이 창문에 내리치는 눈, 식었다 뜨거워졌다 하는 증기열의 급격한 변동, 어두컴컴한 속에서 어른거리는 똑같은 얼굴들, 그리고 똑같은 목소리들. 그래서 안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은 것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경이 마치 음을 조절하는 나사에 걸린 악기의 현처럼 줄곧 팽팽하게 조여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문을 열었다. 눈보라가 그녀를 향해 휘몰아쳐와 그녀로 하여금 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그녀에게는 재미있게 여겨졌다. 그녀는 문을 밀어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은 마치 그녀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즐겁게 울부짖으며 그녀를 붙잡아 채가려고 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승강구의 차가운 난간을 붙들고 옷자락을 움켜잡으면서 플랫폼으로 내려가 차량 뒤로 몸을 숨겼다. 바람은 승강구에서는 거셌지만 플랫폼에서는 열차에 가려 잠잠했다. 그녀는 즐거운듯이 얼어붙어 있는 바깥공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쉬고 열차의 옆에 선 채 플랫폼과 등불이 환한 역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보이는 온갖 것들은 모두 한쪽에서 휘몰아쳐오는 눈에 덮여 차츰차츰 깊이 파묻혀가고 있었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가 그녀에게 그저 당신이 있는 곳에 있기 위해서 왔다고 이야기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이 계시는 곳에 있고 싶어서 왔다는 것은 아실 텐데요. 난 이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하세요, 이제 그만하세요!" 그가 탐욕스럽게 들여다보고 있는 자기의 얼굴에 엄격한 표정을 지으려고 헛되이 애쓰면서 그녀는 외쳤다. 그러고는 차가운 난간을 붙잡고 승강구 계단에 발을 올려놓고 재빨리 객차의 출입구로 들어갔다. 




새벽녘 가까이 되어서야 안나는 좌석에 걸터앉은 채 졸기 시작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벌써 날이 훤히 밝아 있었고 기차는 페테르부르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자 이내 집과 남편과 아들, 오늘 하루 해야 할 일과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생각과 걱정이 별안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다. 




그는 오직 자기가 그녀에게 한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 자기는 그녀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왔고 인생의 모든 행복과 유일한 의의를 이제는 그녀를 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그는 줄곧 그녀와 만났던 장면이며 그녀가 했던 말들을 되새겨보았다. 그러자 앞으로 일어날 수 있을 몇몇 상황들이 상상 속에서 그려지며 그의 심장은 얼어붙는 듯했다. 




식사가 끝난 뒤에 바로 나가봐야 된다고 하면서 흰 넥타이에 훈장 두개를 단 연미복 차림으로 나왔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생활은 일 분 단위로 구분되고 계획되어 있었다. 그날마다 자기 앞에 닥친 일을 해내기 위해서 그는 극히 엄격한 규율을 준수하고 있었다. '서둘지 말고, 쉬지 말고.' 이것이 그의 신조였다. 




"드 릴 공작의 <지옥의 시> 를 읽고 있는 중이오." 그는 대답했다. "정말 훌륭한 책이오."

안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자의 결점을 보고 웃을 때처럼 그렇게 빙그레 웃었다. 




'역시 저이는 좋은 분이야. 마음이 곧고 착하고 자신의 분야에서는 훌륭한 사람이야.' 안나는 자기 방으로 돌아오면서 마치 누군가가 그를 비난하고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지켜주기라도 하려는 듯한 어조로 혼잣말을 했다. '그렇지만 어째서 저이의 귀는 저렇게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일까! 머리를 너무 짧게 깎아버린 탓일까?'




브론스키는 처음 얼마간 모스크바에서 가지고 온 전혀 다른 세계의 인상 때문에 다소 머릿속이 멍했지만, 곧 낡은 슬리퍼에 발을 밀어넣듯이 이전의 즐겁고 유쾌한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 제1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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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1이 a를 했을 때의 1a 와 2가 a를 했을 때의 2a 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 모양이 1a 와 2a로 다름에 따라 그것의 성질이라는 것이 어찌하여 다르게 여겨지는 것인가, 에 대한 인간사고에 대한 고찰, 내로남불을 감출 수 있는 이미지, 그래서 그것은 로맨스인가 불륜인가, 이게 다 뭔 상관이라는 것인가, 모든 생물은 행복을 추구한다, 다수의 행복과 소수의 존중, 평등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과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다른 궤를 갖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