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도 더우니까 모든 게 귀찮아진다.
마갤 대숙청으로 디시가 망할 거 같지만
정작 추락하는 것은 내 인생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추락'과 관련된 중요한 모더니스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더군다나 오늘은 남미편이다.
이미 남미 모더니스트들을 조금 다루었던 걸로 기억한다.
페루의 세자르 바예호가 있었고, 그의 시집 <트릴세>가 남미 모더니즘 및 남미 현대시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었다면,
사실 하나 더 있다.
바예호의 <트릴세>와 더불어, 대충 남비 모더니즘의 양대산맥과도 같은 작품과 시인.
바로 오늘의 주인공, 칠레 출신의 비센테 우이도브로다.
사실 바예호나 네루다 등 오늘날 유명 남미 출신의 모더니스트들 상당수는 그리 좋지 못한 집안 출신인데
우이도브로는 특이 케이스다.
어릴 적에 대저택에 하인 80명이 넘게 있는 SHIP 귀족 부르주아지였다.
이게 그의 삶에서도 꽤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니까 기억하자.
1893년의 전형적인 남미 부유 귀족 부르주아지 계층 출신이라 태어나길 칠레에 태어났지만, 어릴 적에 거의 곧바로 유럽 가서 5살 때까지 살고
집안에서도 프랑스와 영국 출신 가정부들 밑에 자라면서 여러 언어를 배우고 예수회학교에서 공부하는 등 부르주아지 코스를 밟는다.
하지만 그 또한 천성 시인이었고, 어차피 먹고 살 걱정은 필요 없었기에 곧바로 문단활동에 뛰어들며 잡지도 만들고 이것저것 하다가 곧바로 유럽 간다.
그리고 알다시피 유럽 사교계든 문학계든 부르주아지는 누구나 환영하므로
우이도브로는 여러 팸에 가입하게 된다.
초현실주의자들과 어울렸고, 초현실주의나 피카소 같은 화가들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고, 현대 안무가 등과 안무를 쓰는 등 이것저것 하면서
남미의 중심자가 된다.
심지어 젊을 적의 보르헤스 또한 우이도브로와 함께 편집 일을 하기도 했다.
물론 우이도브로가 좀 더 선배 세대긴 하다.
그리고 세자르 바예호와도 친분이 있었고, 도와주기도 하긴 했다.
하지만 우이도브로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미 문학의 중심자이자, 전환점 중 하나가 되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우선 남미 문학, 물론 브라질은 포어권이라 좀 아싸처럼 따로 놀지만, 대충 남미문학은 원래 대부분이 유럽 이민자 출신이므로 유럽을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알잖아? 아 아무튼 우린 유럽과 다름, 아무튼 다름 하면서, 남미만의 무언가 섬씽 인비지블을 추구하자는 자들이 등장하면서 사실상의 남미 문학, 혹은 근현대적인 남미문학이 시작된다.
이게 흔히 말하는 모더니즘 없는 모더니즘팀, 루벤 다리오가 이끄는 <모데르니시모> 운동이다.
스페인어로 '모더니즘'이긴 한데, 유럽 문학 운동과 비교하면 낭만주의 + 상징주의 혼종에 가까워서, 우리가 흔히 아는 모더니즘은 아니다.
물론 루벤 다리고가 남미 문학의 아버지격으로 선구자적인 일을 했기에 남미 문학은 대충 남미스러운 모더니즘 길을 걷게 된다.
그 직후 나타난 것이 바로
젊은 보르헤스도 참여했었던 <울트라이즘 - 울트라주의->다.
명심하세요 보르헤스는 모.더.니.스.트.입니다
물론 목동 저그를 위해선 울트라와 디파와 저글링이 필요하듯
이 운동 자체는 스페인에서 시작되었찌만, 사실 남미 문학 상당수가 스페인에서도 활동하던 이들이 포함되기에 남미 출신으로까지 퍼진다.
대충 당시 미래주의 등 너무 과격파들이 나타나자, 아무튼 자제하자, 간결함을 추구하자 등등을 외치던 이들인데
사실 그리 성공적이진 못하고 붐은 꺼지게 된다.
그때 우이도브로가 외친다.
그가 1919년 1차대전의 종결시점부터 10년의 세월을 공들여 쓰던 서사시 <알타조르>와 함께,
일명 '창조주의' 운동을 외친 것이다.
우이도브로의 '창조주의'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장미를 노래하지 말고, 시 속에서 장미를 피게 하라."
<신이 신이 되게 하라,
아니면 사탄이 신이 되게 하라>
- <알타조르>, 비센테 우이도브로
자연, 바깥의 장미를 묘사하지 말고, 킹왕짱갓제네럴 시인이 언어를 통해 자신의 창조적인 작품 속에서 장미를 만들면 된다, 이 말이야.
물론 이러한 창조주의 자체는 우이도브로의 1인 플레이에 가까웠지만, 그가 남긴 오늘날까지 그의 대표작 <알타조르>는 단순히 1인분을 넘는 대충 큐5인분의 일처리를 하게 된다.
<추락
영원한 추락
무한의 밑바닥을 향한 추락
시간의 맡바닥을 향한 추락
그대의 자아의 밑바닥을 향한 추락
그대가 추락할 수 있는 만큼의 추락>
- <알타조르>, 비센테 우이도브로
'알타조르' 자체가 대충 '높은 곳' 과 '매'의 합성어였고, 그의 서사시 <알타조르>는 마치 매가 허공에서 추락하듯, 이 알타조르로 대표되는 시적 화자의 4차원적 공간에서의 추락을 노래하는 서사시였지만
무엇보다도 그 '실험'이 중요했다.
시인의 창조력을 무엇보다도 강조했던 만큼, 그리고 유럽에서 여러 이들과 교류했던 만큼 그의 <알타조르>는 여러모로 실험적이었다.
철학적인 사색과 탐구처럼 알타조르가 무엇인지 탐구하던 1곡에서 난데없이 연인을 향한 사랑을 노래하는 2곡, 그리고 3곡에서부터 점점 언어유희와 언어의 해체로 이어지며 끝끝내 마지막 7곡에선 추락 속의 비명인냥 음성어들의 도배까지
말 그대로 실험의 극단이었다.
칠레에 왔을 때도 우이도브로는 이러한 최신 유럽 초현실주의 등을 남미에 이식하고 돕기도 하면서 남미 모더니즘의 아버지들 중 하나가 된다.
알다시피 원래 예술가들은 남이 무언가를 하면 배알이 꼴려서 그 반대를 할려고 한다.
선배 우이도브로의 이러한 극단적인 예술적인 실험 추구에 그의 칠레 후배는 곧 반기를 든다.
바로 오늘날 칠레의 대표 작가 중 하나인 파블로 네루다다.
네루다는 알다시피 어느 정도 리얼을 추구했고, 우이도브로의 실험과 탐미에 반기를 든다.
여기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우이도브로도 많은 남미 작가들이 그러듯, 공산당에 가입하는 등 좌파 활동을 하긴 했는데
소련 여행 등을 떠나면서 회의감을 표현한다.
앞서 언급했듯 우이도브로는 태어날 때부터 집에 하인만 80명 있는 부르주아 중의 부르주아다.
이러한 배경 등도 네루다와 우이도브로의 반목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원래 뜨는 뉴비가 있으면 지는 올비가 있듯, 칠레에서 우이도브로의 위치가 네루다의 상승과 함께 저물어가는 것도 한몫했다.
아무튼 간, 우이도브로는 다시 유럽으로 왔고, 2차 대전을 지켜보면서 프랑스편으로 참전하기도 했는데 부상을 입는다.
이러한 전쟁 중 부상 덕분에 후유증으로 1948년, 54살의 나이로 죽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실 우이도브로 자체는 오늘날까지 칠레의 아이콘 중 하나다.
당장 칠레산 와인 중에 그의 대표작 <알타조르>를 딴 와인도 있고
<알타조르는 나
알타조르
그의 운명의 감옥에 갇혀선
무의미하게 탈옥을 위해 빗장을 흔드네
꽃 한송이가 길을 막는다
그러면 빗장들은 불꽃의 동상들 마냥 솟아오른다
불가능한 탈출>
- <알타조르>, 비센테 우이도브로
구글에서도 두들로 그의 기념일을 축하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오늘날 칠레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은 바로 그의 작품에서 이름을 딴 <알타조르 문학상>이다.
<여기 시인 비센테 우이도브로가 눕는다
무덤을 열면
그 밑바닥에서 그대는 바다를 볼 것이다>
- 비센테 우이도브로의 묘비명
명심하자
추락하는 모든 것엔 날개가 있다
모더니스트의 기묘한 모험
- 20세기 최고 시인 예이츠의 환상록과 자서전 읽으쉴?
- <율리시스>는 어떻게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책이 되었는가?
- 위대한 피츠제럴드 (1), (2)
- 토끼공듀의 삶
- 만델스탐의 노래
- 악어들의 거리
- 독일인이 오리라
-머피를 기다리며 (1)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서 (2) 계승하는 중입니다 (3) 계속한다, 계속할 수 없다, 계속해야만 한다
-저주받은 상징주의자들 (0) 저주받은 시인들 (1) 세계는 한 권의 책을 위해
-스탈린 동무 살려주시게! 내가 번역도 해주지 않았던가?
모더니스트의 선조들
날잡고 정주행해야하는데.. ㅠㅠ
역시 이문열이 맞았어
칠레에 좋은 시인들이 많구만
본문에서 알타조르 중 발췌역된 첫 부분 원문이 어떤지는 몰라도 운율 ㅆㅅㅌㅊ네
중남미 시 수업에서 알타소르 마지막 부분 보고 이거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ㅋㅋㅋㅋ 약간 괴짜스러운 일화가 있는 사람이었어. 유명한 집안 여학생(미성년자)이랑 눈 맞아서 처자식 버리고 유럽으로 도망침 + 2차 대전에서 돌아온 후에는 전화기를 하나 들고 와서 이게 히틀러가 사용했던 전화라고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