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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채식주의자가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고, 폭력이란 구체적으로 5.18 광주라고 했을 때 확 와닿지 않지?


5.18을 폭력이랑 대응 시킨 한강의 접근을 나도 처음에는 낯설게 느꼈거든


5.18을 무채색의 이념으로 아는 것과 폭력이라는 섬뜩한 구체성으로 체험했던 것의 차이가 아닐까?


5.18을 '폭력 극장' 이라고 표현한 책이 있다. 


그 책을 통해 5.18과 폭력의 연결점을 간접적이지만 구체적으로 체험했는데,  발췌 조금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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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사회과학-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5월 광주의 삶과 진실>, 최정운 



전시적(demonstrative) 폭력 -  "5.18 광주는 폭력극장이었다."



"공수부대의 폭력은 당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5.18 광주는 폭력극장이었다. 죽거나 살거나가 아니라 처참하고 눈뜨고 볼 수 없게 패고 찌르고 자르는 등 엽기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진압의 기본 원칙이었고, 이를 위해 특수 진압봉과 대검을 사용했다."


"당시 7공수 군의관이었던 위계룡 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진압 방법은 맨 처음에는 시위대에 무서움과 공포증을 주어 시위대를 흩어지게 하는 것이고, 그래도 되지 않으면 시범으로 몇 명을 잡아 사정없이 닦달하여 시위 군중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 


"한 증언록은 다음과 같이 관찰하고 있다. "공수부대원의 살육은 분명히 의도적인 듯했다.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그와 같은 살육을 자행하고 시민들이 이 광경을 보며 분노와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면 더 신이 나서 해대는 것이었다"


" 이러한 폭력은 시위 진압이라 할 수 없으며 통상적 폭력도 아니었다. 이는 시각적 언어였고 명쾌한 뜻을 전하고 있었다. 즉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며, 악귀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또한 중요한 점은 이들의 폭력, 특히 전설처럼 남아 있는 엽기적 행위는 결코 인간의 공격적 본능이나 분노의 표현이나 환각제의 효과가 아니라 고도로 훈련되고 오랜 연습을 통해 익힌 전문 기술이며 주로 월남전에서 갈고닦은 것이었다. 5.18의 공수부대는 문명이 이성으로 만들어낸 야만이었다. 광주 시민들의 처절한 저항이 낙동강 전투를 계승하고 있었다면 공수부대의 폭력은 월남전과 맥을 잇고 있었다."


"강길조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5월 20일 전남대 강의실로 끌려가자 "공수대원들은 상당수가 월남전 얘기를 입에 올리기를 잘했는데, 그 중 한 명은 대검을 빼어들고, '이 대검은 월남에서 베트공 여자 유방을 사십 개 이상 자른 기념 칼이다'라고 자랑하며 그 대검으로 앞 사람의 더벅머리를 탁 쳤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면서 스포츠머리처럼 되었다"


"공수부대의 이러한 폭력으로 부마사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러나 5.18의 경우는 어떤 조건에서 광주 시민들은 저항할 수 있었는가의 문제..."


"일반적으로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공수부대가 폭력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였다. "개 패듯 패고', '개처럼 질질 끌고 와 트럭에 싣고'등의 표현은 증언록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처참한 광경에 공포에 질려 우선 도망친 후 느낀 자책감, 즉 자신의 무력함과 비참함에 대한 의식이었다. 이 심정은 불행한 동료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에 대한 분노와 분노에 반응하지 못하고 폭력에 대한 공포에 떠는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수치와 분노였다. 공수부대는 인간을 짐승처럼, 짐승보다도 못하게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 그 폭력이 지향했던 사람들도 인간 이하로 전락시켰다. 광주 시민들의 분노는 이중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많은 경우 '그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체가 저주스러웠다'고 토로했다.

  

  자기 자신이 인간 이하라는 수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신이 인간 이하임은 폭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는 분노는 광주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공수부대와 싸워야만 했던 운명이었다. 광주 시민들이 투쟁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 '인간임'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폭력의 메시지는 폭력을 당하는 인간과 이것을 보는 인간, 나아가서 그 시대 그 땅의 모든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광주 시민들은 이에 대한 분노로 이성을 잃고 사선을 넘었다. 그들은 투쟁의 대열에 참가함으로써 짐승의 수치에서 해방되어 존엄한 인간이 되었고 투쟁의 대열에 선 사람들은 모두 서로 존엄한 인간임을 축복했다. "



" 우리는 이제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하며 개나 도야지와 같이 입을 먹이그릇에 처박아 먹어야 하며, 짐승과 같이 살아야만 합니다.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유신잔당이 우리를 짐승같이 취급, 때리고, 개를 죽이듯이 끌고 가고, 찌르고, 쏘았기 때문입니다."


 

"두 다리로 걷고 인간다웁게 살려고 하면 생명을 걸고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져야 한다. 과거의 침묵, 비굴했던 침묵의 대가를 지금 우리들은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