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거세게 내리는 비를 멍하니 쳐다본다. 손을 살짝 내밀어 본다. 한 겨울의 비는 차갑고 거칠어 내민 손이 눌려 아스라질 것만 같았다. 곧바로 손을 뺀다. 가볍게 숨을 들이키자 차가울 정도로 청량한 공기가 폐 깊숙이 찔렀다.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고, 떨어지는 빗방울은 얼음이 된 눈과 만나 얼음의 웅덩이를 만들었다

 

아빠가 앓아 누우셨다는 엄마의 연락에 친구와 한 약속도 깨고 시골 고향에 내려왔건만, 정작 아빠는 언제 아팠냐는 듯 쌩쌩하게 돌아다니셨다. 왜 왔냐는 황당한 인사에 소리를 빽 지르고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거장에 도착하자 자로 잰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시골 풍경은 한가로웠다. 나무들은 가을에 만개했던 잎들을 내려놓고 쏟아지는 비에 몸을 씻고 있었고,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리듬이 귀를 간질였다. 세명이면 가득 찰 작은 버스 정거장에 앉아 할 수 있는 일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는 것 뿐이었다휴대폰으로 무료한 시간을 때운다는 방법을 생각했으나 전화도 불안한 배터리 잔량을 보니 한숨만 나왔다. 시야에 잡힌 버스 시간표엔 단 하나의 버스만 있었다. 유일하게 작은 시골길을 오가는 0번 버스. 현재 시간은 140. 한시간의 배차 간격을 생각하면 사십 분을 기다렸으니 못해도 이십 분 뒤면 버스가 올 터였지만 쏟아지는 비를 보니 걱정이 됐다. 곧 무료해진 나는 살며시 눈을 감고 규칙적인 빗소리의 화음을 즐기기 시작했다.

 

남매와 만난 것은 그때였다. 깜빡 잠이 든 걸까. 무릎을 툭툭 건드리는 감촉에 살며시 눈을 뜨자 초등학생 남짓한 남매가 보였다. 새하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린 소녀와 반바지를 입고 야구모자를 눌러 쓴 개구장이 인상의 소년은 우산 하나를 사이 좋게 나눠 쓰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니는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맑고 가냘픈 소녀의 목소리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남매의 순진한 눈망울을 마주보며 웃었다.


, 나는 버스 기다리고 있지


버스 방금 갔을 텐데. 누나 버스 놓쳤어?”


, 벌써?”


버스가 이미 떠나고 없다는 소년의 말에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니 분침은 어느덧 삼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짜증과 더불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동시에 귀여운 애들에게 짜증을 부릴 순 없다는 생각에 웃어보였다.


그렇네. 너희는 여기서 뭐하니?”


산책 나왔어요. 저희 집 데이지가 비 오는 날 산책하는 걸 좋아 해서요.”


데이지?”


흘긋 쳐다보니 그제서야 둘 뒤에 작게 숨어있던 흰 강아지 한 마리가 보였다. 작고 꼬물거리는 흰 녀석은 혀를 내빼고 꼬리를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귀엽네. 그런데 바람도 세게 불고 비도 오는 날씨에 산책이라니?”


내 물음에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하늘을 쳐다봤다.


지금 바람 안 불어요. 비도 거의 안 오고요.”


나는 그제서야 잠이 깬 것처럼 주위를 둘러봤다. 신비로운 광경에 지끈거리던 머리는 맑게 개어지고 동공이 크게 떠졌다. 한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동안 마법이 일어난 것처럼 계절은 뒤바뀌어 있었다. 살인적으로 쏟아 내리던 비는 보슬비로 변했고,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햇빛이 무릎 언저리를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봄을 향한 태동을 준비하는 것처럼, 차갑던 공기엔 어느덧 따스한 봄의 숨결이 섞여 있었다. 마법과도 같은 광경에 속으로 작게 감탄할 무렵, 소년의 손아귀에 있던 목줄이 팽팽히 당겨지며 데이지가 비 오는 도로 한가운데로 뛰쳐나갔다.


, . 이리 와!”


소년은 목줄을 쥔 채로 따스하게 내리는 비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소녀 또한 우산을 쓴 채로 둘을 쫓아 뛰었으나, 걸리적거리는지 곧 우산을 접고 달렸다. 데이지의 질주는 도로 건너편 작은 공터에서 멈췄다. 뛰노는 데이지를 소년이 쫓고, 소년을 소녀가 쫓는 재미난 모양새였다. 나는 멍하니 의자에 앉은 채 남매가 데이지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광경을 쳐다봤다. 처음엔 잘못 봤다 생각했지만, 데이지를 쫓는 소년과 소녀는 비에 젖어 생쥐꼴이 되는 와중에도 신나게 웃고 있었다. 이상하다. 친구는 개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짜증을 냈었던 것 같은데. 분명히 전화로 후회 가득 찬 푸념을 늘어놨었지. 결국 오래지 않아 개에서 손이 덜 가는 모란앵무로 바꾸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데이지가 통제에 따르지 않고 멋대로 뛰노는 광경이 남매에게 술래잡기같은 놀이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심지어 내리는 비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듯 했다.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내리는 비라 해봐야 보슬비였을 뿐이지만, 아직 겨울의 한기는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데이지를 잡겠다는 목적은 여전했지만, 그냥 신나게 뛰노는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빗속에서 웃으며 뛰노는 남매를 한참을 지켜보다 깨달았다. 남매에게서 나도 모르게 잃어버렸던 어렸을 적의 순수함이 보였다. 서로의 웃음소리와 빗소리를 음악으로 삼고, 같이 뛰어다니던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시절. 나이가 들고 현실에 순응하며 잊기 시작하는 감정. 혹은 많은 쾌락을 알아버려 더 이상 즐기기 힘들어지는 감정. 누구나 시작할 때 가지고 시작하나 누구도 끝까지 지니지 못하는 감정. 어렸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감정이 빗속에서 뛰노는 남매에게서 엿보였다. 나는 말을 잊은 채 남매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던 지는 모르겠다. 데이지를 잡은 남매는 비 맞은 생쥐꼴로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버스가 올 때까지 멍하니 남매가 뛰놀던 광경을 되새김질 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버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숫자 0을 앞세우며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 타고서야, 강아지의 이름은 알아도 남매의 이름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버스는 떠났고, 편찮으신 부모님은 병원 진료 때문에 이듬해에 도시로 이사를 오셨다. 그리고 내가 다시 시골 집에 갈 일은 없었다.








제목은 데이지로 할래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