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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는 ‘의무’와는 다른 것으로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세상에 대한 의리’로 동배에게 은혜를 갚는 의무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에 대한 의리’로 자신의 이름과 명성이 어떤 비난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는 의무이다.
세상에 대한 의리는 개략적으로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의리는 법률상의 가족에 대해 지고 있는 일체의 의무를 포함하고, ‘의무’는 직계 가족에 대해 지고 있는 일체의 의무를 포함한다. 일본에서 결혼은 가문과 가문 사이의 계약이어서 평생 동안 상대 가문에 대하여 이 계약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의리를 다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의리는 이 계약을 맺은 세대에 대한 의리가 가장 무겁다.
의리는 법률상의 가족에 대한 의무만은 아니다. 가까운 친척에게도 적용되는데, 그들을 도와주는 것은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받았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자기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 또한 이것과 같은 동기이지만 그것은 ‘의무’이다. 반면 비교적 인연이 먼 친척에 대한 도움은 ‘의리’라고 생각한다.
봉건시대 무사들 간의 의리란 죽음을 건 충절로 묘사됐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인에게 의리를 갚는 행위란, 온갖 종류의 사람에 대해 온갖 종류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의리를 혐오함과 동시에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의리를 행하도록 세상이 압박한다고 느낀다. 의리의 규칙은 엄밀히는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되는 갚음의 규칙이다. 그것은 모세의 십계 같은 일련의 도덕 규칙은 아니다. 의리로 강요되었을 때에는, 경우에 따라서 장신의 정의감을 무시할 수도 있다고 가정된다.
또 의리의 규칙은 이웃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 일본인은 사람들이 진심에서 자발적으로 관대한 행위를 하는 것을 요구치 않는다. 그들은 사람이 의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을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의리를 모르는 인간’이라 불리고, 세상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의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세상의 소문이 무섭기 때문이다. 의리의 갚음은 정확히 같은 양이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의리’는 ‘의무’와 구별된다. 의무는 완전에 가까운 정도까지도 갚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지만, 의리는 무한정한 것이 아니다.
‘이름에 대한 의리’란 자기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덕으로 되어 있지만 은혜의 범위 밖에 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지닌다. 이름에 대한 의리는 비방이나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 명예 훼손자에 대해 복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고,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다. 또한 이 양극단의 중간에는 여러 가지 행동 방침이 있다. 이름에 대한 의리의 완전한 의의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가지 비공격적인 모든 덕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자제는 이름에 대한 의리의 일부분이다. 그들은 고통이나 위험에 직면하여 초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름에 대한 의리는 또한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할 것을 요구한다. 만일 이 의리를 잃게 되면, 그는 스스로를 존경할 권리를 잃는다. 도쿠가와 시대에는 각자가 사용하는 모든 것을 일일이 규제하는 사치 금지법을 자기 자존의 일부로서 수락했다.
전문가로서의 이름에 대한 의리는 일본에선 대단히 엄격한 것이지만, 그것은 반드시 고도의 전문적 능력에 의해 유지될 필요는 없다. 교사는 “나는 한 교사로서 이름에 대한 의리 때문에도 그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의리의 모든 용법에서는 한 인간과 그가 하는 일이 극단적으로 동일시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의 행위 또는 능력에 대한 비판은 그 인간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된다. 일본인은 경쟁을 외부로부터의 공격이라 여긴다. 일본인은 직접적 경쟁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이름에 대한 의리가 문제가 될 듯한 수치를 발생시키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온갖 예의가 짜여 있다. 이는 직접적 경쟁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 미치고 있으며, 모욕을 느끼는 기회가 적어지도록 일을 처리하게 한다.
일본인은 옛 이야기에서는 복수를 크게 찬양하고 있으나, 실제로 현대에 들어와서는 치욕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기보다 자신의 활동을 자제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공격을 자신으로 돌린다. 원인과 사실을 분석하려고 추구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일본인들에게 자살은,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지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이다. 자기 내면에 대한 공격이 단지 우울과 무기력, 인텔리 계급의 풍조였던 권태를 자아내는 것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여기에는 인텔리 계급이 과잉 배출되어 그들의 위치가 불안정해진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곤 한다. 그들은 그런 권태에서 벗어날 수단으로 전체주의적 침략에 가담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후 일본인들은 목표가 사라져 무기력하고 어리둥절하고 있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세계의 눈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데도” 라며 명예심에 호소하고 있다. 일본인의 영원 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그들은 전세계로부터 존경받기 위해 침략을 했으며 같은 이유로 패전 이후 연합군에게 상냥한 것이다.
베네딕트가 서술한 일본의 생활양태는 마치 촌락과 같은 닫힌 사회를 연상케 한다. 나는 이것이 일본인이 근대화 이전까지 사실상 거주 및 이전의 자유가 없었던 것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한국 촌락사회에서도 ‘세상에 대한 의리’ 같은 것을 목격하고는 했기 때문이다. 또한 베네딕트가 제8장 마지막 부분에 묘사한 과잉 배출된 인텔리는 오늘날 한국에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면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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