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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팅만 하다가 글을 쓸려니 좀 부끄럽네요 ^^;
제 의견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 올려 봅니다. 비판이나 의견 제시는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황야의 이리는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소설 중 하나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난해하다면 난해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열 아홉 살이었다. 나는 데미안을 읽고 헤세의 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헤세와 나는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느꼈다. 작가와 나는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작가는 이따금씩 내가 감지하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과 사고들을 나를 대변하여 말해주곤 했다. 나는 나를 닮아있단 이유로 헤세와 그의 책을 사랑했다. 나는 고결하고도 숭고한 내면의 길을 걷는다는 일 자체를 동경했다. 나 또한 언제나 그 길로 걷게 될 숙명을 타고났음을 직감하면서도 그 길로 뛰어들길 두려워했으나, 헤세의 도움으로 나는 그 길로 용감히 들어섰다. 내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마음으로 작가의 고결한 여정이 이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새 소설을 대출했고, 그 책이 바로 황야의 이리였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맨 처음엔 경악하고 분노했다. 작가는 자신이 걸어온 길 자체를 부정하고 타협하였으며 고결함을 천박한 우스꽝스러움으로 전환시켰다. 나는 그와 내가 별다른 연결점 없이 온전한 타인이고 그처럼 고결한 길을 인지하는 작가가 감히 타협을 일삼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감정에 휘둘려 읽는 동안 책의 하이라이트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지에 맞닿아 있어 나는 이 책을 읽다가 피로만을 느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만 마음에 들었던 점은 황야의 이리론이었다. 황야의 이리론은 줄곧 나를 괴롭히던 자아분열적 희극을 말끔하게 해소시켜주었다. 나 또한 주인공인 하리 할러처럼 자신의 충동과 고결함을 나누어 스스로를 이해했고, 둘 중 하나가 되기 위해서만 노력했다. 그러나 실제로 ‘나’ 라는 존재는 하나도 둘도 아닌 수 십 영혼의 집합체이고, 그 중에서 내가 원하는 모습만을 나로 인정하고 나머지 충동과 가능성들은 거부하고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하는 장면은 크나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나라는 존재는 평면적인 하나가 아니고, 입체적인 다면체이고 인생이란 희극에서 나는 여러 배역을 품고 있으며 그 배역 모두를 소화할 수 있는 유능한 배우임을 작가는 말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황야의 이리론의 명석한 자아성찰을 제외하곤 작품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그는 변질되었고 고결함을 내다 버렸으니 말이다. 나는 헤세의 변질을 믿지 못해 악으로 이 책을 두어번 더 읽었으나 책은 똑같이 말했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보기엔 작가는 겉 껍질이 변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개종한 것으로만 보였다. 헤르미네를 찔러 죽인 것도 그녀가 원한 일이었던 만큼 너무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작가는 그것을 질타했다. 순진하고 생각이 짧았던 열 아홉 살의 나는 결코 결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책이 내게 계속해서 도움을 줄 것이고, 나는 계속해서 그를 이해하기 위해 도전할 것임은 어렴풋이 인지했다.
시간이 지나 스물 두살이 되자, 나도 책 속의 하리 할러처럼 병들고 허약해졌다. 나는 우울증에 걸렸고, 내가 걷는 길에 더는 확신이 없었다. 내가 걷는 길은 분절되었고, 나는 내 마음 속에 감금되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채로 나는 이 책을 집어들고 읽었다. 막연히 병든 나의 감상이 열 아홉 살의 고결한 젊은이의 감상부터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몇 년만에 읽은 황야의 이리는 여러모로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우선, 하리 할러가 앓는 병이 이해되었다. 광활한 자유와 허무 속에서 질식하는 내 모습이 하리 할러가 앓는 방랑벽과 고뇌와 비슷하게 보였다. 나 또한 내 골방 속에 돌아가 삶의 무가치와 나의 변질, 그것을 올바르게 수정하기 위한 자살 충동을 대면하기 두려웠다. 작가는 나와 마찬가지로 병에 몰려 벼랑 끝에 서있었다.
이렇게 죽음 앞에 선 작가가 발명한 것은 바로 유머였다. 하리 할러와 나는 끝까지 유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할 정신적 성숙으로 향하는 길과 자신의 모순된 행동을 서로 맞닿게 할 수 있고, 모순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유머였다. 그는 그리고 그 고결하다는 자신의 모순을 지적하고 바로잡았다. 고결함에 대한 강박증과 모순을 벗기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유머였으며, 차가운 현실에 맞부딪혀 온 정신이 바스라지지 않도록 완충재 역할을 해주는 것이 거짓말을 비롯한 유머였다. 이로써 그는 조금 더 솔직해졌다.
작가와 나는 영원 내지는 진실, 자아실현을 향해 너무 정직하게 걸어왔고, 그러한 방식으로 영원에 이르려다간 진실의 냉정함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욱이 영원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진실에 집착하는 모습을 버림으로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겉모습과 행동이 어떻든 간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작가와 나는 이로써 계속 영원을 향해 나아간다.
작가는 자신의 자살과 모순을 인정함으로서 모든 수난을 극복하였다. 나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였고, 더군다나 유머라는 것이 진중한 내게는 너무 무거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 또한 계속해서 진실 내지는 영원을 향해 죽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 우스꽝스럽고 엉성한 진짜 모습을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모습이 엉망이여도 좋다. 내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럼으로서 계속 나아가자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솔직히 황야의 이리를 총 네 번 읽으면서도, 아직까지도 그가 말하는 문명 비판이나 마술 극장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다만 그가 말하는 유머가 무엇이고, 영원을 향하는 길이 어떠한지는 이젠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그는 타락한 것이 아니라 더욱 성숙해진 것이었고 나 또한 타협과 변화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목적지로 향할 때 꼭 최단거리로 가는 일이 능사가 아니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목적지까지 빙빙 돌아 갈 수도 있고, 잠시 멈췄다가 갈 수도 있다. 어떤 길이든 결국 목적지로 향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이해했으며,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으나 내게 도움되는 책을 써준 헤세에게 고마움과 동지애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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