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만행과 관련해서 우리는 초중고 내내 그 악랄함을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실상이나 법령, 만주-조선-일본을 잇는 만선일 체제에 기초해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관점 등은 그리 대중적이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하긴 그런 부분들이야 어디까지나 전문적인 성향이 강하므로 굳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일제가 조선을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봤다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임은 틀림없는 만큼 일반 대중들은 그정도만 다들 알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달라야 한다. 그들은 지엽적인 사안 하나하나 꼼꼼히 되살펴가며 역사의 진실, 그리고 본질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역사학자의 의무에 완벽히 충족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본서를 읽고 많은 깨우침을 받았다.

너무 많은 내용들이 나오는 만큼 최대한 러프하게, 그리고 핵심을 위주로 이해할 수 있게 1,2,3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조선인은 1944년 9월 전까지는 징용받지 않았다(이전에도 군이 고용하는 극소수의 예외적 경우들이 있긴 했다). 즉 조선인이 징용당한 기간은 채 1년도 안 되는 기간이었다. 반면 일본인은 1939년 8월 이후로 징병되었다.

2.
그렇다면 이전까지 조선인에 대한 강제적 노동이 없었냐면 그렇지 않다. 1939년부터 실시된 노무동원계획과 1942년부터 실시된 국민동원계획에 기초해 조선인들은 일본 내지의 탄광이나 토건공사 현장에 끌려갔다. 이는 법적으로 징용이 아니었다.
노무동원이나 국민동원은 원래 희망자를 우선시하고 직업소개나 관알선을 기반으로 행해지는 것이었지만 조선에 있어서 그러한 규칙은 무너졌고 면장이나 면 사무소 직원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거나 협박을 받아 울며 겨자먹기로 끌려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3.
왜 조선인은 일본인에 비해 늦게 징용되었나? 징용이라 함은 곧 법적인 강제성을 띠고 있다. 국가가 구성원인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징용하는 만큼 국가는 징용자에 대해 최소한의 대우를 해줘야 했다. 가령 일본인 징용자의 경우 조선인이 주로 간 탄광이나 토건공사와 같이 험한 일터에 가지 않았고 대개 사는 곳 근처의 공장 등 일정한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또한 징용자의 부양가족에 대해서도 국가에서 원호비를 지급하는 등 복지체계가 갖추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해서는 그러한 징용이 이루어질 이유가 없었다. 일제에게 있어서 조선인은 국민으로서 최소한의 대우조차 해 줄 의무가 없는 존재였다. 즉 조선인은 동시기 일본인에 비해 더 심한 강제연행을 당했음에도 일본인이 받는 혜택의 끄트러미조차 받지 못했다.

4.
조선총독부는 일본 내지의 이러한 시책에 반대하는 경향이 강했다(물론 이는 조선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정적인 조선통치를 위한 것이다). 이미 조선 내부에서도 농촌 인원들의 상당수를 만주나 한반도 북부 지방으로 이주시켰는데 더 많은 인원을 내지로 연행한다면 조선의 식량사정에 큰 무리가 갈 것이라는 이유였다. 게다가 최소한의 복지도 없는 강제연행은 남은 가족들의 분노를 자아내 폭동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인은 징용의 대상에서 벗어난 채로 법망의 구멍에서 강제로 연행되었다.

5.
그러나 전쟁이 말기로 치닫자 어떻게든 조선인 인력을 확보하고자 안달이 난 일제는 결국 패전 1년 전, 조선에도 징용을 허락하였다. 즉 조선인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음을 법적으로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따른 대우나 복지에 관해서도 내부적인 논의가 나왔지만 논의는 논의만 한 채 끝을 맺었고 실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결국 일제의 강제연행으로 인한 보상을 받은 조선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이 책의 내용을 대강 요약한 것이다. 책을 번역한 김철 교수는 이 당시 조선인들이 근대 국민국가에서의 서브제트, 즉 국민국가의 법역 안에 존재하는 '국민'이 아니라 그것조차 되지 못하는 이른바 앱젝트, 즉 비체, 다시 말해 법적, 제도적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법이 필요없는 무법적 존재였다고 번역 후기에서 얘기하고 있다.

번역가는 그러한 비체로서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역사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심히 동감한다. 그럼에도 나는 저자인 도노무라 마사루 교수의 주장에 더 마음이 갔다. 저자는 조선인의 강제연행이 과거의 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입할 수 있지 않을까 역설한다.

일제는 일본인이 기피하는 탄광이나 토건업에 조선인을 강제연행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일본 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조선인이라는 불량 집단이 순수한 일본 사회를 어지럽히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이었다. 자신들이 꺼려하는 일들을 대신해주는 만큼 더 대우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학대했다. 어차피 조선에서 데려올 수 있는 노동자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일터의 안전이나 환경을 개선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러나 탄광과 토건업이 모두 조선인으로 꾸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인 하층민들이 더 많았다(물론 그들이 조선인들처럼 항시 감시를 당하거나 감옥숙소에서 생활하거나 상급자에게 폭행을 당하지는 않았다). 즉 조선인이라는 대체인력의 대우를 낮게 해주었기에 그만큼 일본인 하층민들 역시 피해가 컸다.

오늘날의 3D 업종과 비슷하지 않을까. 외국인 불법체류 노동자들과 조선인 강제연행자들의 처지와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은 사뭇 닮지 않았는가. 물론 전자가 후자에 비해 강제성도 없고 더 나은 환경임은 사실이지만 본질적 차원에서 둘의 문제가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최저의 노동자라는 집단을 설정함으로써 그밖의 노동자들 역시 피해를 입고 사회 전체가 병드는 모습은 똑같지 않은가.

예전에 한 선생님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를 향해 과거의 강제연행을 문제삼아 비판한다. 나는 그 비판 자체는 당연 지당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한국은 중국, 투발루 등을 포함해 ILO(국제노동기구)의 강제노동 관련 협약 4개를 모두 비준하지 않은 전세계 여섯 나라 중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적어도 일본은 1930년대 그 모든 협약을 비준하였고 그로 인해 한국의 비판이 국제법상으로도 효력을 지니는 근거로 채택된다. 그런데 21세기의 한국 정부는 정작 한국의 강제노동은 나몰라라하면서 왜 일본 정부만 비판하는가? 그 얘길 듣고 아무 말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과연 2020년의 한국은 일제강점기 강제연행으로 피해입은 희생자들에게 떳떳한 사회이고 국가인가? 나는 이 책을 읽고 그러한 의문점을 지울 수가 없다.

총평 5점 만점의 5점
이유; 내가 역덕에 진지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