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정말 오랜만에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었다.
나의 애송이 시절, 그러니까 내가 글을 쓰고 싶다거나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다는 것을 떠올리기도 전에 접한 책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후로 오랜 공백기를 지나 집어 든 책이었다.
너무 세련되지도 그렇다고 쿠쿠 하게 고리타분하지도 않은 특유의 문체는 자식 모두 출가 보내고 인생 늘그막에 수도권 한 구석 터를 잡고 지내는 도시 할머니의 산뜻한 품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그녀 특유의 문풍으로 인해 내가 수필을 쓰고 싶은 것인지 소설을 쓰고 싶은 것인지 지금까지도 헷갈린 것인지 모른다.
다른 이들이 책을 정독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박 작가의 이야기 풀어나감 방식은 면대 면으로 마주 보고 직접 살가운 이야기를 듣는 것 같으니 말이다.
거두절미하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엄마의 말뚝' , '어른 노릇 사람 노릇'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책 다운 책을 읽었다는 심상이 들었다.
책의 화자는 이야기 처음엔 독자들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는 중반 즈음 내가 자기 품에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자 품에서 마구 흔들어 쥐어놓고는 이야기에 몰입되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내 모습을 보며 실컷 놀리고 품 속에 안아 놓아줄 생각없이 즐기는 것 같았다.
개도국 시절, 급변하는 사회 인식과 붕괴되는 기존 도덕 사이에서 마냥 신 여성도 그렇다고 고리타분한 구 시대 소박데기 상도 아닌 주인공 '문경'은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어쩌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희생적이고 솔직했던 선택으로-)인 해 겪지 않았어도 될 고통과 희생 가운데 몸을 던져 불사른다.
'불사른다'라는 표현 그대로, 처음엔 별것 아니었던 문제들이 그녀 스스로와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기심과 도덕관 그리고 급변하는 사회 인식으로 인해 더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며 주인공의 몸과 마음에 깊은 멍과 치료의 상처를 남기곤 반복적인 정련 과정을 거친다.
작가 박완서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이야기의 구조 톱니바퀴 속에 이것저것 추측을 하게 만들다가도 곧 자신의 넘겨짚음이 더 큰 실망으로 다가올까 무서워 사념을 거두고 그저 '문경'의 앞 날을 축복하기만을 바라는 사람처럼, 약 올릴 부분에선 아낌없이 헤집어 꼬집고 두둔할 부분에선 큰 언니의 믿음직한 포옹처럼 독자를 감싸 안는다.
80년대 후반에 쓰여진 이야기의 배경을 놓고 볼 때, 당시로 놓고 보면 참으로 급진적이고 당찬 시민으로서 박 작가의 면모를 드러냈다고 사료된다.
작가가 줄곧 자신을 소개할 때에 반복적으로 하시던 말처럼 한 가정의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딸이었던 박완서로서 그녀 스스로가 얼마나 정련되고 올바른 정신을 가진 여성이었는지, 당차고 지조 있는 작가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문학적인 사람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던 맛깔나는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