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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와서 할일도 없기에 예전에 대충 읽은 책들 다시 읽는중이에요. 피곤하고 잘 못자서 글이 두서가 없긴 하네요. 지적이나 비판, 또다른 의견은 환영합니다!



눈먼 올빼미를 읽게 된 계기는 우울한 책을 찾던 도중 추천받은 것으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라는 이국적인 배경과 지독한 우울이 담겨있을 이 책은 병든 내게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그동안 내가 읽어본 우울한 책은 인간 실격 정도였으나 내 정신 상태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눈먼 올빼미의 경우, 병들고 아픈 나였음에도 섬뜩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작가의 병은 내 아픔을 비웃고도 남을 만큼 거대하여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겁에 질렸다. 눈먼 올빼미는 작가가 직시하는 죽음을 기록한 하나의 초상화이다. 그는 죽음을 직시하였기 때문에 죽음의 명백함에 눈이 멀고 또 멀어서 눈먼 올빼미가 되었다.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기 때문에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되어 죽음만을 본다. 죽음은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등 뒤에 우두커니 서있다. 그것이 어느 이야기도 가지지 못한 공포를 자아내는 이 책의 가진 가장 큰 마력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크게 서로 유사한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다. 첫 이야기는 검은 옷을 입은 처녀에게 이끌린 화가의 이야기이다. 두 인물은 같은 죽음 내지 삶을 공유하여 당장 무너질듯이 허약하다. 그리고 운구차를 모는 노인이 등장하여 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결해주고 고대의 화병을 건내준다. 고대의 화병에는 그가 사랑한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알 수 없는 와중에 이야기는 두번째 이야기, 고대 도시로 이동한다. 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병든 주인공과 그가 갈망하는 여인의 관계가 등장한다. 다만 이번에는 여인이 그를 거부한다. 주인공은 그녀를 매음녀라고 혐오하면서도 계속 갈망한다.

이야기 속에서 작가 내지 주인공은 언제나 죽어간다. 아니, 정확히는 이미 죽어있다. 인간 실격이 죽어가는 병자가 남긴 글이라면 이 이야기는 이미 심리적으로 온전히 파괴된 작가가 마지막 힘으로 진실을 쥐어짰다는 인상을 준다. 작가는 썩어가는 정신상태가 아니라 치명적인 죽음에 노출되어 이미 살점 하나 없이 깨끗한 백골이 되어 있는 듯한 정신의 소유자이다.
눈먼 올빼미의 이야기는 한 편의 악몽과도 같다. 분별력을 잃고 사물과 사람들을 분간할 수 없게된 눈에 비치는 세상은 온통 서로 닮아있다. 많은 표현들이 끝나지 않는 악몽처럼 끝도 없이, 한 글자 변함없이 반복된다.
책의 시작부터 대단히 조용하고, 음울했다. 마치 탈진한 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이는 것 같았다. 작가는 책의 시작에 이렇게 말한다. ‘삶에는 서서히 고독한 혼을 갉아먹는 궤양같은 오래된 상처가 있다…’ 그는 정신을 갉아먹는 오래되고 아픈 기억들은 결코 치유되지 않으며, 인간들은 서로의 몸에 갇혀있는 존재에 불과하여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되려 상처입히기만 한다고 말한다. 나 또한 그의 마음과 언어가 이해되었다. 건강한 사람들은 정신적 타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병자들이 자제력을 잃고 허약함을 드러낼 때면 사람들은 오히려 병자들을 불쾌해하고 화를 낸다. 또한 사람들은 멀쩡해보이는 놈이 이렇게 미친 생각을 담고 사는줄 몰랐다며 경악한다. 작가는 이러한 현상을 익히 깨닫고 있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이는 엄연한 사실, 그것도 너무나도 날카롭고 아픈 사실이다. 인간은 서로에게 공감이니 뭐니 떠들지만 그것은 정상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다. 각자의 아픔을 지닌 사람들에게 아픔은 서로 이해될 수 없이 답답하다. 그래서 작가는 침묵만을 고수하며 병을 키워갔다. 사실 병든 자에게 남은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고 질병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키우는 일에 중독되는 일도 대단한 일이 아니다.
또한 작가의 정신은 붕괴되어 많은 일에 중독된다. 그가 삶에 중독되었는지 죽음에 중독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하게 그는 살아서 하는 많은 일들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으며 그 이유는 그가 하는 행동들마다 그를 중독시켰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중독 이외의 다른 방식을 모두 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감각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는지, 그는 현실과 격리되어 현실로부터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 작 중 주인공과 같은 죽음을 공유하는 여인들인 검은 옷을 입은 처녀와 비열한 아내인 ‘매음녀’ 만이 그와 함께 현재, 과거, 미래라는 속물식 시간을 따르지 않고 순간만을 인정하는 시간법을 따르며, 같은 죽음을 공유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그와 무관한 존재들이다.
작가는 정상적인 사람들, 원기왕성하고 잘 자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속물’이라 지칭하며 경멸한다. 그들의 살아있음으로부터 그는 소외되어있으며, 그는 비웃음의 대상이다. 그들에겐 자신을 좀먹는 상처가 없어 보이고, 그들은 무지하게도 자신들의 타고난 무관심함으로 주인공을 비롯한 병자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사실 병자들은 존재하는 것 자체에서 고통을 느끼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언제나 사람들이 입히는 기억이다.
작가는 세상에게 소외된 이래로 방어 태세를 취하는 거북이처럼 자신의 속으로 파고들어 자신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의 속도 너무 넓었고, 그는 그 안에서 위축되고 작아져 조그만 아이가 되어 있다.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는 쪼그라들어 있다. 그는 이런 상태에서도 진실만을 추구하고, 그 결론이 바로 죽음만이 진실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 132p. ‘오직 죽음만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가 모든 헛된 상상들을 물리친다. 우리는 죽음의 자식들이며 우리를 속임수에서 구원하는 것이 죽음이다. 생의 한가운데에서 죽음은 우리를 초대하고 자기에게 오라고 부른다. 인간의 언어를 배우지 않은 나이에, 가끔 놀이를 멈추면 우리는 죽음의 목소리를 듣는다. 생을 살아가는 내내 죽음은 우리에게 손짓한다.’

즉,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살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죽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작가는 이 사실을 직시한다.  살아가는 동안 많은 것들이 인식과 속임수에 불과하고 진실인 것을 판단할 감각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는 죽음만을 확신한다.
마지막 장에 이르면, 그는 강탈당한 생명의 부재에 분노하여 사랑하는 아내인 ‘매음녀’를 죽이려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허약한 아이로 전락한 것과 대비되게 아내는 건강한 성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가 뻔뻔스러울만큼 건강하고 아름다운 자기 아내를 보며 왜 자신과 함께 병들지 않는건지 경멸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둘은 본래 허약한 아이였고 같은 죽음을 공유하였으나 이제 아내는 변질되었던 것이다. 이상은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결말을 말하진 않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섬찟한 순환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을 두 번 읽으면서 첫번째 감상동안 두려워 읽기를 주저했고, 두번째 감상동안은 하나하나 필기하면서 조심히 읽어보았다. 내 정신 또한 호전되지 않고 악화되었는지 지난번과 감상이 많이 달라졌다. 지난번에는 두렵기만 했다면 이제는 작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것 같다. 작가인 사데크 헤다야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이 보는 것을 진솔하게 토해내고 사라졌다. 이 이야기는 그가 의도했던 대로 죽음이 무엇인지, 죽음에 다가선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섬뜩할 정도로 세밀하고 정교하게 묘사한다. 죽음에 다가설 때마다 비정상인 것이 정상이 되고, 많은 것들은 거짓말임이 들통난다. 결국 인간은 소외되가며 홀로 죽는다. 작가는 진실만을 말했기 때문에 이 책은 무시무시하고 두렵다. 어째서 이 책의 독자들이 죽음을 선택하였는지 알만하다. 이 책은 죽음을 명백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병든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각을 죽음이 아니라고 발버둥치다가 자신이 이미 죽었음을 깨닫고 죽게 된 것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단순히 자살을 권고하는 책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죽음이 다가올 수록 삶도 작렬한다. 그래서 이 책은 강렬한 색감을 과시하며, 모든 장면들이 작가가 삶에 남아있는 모든 힘으로 엮어낸 맹렬한 빛들로 가득 찬 환상적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장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죽음을 어떤 작품보다 탁월하게 드러냈으며, 정신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가장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여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책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남기고 이만 글을 마치겠다.

- 62p. 폐허의 집들 속에 한 때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을. 그들의 뼈는 오래 전에 썩었고 그들의 몸을 이루었던 원소들은 어쩌면 지금 파란 나팔꽃 속에서 또다른 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134p. 삶은 지속되는 과정에서, 인간 각자가 쓰고 있는 가면 뒤에 있는 것을 냉정하고 공정하게 드러낸다. 누구나 몇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중략) 그러나 늙음에 이르면, 어느 날인가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이 마지막 가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곧 그것이 너덜너덜해지고, 그러면 마지막 가면 뒤에서 진짜 얼굴이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솔직히 읽지마라. 정신병걸리기 딱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