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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책이다. 정확하게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과 공감한 것이 얼마나 옳고 얼마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 일종의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먼저 간략하게 글을 소개하면, 이 책은 중세 판타지와, 그 판타지를 바라보는 SF적인 시야로 구성된 글이다. 미래의 지구인인 주인공은 아직 문명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행성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관찰하는 역할로 파견된다. 관찰 이상의 일, 이를 테면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개입 역시 금지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어차피 그 작은 시도는 곧 훨씬 더 큰 흐름에 파묻혀버릴 것이고, 그것보다 더 거대한 흐름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이는 제국주의적 침략과 다를 것이 없는 탓이다.



주인공 안톤, 또는 돈 루마타가 관찰하게 되는 흐름은 한 나라가 온갖 문화와 학문을 말살하고, 단지 글을 안다는 것만으로 사람을 핍박해 죽이다가 결국 종교적 파시즘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는 흐름이다. 물론 여기에서 쓰인 파시즘이란 말의 맥락은 엄밀한 정의의 파시즘보다는, 움베르토 에코나 여타 식자들이 지적한 바 있는 원형 파시즘Ur-Fascism에 더 적합하겠지만 말이다. 이 과정에서 돈 루마타는 뒤마의 소설처럼 전투와 동맹, 정치적 책략과 배신 등을 포함한 활극을 펼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연기가 아니게 느껴져 고통스러워한다.



읽으면서 조금 곤욕스러웠던 것이, 안톤은 늘 인간에 대한 믿음,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곤 한다. 올바른 지식만 배울 수 있다면, 올바른 환경에만 있을 수 있다면 모두가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진정으로 미워해선 안 된다, 하며. 계몽주의스러운 발상 자체야 어색하지 않지만, 여기에서 지구와 안톤이 염두하는 사상은 공산주의다. 그리고 이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이 작중에서 매우 명확하게 드러난다. 구체적으론, 제8장에서 루마타와 부다흐가 '신에게 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간언할 수 있다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다.



문제는 이거다. 이 글은 실제 중세 시대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를 SF적인 시각으로 냉소적이게 바라보며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미시적인 행동이 거시적인 흐름 앞에서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이야기하는 메타판타지인데, 여기에서 이 SF적인 시각을 독자인 내가 마찬가지로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이를 의도했을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은 재밌고 인상적인 것과 동시에, 내가 전적으로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뭔가 품기도, 밀쳐내기도 애매한 계륵이 되었다.



다만 늘 그렇듯,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동 작가의 다른 두 국내 번역작을 빌려왔기에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이 또한 읽지 않을까 싶다.



이런 예민한 주제의 생각과는 별개로, 다른 고전 SF들을 상당히 연상시킨 글이었다. 제9장에서 주인공과 아라타의 대화는 미래 기술을 마법, 또는 신의 기적으로 보는 원시인의 시각을 부각시켜 아서 C. 클라크의 유명한 구절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해줬다. 또한 이야기의 구도 자체는 어슐러 르 귄의 <빼앗긴 자들>과 같은, 미래인이 과거인을 관찰하지만 개입하진 못하는 구도를 연상시켰다. 이 책의 출판년도를 감안해보면 아마 실제로 양쪽에 어떤 의미로든 영향을 준 글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