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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한강의 소설(이라 써져있지만 사실상 에세이 겸 동화 겸 시 겸 뭐....애매한 장르)인 <흰>을 감상해보려 한다.


30분만에 재독이 끝났기 때문에 허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컴퓨터를 틀었다.




1.


<흰>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나>, 2부 <그녀>, 3부 <모든 흰>이다.


1,2,3부 모두 화자가 같다.


하지만 2부 <그녀>는 본래는 그녀의 언니였어야 할, 칠삭둥이로 나와 태어난 날 숨진 아기를 추모하는 심정에서 그녀였으면 겪었을 법한 일들을 '상상'해서 그녀를 가장한 한강이 쓰는 글이다. 그래서, 아마 이 책의 장르가 굳이 따지자면 소설일 것이다.




2.


<흰>은 사실상 '그녀'를 위해 바쳐진 책이다. 말하자면 그녀를 추모하는 것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그대의 장례식을 치루지 못해, 제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따라서 우리가 소년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이 <소년이 온다>였던 것처럼.


그녀의 세상에서는 타인의 죽음도 자신의 삶의 일부로 편입된다. 그 받아들임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짐승이 될 문을 여는 것이 아닐까? 니체식한테 묻는다면 짐승은 허무라는 이름을 하고 있다고 답할 것 같다.



3.


<흰> 색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시각에서 모든 색을 '드러나게' 하는 색이다.


탄생이 가능하게 해주는 색이 흰색인 것이다. 별 거 없이, 그냥 스케치북을 생각해보면 된다.


그 스케치북에 무슨 색을 넣든 간에, 온전히 색을 드러낸다.


탄생하게 만드는 것, 그 자체로 드러나게 만드는 것, 따라서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거짓없는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제목이 <흰>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검은색이 싫다거나 그녀가 뭔가를 나누어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보이는 것'이 흰색이고 검은색이기 때문에 그것을 나누는 것이지. 한강은 어둠과 빛의 특징을 모두 알고 있으며, 그것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아기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은 기왕이면 흰색인 것일 뿐이다. 우리가 아기에게 오해가 안생기도록 좋은 면만 보여주고 싶은 것처럼.




4.


따라서 <그녀>에서는 한강의 입을 빌린 그녀가, 아니 그녀의 영혼을 빌린 한강이, 한강도 그녀도 아닌 그가, 살아있었으면 겪었을 일을, 그래서 그녀의 삶을 재창조하며(탄생부터 지금까지) 되새김질한다.


한강은 사물을 모두 그녀의 시각에서 보려고 굉장히 노력했다고 한다. 마치 빙의한 것처럼 말이다.


만물이 살아있는 것처럼 대하는 그녀의 조심스러운 자세라고 보면 될 것 같은데,



5.


중요한 것은, 이 추모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녀를 위함이 곧 작가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감정은 사랑에 가깝다고 본다.


재미있는 점은, 한강은 줄기차게 욕망이라는 이름의 사랑을 여러 작품에서 거부해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이 제일 무서워.'




6.


<소년이 온다>, <흰>에서 마침내 그녀는 사랑의 근원을 찾은 느낌이다.


가장 순수한 사랑의 정체.


가엾은 자에 대한 애틋한 감정.


유교에서는 그것을 인이라 부른다.


도끼의 <백치>에서 미쉬낀은 '동정'하고 '연민'할 때만이 천사처럼 공평하게 행동한다.


그리고 대놓고 기독교의 핵심정서라 나오기도 하고.


불교에서는 대자대비라 하고. 큰 슬픔과 함께 하는 정서여야만 우리는 큰 자비로움을 낼 수 있다는 것 아닐지.


말하자면, 여러 주요 종교들이 일찍이 주목했던 정서를,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싸우기 위해 선택한 그녀의 싸움방식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가장 거대한 악에 직면한 그녀가 선택한 인간이 가장 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선물하는 감정.




7.


따라서 그녀는 이제 존재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두 가지를 일치시키려 할 것이다.


애초에 우리는 기만 속의 세상을 산다. 아니, 인간이 기만이다.


이영도의 기발한 최신작(정말 유래없이 기발하다고 생각한다.) <마트 이야기>에서는


"사랑의 묘약이 인간 말고도 다른 종족에게도 통해?" "자기기만을 할 수 있는 종족이면 모두 됩니다."


또한 "나는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이 두 스포일러는, 전자는 잡담에서 나오는 스포이고, 후자는 일종의 맥거핀이라 스포일러도 아니라 생각해서 씀)


이 두 가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불완전한 인식을 타고났기 때문에, 스스로 사랑이라는 자기기만을 한다.


하지만 그 기만을 인정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사랑을 인정한다면


현실(욕망)과 환상(사랑)의 경계가 무너짐으로써, 그 존재는 한층 달라진 인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태극도설'에 보면 '큰 것이 태극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사람들이 크다고 하는 것은 정말 큰 것(태극)이 아니며, 오직 나누지 않음이 정말 큰 것(태극)이다.라는 의미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이제 그녀는 가엾은 존재에 한해서는 자신과 타인을 나누지 않고, 혈족과 비혈족을 나누지 않고, 심지어 생과 사를 나누지 않으려드는 듯하다.


부처는 못되더라도 인간과 부처 사이의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녀의 시도는 사랑과 욕망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욕망은 포기할 수 없다. 욕망을 포기하면, '모든' 사람을 가엾이 여겨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가족이 돌아가는 것과 레바논에서 사람들이 폭발사고로 죽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슬픈가? 그것은 불가능하다.(가능하면 이미 인간이란 소리는 듣기 글렀다.)


사랑과 욕망을 일치시키는 것, 그것을 불교용어로는 자리이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나에게 이로운 일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최소한 '가엾은 자(삶을 잃어버린 존재들과 삶을 부여받지 못했던 그녀의 언니)'들에게는.




8.


최소한 <흰>에서는 이 절절한 고민이 보인다.


앞으로 작품에서 이것이 어떻게 승화될지는 잘 모르겠다.


<백치>같은 작품을 쓸 수도 있지만, 한강의 스타일은 아니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과 같은 스타일을 쓸 거 같지도 않고.


그녀가 늘 그랬듯이 '담담이 보여줌'으로써 저러한 지향이 드러난다면....


그건 좀 내용이 길 수밖에 없지 않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ps.뭔가 많이 횡설수설하게 된 리뷰인데 그냥 그러려니 하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