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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극단적인 도덕률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쾌락은 인생의 중대한 영역을 침입해서는 안 된다.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일부러 함양해 두면서, 그 후에 이렇게 함양된 쾌락을, 엄숙한 생활 양식으로서는 그것에 빠져들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서 금지하는 도덕률을 세움으로써, 삶을 곤란하게 만든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마치 예술처럼 연마한다. 그리고 나서, 쾌락의 맛을 충분히 알게 됐을 때, 그것을 의무를 위해 희생한다. 일본인이 가장 즐기는 조그마한 육체적 쾌락의 하나는 온욕이다. 그들이 매일 목욕하는 것은 청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수동적인 탐닉의 예술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로맨틱한 연애 또한 일본인이 함양하는 ‘인정(人情)’이다. 그들은 아내에 속하는 영역과 성적 향락에 속하는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그 둘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이 두 영역은 모두 다 공공연히 인정된다. 일본인 청년은 부모의 선택에 따라 맹목적으로 결혼한다. 그는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완고한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이는 일본의 남자가 품행 방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남자는 정부를 만난다. 다만 정부를 가정의 일원으로 맞지는 않는다. 정부는 예술을 익힌 게이샤인 경우도 있고, 창부일 수도 있다.
일본인은 선한 정신과 악한 육체를 대립시키는 서구의 철학과 달리 육체를 악으로 보지 않는다. 일본인은 ‘온화한’ 영혼과 ‘거친’ 영혼으로 인간의 영혼이 나뉜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개의 영혼은 모두 저마다 다른 경우에 필요하며 선이 된다. 일본의 사상가들은 인간의 성질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고 자기의 나쁜 반절과 싸울 필요가 없다 말하며, 만일 ‘더럽혀졌다’ 하더라도 더러움은 용이하게 제거되며 인간의 본질인 선이 다시 빛나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일본 불교 사상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도덕률은 경전 속이 아니라 깨달음을 연 청정무구한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하는 것에 있다고 설명한다. 일본인은 의무의 수행을 인생 최고의 임무로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고통을 각오하면서 쾌락을 단념한다.그러한 강한 의지는 일본인이 가장 칭송하는 미덕이다.
일본인들은 ‘인간의 의무의 전체’가 여러 부분으로 나뉜 것처럼 생각한다. ‘충의 세계’, ‘효의 세계’, ‘의리의 세계’ 그 외 등등. 그리고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는 각기 다른 법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여긴다. 특히 서구인에게 보이는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가 그들에게는 선이다.
근대에 들어 일본인들은 천황에 대한 충을 최고의 덕으로 삼았다. 하위의 덕을 모조리 충의 범주 아래에 둠으로써 의무의 체계를 단순화한 것이다. 일본인들의 대절(大節)이란 어느 특정한 개인, 혹은 특정의 주의 주장에 대한 충성이다. 근대 일본인은 모든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한 가지 덕목을 들으려 할 때는 ‘성실’을 선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성실’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률 및 ‘일본 정신’에 의하여 지도상에 그려진 ‘길’을 따르려는 열의라는 뜻이다. 일본인이 그들의 도덕률에 어떤 수정을 가하려고 노력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원자론적이며, 거기서 덕이란 선인 어떤 행동과, 선인 또 다른 행동과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일본에서 자중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묵직한 자아’라는 것이고, “당신은 빈틈없이 그 사태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인자를 감안하여 결코 남으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성공의 기회를 감소시키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일본인들은 “만일 세상이라는 것이 없다면 자중하지 않아도 좋은데…”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런 표현은 자중이 외면적 강제력에 의거한다는 것을 말하는 극단적인 표현이며, 올바른 행동의 내면적 강제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표현이다. 일본인은 때에 따라서는 자기 죄과에 대하여 강렬한 반응을 나타내는 일이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일본인은 죄의 중대성보다도 수치의 중대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일본인들은 어떤 일을 할 때 그와 별개로 자기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훈련은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능력을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상의 것을 주는 것이다. 베네딕트는 후자를 ‘숙달’이라고 부른다.
자기 훈련을 받는 일본인은 전혀 희생 의식을 갖지 않는다. 물론 훈련은 엄격하다. 그러나 엄격한 것은 당연한 걸로 여겨진다. 정신적 훈련 혹은 수양을 쌓아야 비로소 사람은 충실한 생활을 하고 인생의 ‘맛을 음미하는’ 능력을 획득한다. 자기 훈련은 배(자제력이 깃드는 곳)–––배짱–––를 만든다.그것은 인생을 확대한다. 일본인들이 말하길 수양은 ‘자기 몸에서 나온 녹’을 갈아 떨구어 내는 것이다. 수양은 사람을 잘 갈아서 예리한 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가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일본인은 이와 같이 자기 훈련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억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훈련의 달인이 도달한다고 생각되는 심경 중 무아(無我)가 존재한다. 이 말이 나타내는 숙달의 경지는 의지와 행동 사이에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빈틈도 없을’ 때의 체험을 말한다. 숙달의 경지에 있지 않은 사람의 경우, 의지와 행동 사이에 벽이 존재한다. 이 장벽이 제거됐을 때에 달인은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전혀 갖지 않게 된다. 일본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조차 이런 ‘숙달’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일점집중의 태도를 기르는 훈련이 어떤 일을 할 때든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일본의 불교에는 윤회나 열반이란 개념이 없다. 대신 누구나 죽으면 부처가 된다고 말한다. 또한 정신과 육체의 대립도 볼 수 없다. 일본에서는 선(禪)을 가르친다. 전통적인 훈련은 ‘깨닫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장 애용되는 방법은 공안(公案)이었다. 공안은 합리적 해답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공안은 인생의 딜레마를 포장하고 있다. 공안을 생각하는 사람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진퇴양난의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마치 ‘뜨거운 철 덩어리를 삼키려 하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는 ‘철괴를 물어뜯으려 하는 모기이다’ 그는 정신없이 더 한층 노력을 거듭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마음과 공안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보는 자아’의 장벽이 제거된다. 전광의 섬광처럼 마음과 공안이 융합한다. 그는 ‘깨달음’을 얻는다.
‘무아’의 근저에 있는 것과 같은 철학이 ‘죽은 셈치고 산다’는 태도의 근저에도 숨어 있다. 이 상태에 있을 때 사람은 일체의 자기 감시, 공포심이나 경계심을 버린다. 숙달의 수행을 쌓아 부끄러움의 자기 감시를 배제할 수 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제6관’은 장애가 제거된다. 그것은 자의식과 모순 상극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이다.
일본의 갓난아이와 노인에게는 최대의 자유와 제멋대로 구는 것이 허락된다. 유아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결혼 전후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자의대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최저선에 달한다. 이 최저선은 장년기를 통하여 몇 십년 계속되는데, 그 후 자유도는 다시 점차 상승하여 60세가 지나면 유아와 거의 마찬가지로 수치나 외부의 소문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갓난아이는 숄에 매달리는 법을 배우고 3, 4개월이 지나면 어머니의 철저한 가르침 아래 용변 보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단어, 문법, 경어를 어른들과 함께 배운다. 젖을 뗄 때는 어머니들이 젖을 뗀 다른 아이 얘기를 하면서 놀려 댄다. 이렇게 놀려 대서 재촉하는 방법은 다른 경우에도 자주 쓰인다. 이러한 놀려 댐이 아이들 마음 속에 큰 공포를 일으키는 이유는 가정이라는 곳이 안정을 보증하며 아이들의 어리광이 허용되는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훈계와 놀려 댐 외에 아이들 훈육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수단은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어 아이들의 주의를 목적물에서 다른 데로 옮기는 방법이다. 과자를 주거나, 신사나 절에 데리고 가 참배를 시키거나, 뜸질을 시키는 등이 그런 행위이다.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앉는 정좌와 여자 아이의 경우 잠자는 방법까지 배우게 된다. 아이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음담패설이나 욕지거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자람에 따라 그들은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전부 말할 수는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누구에게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또 자기 자랑도 하지 않게 된다.
남자 아이는 열 살 무렵부터 이름에 대한 의리를 배운다. 그들은 상급생으로부터 여러 방법으로 괴롭힘 당하는데, 여기에 대단한 원한을 품고 복수에 열중하게 된다. 군대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한데, 선임으로부터 원한을 갖게 된 병사는 후임을 괴롭힘으로써 원한을 해소한다. 그들은 이런 것을 ‘단련’으로 취급한다.
청년기가 된 사내는 서투른 성행위 솜씨에 두려움을 갖는다.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연장자가 몸소 손을 잡고 지도해 주지 않는 새로운 행동이다. 격식 있는 가정에서는 젊은 부부가 결혼할 때 춘화책을 준다. 청년기 여자는 아이를 낳은 뒤라면 상당히 분방한 에로틱한 언동을 하는 것이 허용된다. 나이를 먹을 수록 성적인 금제를 내던져 버린다.
일본인이 아이를 훈련하는 방법을 보면 그들의 이원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인은 유아기의 특권과 마음 편하던 경험에 의하여 그 후에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때의 편한 생활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천국을 그릴 필요가 없다. 그들의 천국은 과거다. 인간은 본디 선하고 신들은 자애로우며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비할 바 없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유년 시대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했을 때, 미국은 행정 및 재건의 책임을 일본인에게 돌렸다. 이는 대담한 조처였는데 정책적 이득은 명백했다. 7,000만 국민이 존재하는 나라를 다루는 데 있어 시간, 인원, 재력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일본이 불복종적인 태도를 보일 것을 염려했다. 이는 기우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일본인 특유의 성격에서 기원한다.
미국 입장에서 강화조약을 강하게 하느냐, 관대하게 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일본 문화에서는 심한 강권주의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본의 아버지는 배려와 사랑으로써 자식을 대하는 인간이다. 아이들은 아버지와의 사이에 어떤 종류의 참된 우애 관계가 존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또 아버지를 공공연히 자랑스럽게 여기므로 아버지는 다만 한 번 목청을 돋우는 것만으로도 아이를 자기 뜻대로 행동하게 할 수가 있다. 청년기는 일가의 책임을 무겁게 여겨 순종하는 대표자로서 세상의 비판 앞에 서는 시기이다. 그들은 일본인이 말하듯이 ‘훈련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한다. 즉, 아버지는 현실의 인격을 떠난 계층제와 올바른 처세의 상징인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일본 사회의 모든 면을 통하는 하나의 틀이 된다. 그 계층적 지위 때문에 최고의 경의를 받는 사람조차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계층제의 수뇌를 점하는 관리가 실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의 특성이다. 천황을 위시하여 아래에 이르기까지 조언자나 숨겨진 세력이 배후에서 그것을 조종하고 있다. 그러나 가면이 벗겨져 권력의 근원이 드러났을 때는 그것을 사리를 채운 자로 규정하고 그들의 제도에 알맞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인은 어떤 일정한 행동 방침을 위해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지면 ‘잘못’을 범했다고 판단한다. 1930년대에는 군국주의가 일반에게 용인된 수단이어서 그들은 그것에 의해 세계의 칭찬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45년 8월 14일 천황이 패전을 알렸다. 그들은 패전한 사실이 의미하는 일체의 일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미군의 진주를 의미한다. 여기서 자진하여 그들은 전쟁을 포기하는 헌법의 입안에 착수했다. 그들은 하나의 행동 방침을 시도하다가 패했다. 오늘부터는 하나의 평화적인 처세술을 실행해 보자는 것이다. 일본은 군비확장을 하지 않음으로써 경제부국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고, 침략 전쟁을 하나의 오류 및 실패한 주장으로 간주함으로써 평화로운 나라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지위를 갖게 되고자 노력할 것으로 베네딕트는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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