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예전 글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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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64호 1면에 이택광의 〈‘지젝’ 오독은 한국 사민주의자들의 반정치적 경향성〉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은 앞선 호에 실렸던 홍준기의 지젝 비판을 반박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논증이 있어야 할 자리에 주장이, 이론적 분석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도덕적 판단이 들어서 있다면 그것은 반론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게으른 추론’에 의한 글이 된다.이런 의미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12월호에 실린 홍준기의 글은 어디서부터 문제점을 지적해야 할지 난감하게 만든다. 홍준기는 지젝의 공산주의 가설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만, 그가 사회민주주의를 싫어하기 때문에 잘못 되었다는 주장 이외에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한 마디로 지젝 같은 ‘공산주의자’가 “공허한 환상”을 부추기면서 가장 현실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적대시하고 있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준기의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편견에 의지해 지젝을 비판한다는 핑계로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논의 자체를 마음대로 왜곡하고 있어서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이택광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국내에서 지젝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젝을 비판한 홍준기의 글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을 배척하는 글이냐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당초에 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지면을 통해 벌어진 논쟁 자체가 소위 ‘라캉주의자’들 내부에서의 종통(宗統)과 이단(異端)을 가리자는 논쟁에 가깝습니다. 아래는 홍준기의 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63호에 앞서 실렸습니다.
「하지만 지젝이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조금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지젝 이론의 의미에 대해 평가해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유명한 외국 철학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겠는가? 사실 필자를 포함해 여러 이론가들이 종종 지젝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해왔지만 ‘지젝의 인기에 눌려’ 그 비판의 내용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비교적 잘 알려진 촘스키의 지젝 비판을 예로 들어보자. 그의 지젝 비판의 요지는, 지젝의 이론이 한 마디로 너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이론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means nothing)”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필자는 촘스키의 지젝 비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지젝이 앞뒤가 맞지 않는 이론가가 되었는지 촘스키가 제시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촘스키는 지젝이 그렇게 된 것이 프랑스 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필자는 지젝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공산주의라는 틀에 맞추어서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론적,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철학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홍준기는 촘스키의 지젝에 대한 비판에는 동의하지만 그 이유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 홍준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촘스키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촘스키가 여기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프랑스 철학자는 공교롭게도 지젝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라캉이다. 실제로 촘스키는 라캉을 만난 적이 있다. 라캉이 미국 대학을 방문해 강연했을 때이다. 그때 라캉은 네 개의 고리를 가진 보로매우스 매듭을 가지고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과 그의 심리구조를 분석하는 강연을 했는데 아마도 촘스키는 라캉의 강연의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촘스키가 지젝이 프랑스 철학(특히 라캉)의 영향을 받아서 무의미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이론을 전개한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에피소드와 무관하지 않다. 촘스키와 지젝의 ‘설전’의 배후에 라캉이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필자는 라캉의 조이스 분석은 논리적으로 매우 치밀하고 정합적이라고 생각한다. 뛰어난 조이스 전문가들조차도 라캉의 조이스 해석을 대단히 창조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필자가 촘스키의 지젝 비판은 옳지만 그 비판의 이유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요컨대 말하자면, 홍준기가 지젝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가 소위 말하는 ‘라캉 철학’을 제대로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택광이 이에 대해 반론하는 것은, 그가 그것을 제대로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바디우와 함께 현대 사회에 유의미한 지적 도전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초에 어째서 이러한 밀교(密敎)적인 문장들이 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면을 채우게 되었는지도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썩 교양 있다는 대학교육을 충분히 받은 독자들 사이에서도 이것이 그다지 공감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홍준기가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언급한 촘스키의 생각이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촘스키의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홍준기의 생각처럼 촘스키가 라캉의 강연을 이해하지 못 해서 라기 보다도 그게 이해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라캉, 지젝을 비롯한 소위 정신분석의 사상적 계통에 서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 진영 전체에 대해서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이지 못한 ‘인문학’이라서가 아닙니다. 또 그들을 공박(攻駁)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텍스트를 ‘오독’해서도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좌파적 세계관을 가지고 기득권에 위험한 문제의식을 던져서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1) 인문학-과학 논쟁에 대하여
첫째로, 일반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바와 다르게 인문학과 과학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과학문을 각기 이름을 붙여 라벨링 해 놓은 것은 그 학문이 탐구하고 있는 ‘주제’에 관한 것이지 그 방법론까지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면 자연과학이고, 사회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면 사회과학입니다. 앞의 두 글자는 그 대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뒤의 두 글자는 그 연구의 방법을 이야기 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어떻습니까? 사실 종종 발견되는 ‘인문과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전혀 역설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문적인 주제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면 (설사 그것이 자연과학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엄정한 잣대에는 다소간 불충분 하더라도) 그것은 인문과학입니다. 고고학, 언어학 등에서 우리는 충분히 이것을 잘 해오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전반적으로 아직 어렵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 대상이 자연만큼 명징하게 탐구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엄정한 학문적 방법론을 포기하고 해석과 상대주의의 포폄(褒貶) 가운데로 끌고 갈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60~‘70년대를 거쳐 오며 한때는 ‘과학적’으로 보였던 맑스주의의 학문적인 진보가 어려워 보이고, 기존의 과학성을 주장하던 방법론으로도 학문을 하는 데에 한계가 느껴지자 많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분과학문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역사를 해체하라”고 주장하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을 일부 역사학자들이 받아들였고, “세상은 텍스트이며 우리는 주관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라는 주장을 일부 인류학자들이 받아들였습니다. 그 대상이 매우 인간의 고유한 특성에서 발현되는 것이고 복잡한 양태를 보이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론의 적용이 어려웠던 문학 및 미학 분야에서는 쌍수를 들고 이들을 반겼습니다. 일종의 ‘전가의 보도’를 발견한 셈이지요. 사회학에서는 아직도 이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사상적 선배라 할 수 있는 짐멜을 강해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사실 생각보다 많은 분야의 이들의 영향력이 침투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난관에 봉착해 있는 사회과학 및 인문학의 일부 분과들을 구원해줄 deus ex machina로서 찬란히 현신해 강림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 초두와 함께 소련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많은 소위 ‘구좌파’들이 매우 큰 혼란을 겪습니다. 학계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이를 통해서 세상의 불확실성과 기존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재평가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어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즘이 크게 수용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통한 일련의 학문적 실험들은 대체 아무것도 아닌 실패만을 남기고 스스로 후퇴해 가고 있는 국면입니다. 사실 인식론적 입장에서 보아도 이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진리를 상대주의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면 우리가 실제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주의와 주장, 그리고 해석과 상대성만이 남아서 완전히 파편화되는 학문 가운데에서 어떤 진리의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까요? 그 자리에는 자신이 통찰, 심지어는 득오(得悟)했다고 주장하는 거짓 예언자들만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다시 사회과학과 인문학 일부 분과에서도 대세는 계량 및 정치한 과학적 이론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학문의 최전선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경제학과 심리학, 그리고 언어학에서의 성공 사례는 분명히 시사되는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들고 나온 것이 ‘인문학 위기’담론이며, 아직도 이것을 밑밥 삼아서 자신들이 멋대로 선을 그어 놓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으로 대표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그려 놓고 자신들을 학문적 박해의 피해자인양 그리고 있습니다.
(2) 오독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로 향연을 벌여 놓고서 이것을 독자가 알아서 해석하라는 데에 이겨낼 도리가 있습니까. 주장은 있지만 그것을 자기가 검증해서 내어 놓지는 않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너에게 달린 것이며 네가 이것이 아니꼽다면 그건 이해를 못해서”라는 주장은 실은 종교적 논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실 학문이란 논리적으로 자기주장을 검증해서 뒷받침해야 하며, 거증책임(擧證責任)은 그 주장을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기 마련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인간인 이상 100%의 객관성은 답지 불가능한 영역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론은 최대한 이것에 가깝게 가기 위한 여러 가지 안전장치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과학을 통해서 절대 진리를 획득했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근대 이후로 대개의 학문 분과에서 이 방법론이 매우 선호되어 왔던 것은 그것이 적어도 주의주장과 신념의 영역에서 학문을 끌고 나와서 공개적으로 검증 가능하며 상대적으로 믿을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문외자의 입장에서 복잡한 수식으로 가득한 물리학 논문과 라캉의 비유를 함께 받아 보았을 때 그것의 이해 불가능성에서 오는 당혹감은 사실 같은 것이지만, 그 둘의 실제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물리학은 그 학문의 ‘언어’를 익히면 언젠가는 충분히 그 이해에 다다를 수 있고, 더군다나 큰 장점은 같은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다른 학문과의 ‘호환’이 가능합니다. 물리학의 연구결과는 화학에서 사용할 수 있고, 화학의 연구결과는 생물학에서, 생물학의 것은 심리학에서, 심리학의 결과는 다른 사회과학에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지질학의 성과는 지리학과 고고학에 영향을 끼치며, 고고학의 연구 결과는 우리가 역사학에서 이용이 가능합니다. 언어학과 고고학, 인류학 그리고 유전학의 학문적 발전은 우리가 선사의 역사와 인간의 확산에 대한 중요한 이해를 제공하며, 언어학, 심리학, 컴퓨터 공학, 생물학, 철학의 유기적 결합은 우리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 그리고 뇌의 역할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라캉과 지젝, 바디우와 들뢰즈의 주장을 바탕으로 이러한 학문적 발전을 이룩해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라캉의 이론으로 ‘설명’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인류 역사에서 쌓아온 다른 지적 업적들과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창조론자들도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관해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검증 가능한 영역으로 끌고 오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학문들은 통찰을 주는 것,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기본적인 강령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것은 학문을 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소양이지 그것이 목적은 아닌 셈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밝혀내고 보다 많은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한 동기입니다. 자기주장을 명료한 언어로 설명해 내기 어렵다면, 그것을 과연 글쓴이 자신부터 이해하고 있는지 질문해 봐야 할 일이며, 특별히 통찰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소모적인 논쟁에만 사용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칸트니 헤겔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19세기 초반과 21세기 초반 사이에는 두 세기의 괴리가 있다는 점을 먼저 언급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매우 복잡하고 현학적인 용어로 학문을 하는 것이 장점으로 여겨지고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맑스의 글도 초창기의 것을 보면 이러한 영향으로 매우 현학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후기로 갈수록 간명하고 명료한 글을 지향하게 됩니다. 같은 19세기 중반 이후의 시기에 우리가 아는 많은 학문분과들이 과학적인 방법을 확립하고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됩니다. 경제학, 언어학, 정치학, 생물학, 지리학, 심리학 등 각 학문사의 흐름을 살펴볼 때 이 시기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고, 칸트와 헤겔의 철학은 이들의 시대를 일부 예비함으로써 그 역사적 소임을 다 했습니다. 프로이트에 대해서도 같은 면죄부의 발급이 가능합니다. 인간 뇌의 구조와 마음에 대해서 한갓 아는 것이 없던 시절에 프로이트는 자기가 그것을 ‘과학적’으로 탐구한다고 생각했고, 그 때는 내성적인 탐구방법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허용될 정도로 이러한 주제를 보다 정밀하게 탐구할 수 있을 만큼 과학자들과 그 방법론이 숙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프로이트를 전거하면서 연구결과를 쓴 다음에 그것이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수행된 것이라 하면 의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심지어 그 프로이트의 이론을 더욱 괴랄한 방식으로 발전시켜서 자기들끼리 사문난적 논쟁을 하고 있는 소위 라캉주의자들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들뢰즈와 라캉을 아무리 읽어도 우리는 실제로 학문의 최전선에서 지금도 수행되고 있는 지적 업적들에 다가갈 열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한의학을 볼 때도 비슷하게 적용됩니다. 한의학이 기초하고 있는 인식론적 바탕은 음양오행론이지 현대 과학의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귀납 및 연역적 방법이 아닙니다. 때문에 현대 의학은 넓은 국면에서 다른 학문분과와 연결됩니다. 예컨대 역으로 따져 보았을 때, 지리학은 지질학과, 지질학은 생물학 및 물리학과, 물리학 및 생물학은 화학과, 그리고 이들은 다시 현대 의학과 소통합니다. 반면에 포맷이 다르기 때문에 한의학은 지리학과 소통할 수 없고 풍수지리설과 오히려 맞닿게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가 과학이라는 이름의 os를 쓰고 있다면, 한의학은 음양오행os를, 포스트 모더니즘은, 글쎄요, 상대주의os라고 붙이면 될까요. 확실한 것은 매킨토시나 리눅스 용의 소프트웨어를 윈도우 하드에 깔아서 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용을 써 보아도 결국에 우리는 라캉이나 들뢰즈의 하는 말을 ‘다른 학문들에 거울처럼 비추어서’ 명료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3) 포스트 모더니즘이 정치적으로 위험해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가장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매우 정치적으로 좌파적인 사람들이라고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 말에 소위 과학논쟁으로 포스트 모더니스트를 신랄하게 비판한 소칼은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좌파활동가였습니다. 그의 경력에 대해서 구구절절 논하지는 않고 다만 그가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이 지배하고 있던 니카라과에 부려 날아가서 대학교수로 재직했다는 사실 정도만 언급해 두겠습니다. 촘스키에 대해서도 두 번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는 매우 합리주의적 견해와 연역적인 이론 전개, 그리고 인접 학문과의 연관성을 중요시하는 그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모국인 미국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고 정치 참여적인 인물입니다. 역사학자이자 좌파의 지적 계보에 역시 한 몫을 담당하는 역사학자 홉스봄도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비판한 바 있으며, 이러한 사례들을 열거하고자 하면 사실 수도 없이 많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옳아 보이는 주장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학문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식의 비약입니다. 다시 언급해 두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학문적으로 증거 해낼 것인가 하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 심리학, 사회학, 문학 사이를 넘나들면서 숨바꼭질을 하는 것은 전체 학문 발전의 방향에서 보아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젝의 사상이 기초한다는 라캉의 사유도 도대체 무엇을 우리에게 명징하게 보여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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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모가 포스트 모더니즘 줄임말임?
내용은 괜찮은데 제목을 거지같이 써서 굳이 반발심 생기게 하네 ㅋㅋ
나도 부외자로서 주워들은 정도지만 학계에선 수퍼모더니즘, 네오모더니즘이 강성해지고 있다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