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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일기는 그냥 독서의 기록이기에
내 의식의 흐름을 별로 가다듬지 않고 대충 씨부리는(읽어주는 분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껜 미안한 일이지만) 용도이다.
즉 틀린 얘기 엄청 많고 정리도 안 한다.
그런데 오늘 파트는 반갑게도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을 거 같아서 기쁘다.
먼저 저번 파트에서 다뤘던 표현주의의 표현에 대해서 잠시 첨언을 하면
인간 자신의 목적을 명확히 하고, 동시에 그 목적을 명확히 함으로써 또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뭐 그런 나선형적 구조다.
a->b가 아니라 a가 b의 과정이자 a의 목적이 되는, 따라서 점점 a가 강화되기 위해선 '표현'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 같다.
62p~100p
계몽주의에 또 다른 반향은 바로 칸트다.
그는 인간에게 가장 섬세하고 날카로운 자유를 선물해줬다.
계몽주의에서도 자유는 있었다. 하지만 칸트는 그건 자유도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자유는 도덕적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는 다행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앞이 보이는 존재였으면 두려움에 휩쓸려 선택을 했기 때문이랜다. 따라서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에 도덕을 통해 자유를 노래할 수 있다는 인식이 그에게는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덕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가? 도덕적 의지에 의한 자기규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스스로 규정하는 자율성을 따라서 형식(따라서 칸트에게 도덕은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을 획득한다.
말하자면 스스로의 원칙을 지키는 법칙이 되어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행동의 자유가 아니라
환경으로부터의, 즉 이 책에서의 표현에 따르면 자연으로부터의 자유에 가깝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향성(욕망이라고 단순화하자)은 이성에 따른 도덕성과 정확히 상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대개 욕망의 승리로 끝나지만,
칸트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결국 극복되지 못한다.
칸트 자신에게 있어서는 극복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에 따르다 보면 이성에 따르는 게 편함ㅋㅋㅋ'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이황과 이이의 사상적 대립을 보는 듯하다.
사단을 통해, 인간이 선한 존재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한 이황의 논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이처럼 후대의 인물들은 '아...이 양반이 미쳤나' 하는 반응을 보이는데,
칸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후계자들은 상당히 갸우뚱한 모양이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하지만 칸트는 그게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통합의 키워드를 제3비판서(무슨 책인지 모르는데,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상 비판이 아닌 마지막 비판 책인듯?)를 통해 남겨두었기 때문에
그 키워드를 좇는 칸트의 후계자만이 있을 따름이다.
칸트의 자유는 '분리'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당시 통합을 추구하던 흐름에 따라
스피노자가 칸트에 끼얹어진다(칸트가 주도권을 잡은 것은 그의 사상 자체가 당대에 매우 매력적이면서도, 통합의 키워드로 보이는 책을 남겼기 때문으로 보임)
우리(현대의 우리들도 포함해서)는 칸트의 분리를 지지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 보여진 행복한 종합으로서의 유토피아를 거부한다.
이 분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사유 이성 도덕성 vs 욕구 삼성
자기 의식적 자유(칸트의 자유) vs 공동체의 삶
자기 의식 vs 자연과의 유대
칸트의 주체 vs 스피노자의 실체(신 즉 자연= 하나이자 만물)
따라서 칸트에 이르러서는 일단 주체를 긍정하고(칸트에 이르러서야 확실히 마이 프레셔스가 된듯하다)
또한 전체와의 통합을 기대했던 듯하다.(즉 주체라는 개념은 시대에 따라서 계속 변해왔다는 의미)
칸트의 후계자들은 그의 미흡했던 부분 두 가지를 자꾸 건들게 된다.
하나는 그가 물자체를 알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투쟁할 때만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앞서 도덕을 따르다 보면 계속 따르는 게 쉬움이 이 말임)
일단 물자체를 알 수 없다. 즉 사물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없다는 것에 야마 돈 피히테, 실러, 셀링, 낭만주의 세대들이 있음은 물론이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는 이유는 어쩄든 실패했기 떄문이다.
피히테가 칸트의 이론을 넘어서려고 노력하였지만, 칸트의 이론을 더 섬세하게 만들었을 뿐이고,
후대의 인물들은
피히테와 스피노자를 결합하여 어떻게든 다른 활로를 뚫어보려 하지만, 결국 '고대 그리스의 종합'으로의 회귀하는 수준에서 멈춘다.
의미없는 시도는 아니지만, 목표했던 바는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합하려 애썼고 결국 통합했다는 평가를 받을 유일한 인물이 바로 헤겔이다.
그가 제2의 칸트와 비슷한 종합의 이미지가 남은 것은
그가 실제로 그 비슷한 작업들을 했거니와
칸트가 남긴 유산으로 칸트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칸트가 남긴 유산은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추론해내는 것인데
헤겔은 마찬가지 사유를 통해 우리가 자연과 통합하기 위해서는 '자연은 대충 우리랑 유사할 수밖에 없다'라는 답을 내놓는다.(이런 엿같은 표현을 써놓는 건 내 그 표현을 필기에 적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이 될 수 없으나, 인간은 자연을 목적으로 할 떄 자아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이 시도하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되어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고
앞으로 다루는 내용도 복잡해질 것 같다.
헤겔에 의하면 궁극적 종합은 통일뿐 아니라 분리를 포한한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걸 설명하는 게 다음 챕터에서 계속 나올듯 하다.
읽을수록 찰스 테일러는 헤겔에게 상당히 경도되어 있어서
우리가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읽을 때 그가 플라톤에게 치우쳐져 있음을 경계하듯이
헤겔빠스러움을 다소 경계해야될 필요는 있을 듯.
오늘 쓴 내용은 칸트가 분리를 긍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그러면서도 많은 종합에 대한 노력이 있었지만 다 실패했고
의미있는 종합의 노력이 헤겔에 의해 이루어졌다.
라고 정리될 수 있겠고, 뉘앙스를 전해줄 필요가 없던 건
어쩄건 헤겔과는 다른 내용들이 많아서 대략적인 걸 옮겨도 큰 문제가 없을 듯 하여 그렇다.
딱 하루 한 절씩만 읽는 걸 목표로 하고 있음. 대충 10p 조금 넘는 분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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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 꼐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