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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실재에 대해 철학자들은 나름대로의 통찰을 제시해 왔다.
칸트는 '물자체', 우리와 독립해서 저 바깥에 존재하며, 우리 지각에 의해 왜곡되기 이전의 현실이라 하였으며
① 프로이트는 상상적 차원에 있는, 이미지 자체를 삭제하는 끔찍한 원초적 이미지라 하였으며
② 구조주의자들은 무의미한 공식의 실재로 변형된, 인간적 의미가 완전히 제거된 언어라고 하였다.
그리고 라캉은 여기에 세 번째 실재로서, ③ '평범한 대상을 숭고하게 만드는 불가해한 어떤 것', 대상 a를 추가했다.
"슬픔의 실체는 저마다 스무 개씩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슬픔 자체처럼 보이지만 슬픔은 아닙니다.
슬픔의 눈물에 젖은 눈에는
하나의 실체가 여럿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마치 정면으로 응시하는 관점에서는
혼돈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만 보이지만, 비스듬히 보면
정확한 형체로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왕비님께서도 국왕 전하의 출발을 비스듬히 보셨기 때문에 눈물 속에서
국왕 자신보다 더 잘 슬픔의 형체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 형체는 슬픔의 실체가 아닙니다."
《리처드 2세》, 2막 2장 14~24행 중
라캉 이론에서 '욕망의 원인이 되는 대상 a'란 개념이 있다. 이는 평소에는 오히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자신이 어떤 대상을 욕망할 때에야 그 욕망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를 명쾌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우울증 환자의 예에서다. 우울증 환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욕망)을 성취하지 못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성취했는데도 욕망의 원인을 상실하여 무력감에 빠지는 것이다.
소위 '인문학의 우울질'은 바로 이에서 비롯된다. 어렴풋이 대상을 충족한 듯 보여도 정작 원인 모를 욕망이 해갈되지 않아 반쯤 탈진과 상실 상태에 있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왕의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는
텅 빈 왕관 속에 죽음의 신이 도사리고 있다.
죽음의 광대가 세력을 장악하고 왕의 영화를 비웃고 있다.
한순간 왕으로서의 일장춘몽을 떠올리게 하면서
왕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눈짓 하나로도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마치 생명을 지켜주는 육체도 난공불락의 성인 양
헛된 자만심으로 부풀게 한다. 그렇게 부풀게 해놓고는
마침내는 죽음의 신이 나타나서 작은 바늘 하나로
단단한 성벽을 뚫으며 말한다. 왕이여, 안녕히 가시오"
중고등학생 교과 수준에서 리처드가 깨닫는 건 '왕의 카리스마가 없어진 평범한 인간의 삶을 배우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극의 진짜 교훈은 이런 각성이 궁극적으로 수행하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리처드가 '아무것도 아님의 그림자'로 인식하는 '왕의 대권'을 놓았을 때 그에게 남는 건 평민이 되는 현실이 아니라 혼돈의 무nothing이다.
왕관 속의 죽음의 형상은 단지 죽음이 아니라 공허로 되돌아간 주체 자신이다.
라캉에게 실재란 궁극적으로 탈실체화된 것이다. 실재란 상징적 네트워크로의 포획에 저항하는 외재적 사물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이다.
(굳이 리처드 2세의 예시에서 들자면 실재는 '차 떼고 포 뗀 인간 리처드'가 아니라 현재의 '(갈팡질팡하는)리처드 2세'란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의 주요 발상은 물질로 인해 공간의 휘어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이는 다음과 같이 전환된다. '물질이야말로 공간의 휘어짐의 효과다'
라캉은 이에 착안하여 실재―사물―는 상징적 공간을 휘게 만드는(그 안에 간극과 비일관성을 도입하는) 부동의 현존이라기보다는
간극과 비일관성의 효과(결과)라고 주장한다.
라캉에 따르면 실재를 상상계에 한정하여 파악한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치료는 상기 내용을 정반대로 파악한다.
프로이트는 유명한 환자 '늑대 인간'의 분석에서 환자가 한 살 반이었을 때 부모의 후배위를 목격한 게 외상적 사건이라 한다.
실은 그 장면은 아이에게 분명한 의미를 갖지 못한 사건이었는데
몇 년이 지나 아이가 '애는 어디서 나오지?' 하는 질문에 강박되어 유아적인 성 이론을 형성하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장면은 다시 불려 와
섹슈얼리티의 신비를 간직한 외상적 장면으로 이용된다.
기원적 사건은 상징적 곤경에 불과하나 외상적 사건이 의미 세계 내의 간극을 채우기 위해 다시 불려 나온 셈이다.
사회적 적대의 실재에서도 이는 똑같이 적용된다.
파시즘의 색채를 띠는 집단이 '내부'와 '외부'를 나누기 위해, 가치 중립적인 과거의 사건을 반사회적 반인륜적인 사물로 고양시키는 장면을 우리는 숱하게 본다.
이때는 대립의 양상마저 바뀌어 버린다. 나라 안의 의견 차이에 따른 갈등은 어느새 국민(민족) 대 비국민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된다.
- 『HOW TO READ 라캉』(슬라보예 지젝 著, 박정수 譯)에서 간추리고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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