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사상은 표현이론에서 비롯된다.
표현이론은 그 자체로 이원론의 극복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론에 더불어 존재가 형상이 되었을 때, 미처 알지 못했던 속성이 명확히 된다(=표현)고 말했던 것이 표현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이원론이 뭔지 갑자기 궁금해질텐데, 걍 정신과 물질이 따로따로다...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론 자체가 물질 없이 정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거기에 더불어 표현이 끼얹어진 형태로 보면 된다.
표현이론의 특징으로는 또 말에 대한 특징이 있다.
그 이론에서 말은 기호이며 매체이다. 기호는 무리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반면 매체라 하면, 매체 형태가 삼각형이면 삼각형 표현이 나오고, 사각형이면 사각형 표현이 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표현은 매체(말) 없이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문학작품으로 보면, 그 작품이 번역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본질적 왜곡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 없이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것은 또한 반이원론적이다.(언어=물질, 생각=비물질)
꿈에서 나오는 외국인과 외계인의 말들은 모두 한국말 아니었나? 라는 거다.
우리는 즉 합리적 동물로서 또 표현적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사유를 통해 매체 속에서 표현하는 그런 존재이며
이것을 필연적 체현이라 한다.(라고 테일러는 부르기로 한다.)
따라서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처럼 '기능하는 단일체'이지 복잡한 기계가 아니다.
이원론적 사고관에서 비롯된 기계론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일화가 있는데.
니체는 미치기 직전에 마부가 채찍질하는 말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ㅇ으아아아아아아앙 이게 다 데카르트 떄문이야"
말을 생물체로 보지 않고, 우리가 좀 이해하기 복잡한 기계로 봤기 떄문에, 막 다뤄도 된다, 그래서 마부는 죄책감 없이 때릴 수 있는 거고, 데카르트 이 나쁜 쌔키!!하면서 니체는 미쳤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둬야 할 것은, 당시 사람들의 감성은 우리의 감성과는 사뭇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뭔가를 규정하면 그것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던 게 그 시절의 정서가 아니었을까? 인간 보고 인간이 아니라고 해서 벌어진 아우슈비츠 관련 문제도 비슷하고, 어쩌면 지구상 어디선가는 계속 벌어지는 일일 수도 있고...
기능하는 단일체라는 것을 이끌어낸 이유는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 자기와 환경을 설명하는 능력'이 있기 떄문이란다. 이것을 지성의 원형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생명체는 행위자의 본성에 있는 어떤 것으로서, 생명체라는 그 껍질이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있는 발전 노선을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요컨대 우리 존재를 보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삶과 의식 사이의 연속성도 존재한다.(앞은 우리와 생물체 사이의 연속성)
이 점부터가 중요하다. 어쩄든 우리 존재라는 것은 뭔가와의 연대를 통해야만 멀쩡히 살 수 있다는 뜻이다.(외부로 보면 타존재, 내부로 보면 여러 가지 속성들)
헤겔에 따르면
낮은 종류의 삶은 주체성의 원형이라 한다. 즉 우리는 더 낮은 삶을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삶을 추리해낼 수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고등동물은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표현적 삶을 원한다고 한다. 머 잘 모르겠지만, 흔히 사람들이 최고의 위치에서 타락하는 걸 보면 사람이 어떤 높은 위치에 올라가기 보다는 그 높은 위치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게 더 어렵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이 표현적 삶이 아닐까?
이러한 '위계'는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생명체 뿐만 아니라, 무생물에게까지 이르게 되는데, 무생물을 통해 추리를 해서 생명체의 삶을 알 수 있고 생명체의 낮은 정도를 통해서 또 알 수 있고 이런 식이다.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물의 속성을 봤을 때 어쩌고 저쩌고 인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인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까지는 표현주의에서 헤겔이 영향받은 정도고
여기에 칸트 관념론이 끼얹어지게 된다.(글 쓰는 사람은 칸트와 헤겔을 일부러 학부생 내내 피해다닌 훌륭한 양아치였다=관념론이 뭔지 모름)
사유는 필연적으로 자연과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불화는 결과이다.
여기서 몇 가지 위계가 더 나올 수 있는데,
꼴을 보아하니 삶을 형식의 위계를 넘어서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유 양식의 위계이고, 사유 양식의 위계를 넘어서서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표현 양식의 위계라는 것이다.
표현->사유->삶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삶을 관찰했을 때 사유의 영향이 있고, 사유를 관찰했을 때 표현의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앞서 언어에 대한 표현주의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언어가 사유를 결정하므로 표현의 위계가 나오는 것이다.)
굳이 위계라는 표현이 쓰인 이유는
더 높은 삶이 더 낮은 삶을 더 좋게 표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얘기하면 낮은 삶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추리해낼 수 있다.(이런 사유는 칸트의 영향일까? 칸트를 잘 몰라서.)
합리성(대립)이 도착점이라는 사실은 인간이 역사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역사는 무엇인가?
'명료함에 이르기 위해 인간은 여러 낮은 단계들과 보다 왜곡된 의식들을 관통해 가면서 자신의 길을 분투하며 나아가야 한다. 원시적 존재로 출발하며 문화나 오성을 고통스럽게 그리고 서서히 습득해야 한다.'라는 문구를 봤을 때 우리 역사가 발전해나가는 과오를 반복하며 천천히 조금씩 진보하는 그것을 빗대어 말한 듯하다.
그리고 이 고통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생명체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괴로운 것조차 우리가 생명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니 괴로워할 이유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인데, 묘하게 불교냄새가 난다.
그러나 삶의 과정은 충동(쎼에에엑쓰)에 의해서 지배되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잠재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내적 분열과 노력이 필요하다.(고통을 긍정, 시간이 필요함을 전제)
따라서 경험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자양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더 나은 표현을 위한 문화를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는 문화의 단계가 계속 올라갈 수밖에 없다.
주체가 자신/타자와 맺는 이중성이 가능한 이유는 이런 내적 복잡성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자연과 주체는 서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으되 오직 같이 존재할 수 있다.(전 시간에 말한 거)
따라서 주체가 생각하는 타자는 오롯한 타자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타자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앞서 우리의 존재를 통해 설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에 따르면 우리의 존재 생김새를 보고 우리의 발전방향을 가늠할 수 있으므로.
이것은 헤겔이 봐도 모순이다.
그러나 동일성과 대립은 서로를 지지한다. 하지만 한 측면이 충동, 욕망, 등 존재의 한계로 이한 실존 조건들에 기초한다면
다른 측면은 주체가 시간 속에 도달해야 하는 주체의 실현에 대한 요청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두 관계를 시간을 매개로 해서 서로 연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책의 표현은 시간의 패턴, 왜 패턴인지 모르겠어서 매개라는 용어를 씀)
헤겔은 이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 이성과 오성의 용어를 양분하였다.
이성은 우리가 '더 나은 존재'가 된 이후의 관점에서 분리와 대립을 다룬 단어라면,
오성은 재통합 이전에 주체를 확보한 우리가 가지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즉 같은 뜻을 가진 단어라도, 자신이 볼 수 있는 위치에 따라서 그 용어의 정의가 달라지므로 그런 식으로 나뉜 것 같다.
동양에서 수행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면이 있는 거 같다.
내일 쓰려했는데 걍 좀 멀쩡해져서 마저 씀.
지금까지로 복습이 끝나서, 진도는 좀 더 천천히 나가게 될 거 같음.
복습이 끝나고 나니 말하자고자 하는 뉘앙스 정도는 파악이 되네.
독갤의 헤겔 빌런. 힘내서 마스터해서 요약좀'
요약 정리 안하려고 일기 쓰는건데
하나씩 읽고 조금씩 주워감 ㅋㅋㅋㅋㅋ
헤겔은 철학도전의 정준하 포지션
자네 글에 1~4번 링크도 달아줘어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