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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모스크바 등등 전세계의 대도시 위에 거대한 외계 우주선이 나타난다. 이들은 지구를 침공하거나 인류와 전쟁을 할 생각이 없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인류의 수많은 병폐를 없애는 것을 돕는다. 핵미사일조차 흔적도 없이 증발시킬 정도로 우월한 과학1력을 지닌 이들은, 사실상 인류를 정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으며 동시에 스스로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 기이한 관계를 유지한다. 과연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과연 인류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01. 그야말로 고오오오오오전 SF


SF라는 장르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서 클라크와 아이작 아시모프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둘 다 시대를 뛰어넘은 고전 SF 소설들을 여럿 집필한 명작가들인데, 보통 흔히 고전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렇듯이 2020년이나 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름은 아는데 읽어본 적은 없는 작가 정도로로 알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고전들이 그렇듯이, 이들의 소설은 후대의 작품(작품의 형태를 가리지 않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심지어는 아예 한 장르의 기원이 되기까지도 했다. 그리고 이 책, <유년기의 끝> 또한 그런 정의가 정확하게 적용되는 작품이었다.

책의 서두에는 2000년에 새롭게 쓴 작가의 서문이 있는데, (보통 고전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들이 그렇듯이)꽤나 오래 전에 활동하던 작가로 알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 막연하게 이 소설도 그렇게까지 오래되진 않았나 보구나, 70~80년대 즈음에 쓰여졌나? 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책의 도입부가 소련과 미국의 우주 탐사 경쟁을 다루고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책을 전부 읽은 후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첫째로 2000년도 서문이 있던 이유는 단순히 작가가 90살이 넘도록 장수해서였으며, 둘째로 이 책이 쓰인 년도는 무려 1953년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70년은 지난 시간이었던 것이다. 즉 이 책의 도입부는 쓰인 시점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쓴 것인데, 21세기의 독자의 시점에서는 그저 과거의 사건을 인용한 것이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놀랍도록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 것이다. 과연 고전이 고전인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전의 정의를 이렇게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독자에게 다가가는 작품이라고. 2020년의 한국인이 2020년의 한국 소설에 공감하기는 비교적 쉬운 일이다. 그러나 1920년의 한국 소설이나 2020년의 파푸아뉴기니 소설에 감동하는 것은 그보다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유년기의 끝>1950년대의 시점에서 한 미국인이 상상한, 정확히 묘사는 안 되지만 확실히 2020년보단 앞선 미래의 시점까지 다룬 소설이다. 그것도 초월적 외계인이 등장하며 인류의 종말이 등장하는. 이런 작품이 2020년의 한국 독자에게도 충분한 울림을 주었다면, 분명 고전의 정의에 적합하다 할 수 있겠다.

사실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조금 신기했는데, ‘고전답게 워낙 유명하다보니 줄거리는 몰라도 결말은 대충 알고 있었건만 읽는 내내 그것이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흥미롭게 탐독했다는 것이다. 유명하고 오래된 작품들은 사실 워낙 자주 응용되고 변주되기에 정작 그 핵심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원본을 보면 생각보다 담백해 심심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첫째로는 원본인 이 책부터가 상당히 담담하고 담백하다보니 시간의 흐름에 풍화되더라도 읽는 재미가 크게 줄지 않은 것과, 둘째로는 그러면서도 거대한 이야기를 이어주는 중간의 작은 이야기들이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독자의 흥미를 끄는 영리한 플롯들이었기 때문이다. 미스테리와 수수께끼, 금기에 대한 도전과 비밀의 세계로의 모험은 언제나 효과적이다. 게다가 거기에 충격적인(동시에 “I am your Father.”만큼이나 유명해져 그 때 그 독자들이 느꼈을 충격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쉬운) 반전까지.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02. 씹덕쉑 또 지들만 아는 걸로 신났죠? (이런저런 잡다한 스포 함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유년기의 끝>의 핵심 소재는 바로 인류라는 종의 진화이다. 승천이라고 해도 좋고, 종말이라고 해도 좋으며, 멸종이라도 해도 좋다. 모두 알맞은 표현이다. 종 자체가 새로운 종으로 거듭나기에 진화이며, 신적 존재로 승화하기에 승천이며, 기존의 인류의 역사가 끝나기에 종말이며, 인간이라는 생명체로서의 종은 사라지기에 멸종이다. 모든 인간이 육신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하나의 거대한 정신체로서 합일되는 것. 그것이 인류의 새로운 형태이며, 이 책의 제목인 유년기의 끝이기도 하다. 이러한 설정을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개체의 소멸과 하나의 정신체로의 합일을 통한 진화라는 설정은, 그 뒤로 정말 많이 사용된 대표적인 고전적인 소재니까. 이 설정을 써먹은 작품으로는 게임 <스타크래프트><데드 스페이스>, 애니메이션 <신세계 에반게리온>과 심지어는 한국 판타지 소설 <피를 마시는 새>까지 다양하니까. 내가 지식이 짧아서 그렇지 아마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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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끼 맞음)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오버로드오버마인드라는 이름과 그 수직적인 구도만 가져온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예를 제외하면, 이러한 인류의 진화를 다룬 작품들은 대개 그것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초인이 안배해 놓은 구원으로의 길을 인간의 자유 의지를 내세우며 거부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인 <피를 마시는 새>, 아예 합일자체가 코즈믹 호러스러운 외계 종족의 음모였던 <데드 스페이스> 등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종으로서의 인류의 진화를 가장 핵심 소재로 다루었던 작품은 역시 <신세계 에반게리온>일 것이다.

<에반게리온>에서의 인류의 진화인류보완계획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음모로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서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는 마음의 벽을 갖고 있으며, 이 벽을 무너뜨리고 모든 의식이 있는 생명체를 하나의 개체로 통일하려는 계획이 바로 인류보완계획이다. 이는 인류 바깥의 초월자가 아닌 특별한 지식과 힘을 가진 소수의 인간들이 계획한 프로젝트이긴 하지만, 종으로서 인류 그리고 개체로서의 인간의 역사를 완전히 종식시키고 새로운 단계로 진화한다는 점에 있어선 <유년기의 끝>의 영향이 짙게 드러난다.

다만 <에반게리온>에서 이 인류보완계획을 완전히 부정적으로 바라보냐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에반게리온>은 기본적으로 난해하고,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작품이지만, 감독인 안노가 이 작품을 통해 관객(오타쿠)들에게 상처받을 두려움을 감수하고라도 타인과 교류를 권하고 있다는 건 이제는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해석 중 하나이다. 모두와 하나가 되어 아프지도 외롭지도 않은 세상보다, 상처받더라도 타인이 존재하는 세상을 선택한 신지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인류보완계획의 연출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인간이 오렌지 주스 같은 주황색 액체로 퍽퍽 녹아내리는 장면이며 붉은 십자가로 뒤덮인 지구와 기괴한 형태의 흰 천사와 검은 달 등은 아무리 보아도 그리 긍정적인 장면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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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류의 자몽주스화)

그러나 동시에, 이 장면은 이해할 수 없기에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새로운 인류의 탄생은 즉 이전 인류의 멸종이다. 그것에 대해 현 인류, 즉 구인류인 우리가 두려움과 꺼림칙함을 느끼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 인류보완계획을 통해 형성된 정신체는 기괴하면서도 동시에 자애로운 모습도 보여주며(아마 신지의 어머니의 혼이 큰 역할을 한 것이 원인 중 하나겠지만, 너무 난해한 작품인데다 전문가도 아니라 깊이 설명하기엔 오류를 범할 것 같다), ‘최후의 인간인 신지에게 인류보완을 멈추고 이전으로 돌릴 수 있는 선택권을 주기까지 한다. 이러한 점을 보아 <에반게리온>인류의 진화라는 주제에 대해, 주인공의 선택을 통해 일단 거부하긴 했지만 비교적 중립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편이다.



03.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사실 위에서도 언급한 부분이지만, 현 인류인 우리들의 관점에서 볼 때 <유년기의 끝>이 보여주는 인류의 진화는 꺼림칙한 것이 당연하다. 신인류의 탄생은 곧 구인류, 우리의 종말이니까 말이다. 이를 위한 토양의 준비를 위해 이 작품에서도 인간에게는 거의 전지전능해 보이는 우월한 외계인이 등장해 지구를 유토피아에 가까운 환경으로 만들어준다. 그것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직접도 아니고 간접적으로 이끌어서! 이렇게 좋은 환경이 갖춰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을 아직도 온갖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에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다.

더불어 이 개념을 가져온 후대의 작품에서 종종 비판되듯이, 인류의 진화가 인간이 아닌 타자의 의지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도 문제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스스로를 멸망으로 밀어 넣는 것은 당연히 불행한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완벽한 타자에 의해 행복이 정해진 길로만 밀어 넣어지는 것 또한 그리 행복한 일일지 의문이다. 그 타자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구도가 껄끄럽게 느껴지는 까닭은, 어딘가 자식에게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종용하는 부모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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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좆같잖아)

물론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작가는 이를 시행하는 외계인들을 대단히 자애롭고 친절한 존재로 설정해둔다. 물론 그들의 친절한 태도는 어느 정도는 자신들의 운명을 모르는 하등종에 대한 연민과 정작 그들 스스로는 종족의 진화에 이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뒤섞인 복잡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인류에게 제공한 유토피아는 유사 이래 어떤 인간도 경험하지 못한 정말 인간다운 세상이었다.

과연 이 진화가 진정 인류의 길인지 작가는 보여주지 않는다. 이 과정을 대단히 낭만적으로 묘사하고는 있지만, 작가는 서문에서도 밝히듯 작가와 작품은 분리에서 생각하기를 권장한다. 결국 이 유년기의 끝을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는가는, 이 책을 읽는 아직 유년기의 독자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