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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젤라즈니의 책을 처음 집었던 게 아마 이거였던가. SF라고 하면 <중력의 임무>니 <블라인드 사이트>니 하는 약간은 딱딱하고 보다 전문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글들만 생각하던 내게 이 소설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프로그레시브와 메탈을 즐겨 듣던 한국 음악 애호가들에게 90년대의 얼터너티브가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전에 한 LP바에서 스매싱 펌킨즈의 <Mayonaise>를 선곡했다가 사장이 '구리다'고 하며 껐다는 이야기도 생각나지만.) 상당히 말랑말랑하고 신비스럽고, 더 확실하게는 판타지스러운 SF였다. 그래서 그 뒤로 동 작가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니 <엠버 연대기>니 하는 것들을 읽다가, 더 어렸을 적에 디스토피아 문학에 관심을 갖고 읽었던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도 SF에 속한다, <화성 연대기>가 사실 더 평이 좋은 편이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독서 레퍼토리를 늘려나갔던 기억이 난다.



다시 찾은 <신들의 사회>는 예전처럼 참 재밌었다. 이를 다시 읽으며 느낀 것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치장에 가까운 SF 설정들은 수박에 뿌리는 소금과 같다


아마 여기에서 1세대 인류, 에너지체 종족, 두뇌 기억 분석 등의 어휘들을 빼고 쓴다면, 비록 그 맛이 상당히 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재밌는 신화적 판타지 소설로 남을 것이다. 구조는 판타지 소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얕게 뿌린 소금 같은 설정들, 이따금 커튼 뒤에서 모습을 보이곤 하는 장치들, 그리고 '인용'으로서만 등장하는 선문답과 같은 대사들이 단순한 판타지 소설과는, 기존의 다른 SF소설들과는 또 다른 맛을 낸다.



단순히 '신계의 신들이 하계의 라카샤들과 싸워 이겨 이들을 지옥에 봉인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거기에 과학적 느낌의 용어로 변화구를 줘 '타 행성에서 온 인류 1세대들이 에너지장으로서 존재하는 원주 종족들과의 전쟁을 벌여 이들을 구속했다'라고 말하는 건 근본적으론 같을지 몰라도 자극하는 맛은 전혀 다르다. 실제로 어릴 적에 어린이용 <라마야나>를 읽었을 땐-비록 그것이 모험 판타지 소설에 가까운 구성이라도-<신들의 사회>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의 느낌을 받진 못했다. 아마 이 글과 비슷한 느낌은, 보다 뒤에 나온 글이지만, 댄 시먼스의 <일리움>과 같은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2. 신성/초월성을 연기하는 인물에 대한 SF의 전통


같은 주제를 다루는 SF 소설을 몇 권은 읽었으니 슬슬 이를 국소적인 취향이 아니라 SF라는 장르에서 하나의 소장르라고 칭해도 될만큼 익숙하고 친숙한 소재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최근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신이 되기는 어렵다> 감상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으니 여기에 대한 긴 설명은 생략하겠다. 이 일반인이 교육만으로 신성/초월성을 연기하는 문제는 두 갈래의 다른 방향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내면에 대한 고찰.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것이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이해관계를 어렴풋이라도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베풀면 나도 남에게 나쁘진 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가벼운 상호호혜주의) 인지하며 행하는 것이라면 그게 진실된 의미의 선행이 맞느냐는 도덕의 문제. 우리가 실제로는 도덕적으로/초월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겉으로 행동하는 것은 그렇게 여기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거기에 차이가 있느냐는 문제. 어떻게 보자면 중국인 방 문제와도 통하는 바가 있다. 공교롭게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 작가인 J.M.쿳시와 DFW 두 사람 모두 이 문제를 보다 더 노골적이고 진득하게 잘 파고 들었다. 어쩌면 내가 그 이유로 두 작가를 제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 하나는 현대인이 과거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펄프픽션 장르소설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주제다. 이 주제는 얄팍하게 다루면 소위 착각계나 게임적 대체역사 소설처럼 NPC스러운 지능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현대적 지식에 경도되는 장면을 위해 소모되지만, 보다 더 진중한 손길과 함께 다뤄지면 문명과 정치의 시대적 순환, 지식 발전 분야의 불균형 따위의 고찰과 함께 '현대인'과 그 이전의 사람들 사이의 본질적 차이,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와 같은 질문을 꺼내곤 한다. 거기엔 대체로 고차원적인 고찰이 부족하지만, 순수한 유물론적인 접근과 고찰 역시, 장르 독자로선 꽤나 반기는 편이다.



3. 기존 SF 명작의 재판 가능성?


이건 글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단 좀 메타적인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론 <신들의 사회> 역시 요즘 출판계에 불고 있는 리커버 붐에 살짝 편승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최근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와 단편선이 상당히 매력적이고도 글과 잘 어울리는 표지로 새로 나와 인기를 끌고 있던데, <신들의 사회> 역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화성 연대기>처럼 <신들의 사회> 역시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좋은 글이고, 인기와 달리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책이다. 인도 명화스러운 분위기와 냉랭한 기계스러운 분위기를 섞어서 SNS에 올리기도 쉽게 잘 뽑아낸다면 나름 효자 상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