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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연체는 예나 지금이나 호불호가 갈리는 문체다. 서술과 묘사를 장황하게 표현하는 문체 특성상 간결체에 비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가의 의도를 한눈에 알아보기 쉽지 않음은 물론, 쓰는 사람에게도 가독성과 풍부한 묘사 간의 균형을 쉽사리 잡기 힘들어 난이도나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특히 현대인들은 정보의 범람으로 인해 정보를 판단하는 것보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익숙한 세대이며 앞으로 이러한 추세가 점점 더 심해질 것이 자명하기에, 시대가 지날수록 점점 만연체가 설 자리가 좁아질 것은 예정된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른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만연체는 나름의 수요층을 꾸준히 점유하고 있는 매력적인 문체다. 만연체에 숙련된 작가와 독자의 경우 작가의 의도가 어려운 사족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난해함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음과 동시에 인물의 심경과 상황 묘사가 긴 분량에 걸쳐 매혹적으로 다가온다는 장점만 취할 가능성이 높고, 난해함을 헤쳐나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독자들도 허다하다. 이렇듯 만연체의 그림자는 강렬하지만, 만연체만이 내뿜을 수 있는 빛에 매혹된 독자들 역시 많으며 그 사람들은 그 빛을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탐미하고 추종한다.

 그러나 이러한 만연체로 구성된 책에 함유된 의도의 100퍼센트를 이해하며 즐기는 것은 힘든 일이다. 작가가 추구하는 난해함이 이 고난의 1차적인 어려움이지만, 더 큰 장벽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유명한 문학 소설들은 거진 해외 소설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다. 작가와 독자가 같은 언어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은 최소 한 번은 번역이라는 가공을 거쳐야 함을 의미한다. 만연체의 경우 확실히 이 가공 과정을 거칠 때마다, 유능한 번역가가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작가의 매력이, 특히 운율이라는 분야에서 깎여나가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작가의 고뇌와 창의성이 100퍼센트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는, 적어도 만연체 작품은 외국 문학보다 한국 문학을 선호한다.

 물론 만연체로 쓴 외국 소설 중에서도 저런 가공 과정을 거치고도 한국 소설에 비견되거나, 그 이상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소설도 많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독자가 얼마나 이해하고 흡수할 수 있냐는 의문에는, 적어도 한국 소설이 외국 소설보다 더 가까운 출발선에 서 있음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번에 읽은 김승옥 작가의 단편집은 우리에게 다른 한국 작품들보다도 독자의 이해라는 결승선에 가까이 서 있어 읽기 용이한 만연체 작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민음사에서는 가장 유명한 무진기행을 필두로 10권의 작품을 묶어 한 권으로 출판했다. 이 작품들 사이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부 만연체로 썼음은 물론이고 대체적으로 작품의 허무주의에 입각한 결론과 행동이 많이 나타난다. 무진이라는 환상을 포기하고 서울의 회사로 급히 돌아간 회사원, 술동무가 다음날 자살했으나 그들 스스로가 책잡히지 않기 위해 도주한 청년들, 동경하던 누이의 강간 모의를 돕는, 그리고 키우던 염소가 죽고 그로 인해 알게 된, 친누나가 혐오하는 역무원에게 시집가는 것을 바라보는 어린이들, 과거 높은 대접을 받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못이겨 막노동꾼의 역할만을 수행하게 된 장사와 과할 정도로 시간 엄수를 지키는 집의 객, 허례허식에 잠식당해 부당함을 따지지 못하는 만화가 등이 이 책들에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이들은 극적인 변화를 바라거나 더 나은 미래를 소망하더라도 각자의 이유로 기존의 흐름을 반하지 않고 흘러가는대로 살며 체념하는 과정이 개별적인 소설의 진행 과정이다.

 이 소시민들은 각자가 맞닥뜨린 고난과 처지에 어느정도 저항하거나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등 나름대로의 반응을 보여주지만, 결국 고난에 굴복하거나 만에 하나 저항하더라도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 저항하는지를 마지막에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답보 상태에 빠지는 등 원하고 꿈꾸던 것을 단 한명도 이루지 못한다. 위에 설명한 인물들 중 시간 엄수에 철저한 집에 군식구로 들어간 손님은 원래 빈민가에서 생활했는데, 이런 엄격한 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머지 가족들에게 흥분제를 먹여서 이러한 규칙성을 깨버리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실제로도 감시를 피하고 흥분제를 보리차에 섞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원하던 바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취감이 생기기는커녕 빈민가에 젖은 자신이 잘못된 것인지 그 집안이 잘못된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로 소설이 마무리가 된다.

 그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회에는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모두 부정적인 면모가 물씬 드러난다. 김승옥은 이러한 문제점을 타파하거나 해결할 대안을 제시해 대비시켜 자신이 원하는 세계와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고, 오히려 등장 인물 전체는 물론이고 사회, 도시 생활 등을 모두 부정적으로 묘사해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는 주인공이자 고찰하는 사람의 동요와 소망으로 남겨둬 부각시킨다. 풍경화에 비유하자면 다른 작가들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밝게 그리고 그렇지 않거나 싫어하는 부분을 어둡고 흐리게 묘사함으로써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를 묘사한다면, 김승옥 화백은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흐리게 그리고, 다른 요소들은 훨씬 어둡고 흐리게 그림으로써 전체적으로 어두운 풍경 중 단 한부분에 초점을 둬 부각시키는 특이한 스타일의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근대 소설들은 만연체의 비율이 생각보다 높다. 그 중에서도 유명세를 타지 못한 좋은 소설들이 많음은 짐작되지만, 단편 소설의 다작이라는 범주에서는 김승옥이라는 작가를 이길 자가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위의 작품들 중 한 작품을 제외하고 1960년대라는 한정된 기간에 기대치 이상의 완성도를 찍어낸 작가의 천재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본디 만연체는 천재 작가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 아닌 편견이 있었지만, 적어도 이 고정관념이 오늘은 깨지지 않았고 도리어 견고해짐을 느낀다. 지금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탈고를 하지 않는 작가지만, 지금까지의 활동만을 평가해도 한국 문학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라는 평가가 거두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