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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독문과 학생들은 거진 문학전공이다. 한국외대를 빼고는 독어학을 전공해서 교수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영문과가 영어학/영문학의 벨런스가 그래도 좀 갖추어져있다면, 독문과의 벨런스는 압도적으로 문학에 맞추어져있다. 나의 대학도 그러했다. 커리큘럼이 죄다 문학이었다. 그래서 나도 문학 공부를 피할 수 없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많은 작가들의 이름을 알게되었다. 릴케가 그러하고 카프가가 그러했다. 영문학 졸업한 학생들이 세익스피어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듯, 독문학과를 나온 사람들에게 괴테라는 이름은 무척이나 친숙하다. 괴테의 작품도 읽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나서 실망한 기억이 아직도 남는다. 괴테에 그만큼 큰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독문학의 거두이기 때문에 나의 기대치는 무척이나 컸었다. 반면 별 기대하지 않고 읽었던 카프카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변신은 내가 읽은 단편소설 중 가장 쇼킹한 소설이었다.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사팔뜨기 샤르뜨르 역시 카프카를 고평가했다. 그의 실존철학이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릴케의 시를 줄줄 암송하며 졸업을 했다. 하지만 단연코 독문학을 수학하는 기간동안 '뒤렌마트'라는 작가의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하이너 뮐러의 희곡은 몇차례 교수들의 입을 통해서 언급된 기억이 있지만 뒤렌마트는 귀동냥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스위스 소설가 리얼리즘의 대표격 작가인 고트프리트 켈러의 작품은 이름이라도 알고 있었지만 스위스 극작가 뒤렌마트는 작품은커녕 작가 이름 자체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뒤렌마트가 나의 시선을 훔친 것은 우연이었다. 우연히 이런 저런 논문을 뒤지다가 누군가가 쓴 논문을 본 것이다. 그 논문은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을 주제로하고 있었다. 난 논문을 받아 정독했다. 뒤렌마트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었다. 그의 작품은 현대를 향한 냉엄하고도 준엄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알라딘에서 책을 주문했다. 읽었다. 또 읽었다. 그렇게 그의 희곡 작품의 대표격인 노부인의 방문과 물리학자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 중 하나가 되었다.


뒤렌마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반골기질은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게만들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신을 향해 조소했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었다. 대학시절에는 문학보다 철학에 더 빠져들었다. 매일 매일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며칠 굶은 걸인마냥 탐독하며 소화했다. 그래서 그의 희곡 작품은 철학적 냄새가 자욱하게 풍겨온다. 그는 반은 문학으로 이루어졌고, 또 다른 반은 철학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철학적 작품을 쓸 수 밖에없었다. 그의 반골 기질과 철학적 작품 스타일은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그런 스타일은 다음과 같은 평가로 이어졌다.


"대중(관객)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작가"


"서구에서 가장 폄하당한 작가"


"생전에 가장 투쟁적이었던 작가"


독일 비평계의 거목이었던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다음의 말도 상기해둘만 하다.


"뒤렌마트는 우리를 단죄하고자 내려온 재판관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양심'이다."


이런 뒤렌마트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노부인의 방문]은 그의 작품 중에 최고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의 독특한 그로테스크한 작풍은 이 작품에서도 뿜어져나온다. 그는 [노부인의 방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정의 역시 돈으로 살 수 있는가?" 작품은 전반적으로 정의를 위치던 마을 사람들이 자본의 유혹에 빠져들어 한 사람을 타살-자살로 내몰아가는 내용이다. 정의를 외치던 사람들이 집단으로 살해에 가담하게 되는 이 섬뜩한 장면을 그는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풀어낸다. 왜 희극인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를 풍자하고 적나라하게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비극이 아닌 희극이란 장치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방식으로만이 이 비뚤어진 사회의 정신을 역설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뒤렌마트의 생각이다. 그는 웃을 수 밖에 없는 슬픈 상황을 그려내 관객들로 하여금 오히려 더욱 강렬한 비극의 감정을 느끼게한다. 60세 이전 살아 생전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는 그에 대한 평가가 허울이 아님을 그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세계대전 이후 '인간성'에 대한 문제를 뒤렌마트는 참으로 끈질기게 의문시한다. 유머, 풍자, 그로테스트, 아이러니로 점철된 그의 [물리학자]들은 이와 같은 관점이 명백히 드러난다. 그는 정신병원에 스스로를 격리시킨 세명의 물리학자들을 통해 오늘날 원자 물리학이 얼마나 위험한 절망과 파국 앞에 서 있는지, 또 과학기술에 대한 인간의 책임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150km 강속구로 던진다. 현대 핵물리학은 현대인이 덮어두고 외면하고 있지만 인류 생사를 가르는 피할 수 없는 주제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계속해서 상기시켜주고 있다.


물리학자들의 아이러니는 흥미롭기만하다. 제 정신인 사람은 광인인척하며 세상을 지킨다는 신념하게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정작 미친 인간들은 정신 병원 밖에서 정상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미쳐 돌아가는 현실 세계에 대한 풍자가 이 작품에서 극대화되는데, 사람들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그 중심에 놓인 부조화를 폭로하는 것은 전형화된 뒤렌마트의 특기다. 물리학자들은 서로를 아인슈타인이니 뉴턴이니 뫼비우스니 라고 부르며 각자의 정신병자 행세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열심히 미친척을 하지만 결국 자본의 노예로 자신들이 비밀시하고 정신병원에 셀프감금까지 되어가며 지키고자했던 위함한 핵물리학의 연구 성과를 뺏길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는 과학문명에 대한 뒤렌마트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영웅의 탄생이 불가능한 현대의 대중사회를 향한 조소이기도 하다. 부조리한 법의 압제, 과학 기술과 현대의 윤리 문제, 사람을 옥죄는 냉전체제의 모순, 과학 기술에 대한 인간의 책임감을 그는 극단적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불편해진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불편하다. 그 불편이라는 것은 꽤 아픈 생채기를 우리 정신에 자국 남긴다.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문명은 어디로 향하는가? 정의는 존재하는가? 인간은 도대체 무슨 존재인가?


1969년 베른 주 문학상을 수상한 뒤렌마트. 사람들은 으레 시상식에 참석해 문학에 대해,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을 향해 뒤렌마트가 감사의 멘트를 날릴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문학상 자체를 비판하고 스위스 노동자 문제를 거론하며 사람들을 당혹시켰다. 그는 자신에게 상을 주는 단체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받은 상금으로는 스위스 역사에 비판적인 지식인, 저널리스트들을 지원했다. 사실상 상을 거부한 모양이었다. 참 뒤렌마트스러웠다.


뒤렌마트는 생전에 핵무기를 극렬히 반대했다. 또 사회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968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그라스와 함께 소련이 체코를 침공하자 맹렬히 비판하며 강력 항의 운동을 전개하기도했다. 그는 라이히라니츠키의 말대로 우리의 불편한 '양심'이었다. 또 그는 우리가 외면하고 불편해하는 진실을 말하는데 거침이 없었고, 기어코 자신이 그 역할을 떠맡고자했다.


빵이나 라면을 훔치고 1년 이상을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몇조를 횡령하고도 거대한 로펌을 끼고 변호사들을 대동해 무죄 판결을 받거나 경제인이라는 이유로 기소유예를 이끌어내고 승자의 모습을 짓는 사람들이있다. 우리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그런 뉴스를 볼때마다 뒤렌마트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의 양심과 정의는 과연 자본 앞에서 자유로운가? 뒤렌마트의 이 간단하고도 불편한 질문은 현대인이라는 한번쯤은 숙고해볼만한 질문이다.


어제 소파에 누워 12시부터 2시까지 뒤렌마트의 물리학자들을 읽었다. 다 읽고 그의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이 나의 정신세계에 가득 가득 들어찼다. 무거워진 머리 때문인지 잠이 몰려왔다. 3시간의 단잠의 꿈 속에 그가 나왔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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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자들은 포주가 창녀를 대하듯 전기의 특성을 다룹니다.


- 정의라는건 말입니다, 선생, 사람을 혹사시켜요. 정의에 헌신하다 보면 건강상으로나 도덕상으로 황폐해진답니다. 난 휴식이 필요했지요. 고마워요. 이런 즐거움은 선생 덕이니, 부디 건강하십시오.


- 우리 학자들은 선구자적 작업을 하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오. 우리가 닦아 놓은 길을 인류가 갈 수 잇는지 없는지는 인류가 결정할 문제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물리학자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