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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 변신


 제가 처음으로 접한 실존주의 문학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였습니다. 당시엔 실존주의라는 개념을 무지한채 그저 읽기만 하였지만, 그 덕분에 제가 문학에 입문하게 되는 요인이 됐지요. 실존주의라는 개념은 상당히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기는 하지만, 구태여 제가 이해한대로 설명하자면, 나 자신의 자아를 세계와 연결 또는 매듭을 지을려는 사상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것으론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구로도 내릴 수 있지요.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라는 말을 익히 들어보셨을 겁니다. 인간을 다른 사물처럼 본질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일단 제가 이해한 바로는 이러하지만, 애초에 개념을 내리는 것 자체가 실존주의적 행동에 어긋나는 터라 차라리 철학하는 친구에게 물어보거나 하시는 게 더 이로울 겁니다. 아무튼 제가 이렇게 사상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는 이유는 이번 작품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변신>의 저자 프란츠 카프카는 실존주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작품 집필 당시, 그 때는 실존주의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아 빛을 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작가 사후, 후대에 가서야 재평가를 받은 비운의 작가. 어찌보면 문학계의 '빈센트 반 고흐'라고 할 정도이지요. 오늘은 <변신>에 대해 소감을 밝혀볼까 합니다.

 우선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주인공인 그레고르는 악몽을 꾸다 갑자기 벌레로 변신을 하게 됩니다. 그런 갑작스런 변고를 당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처음에 그는 회사에 대해 불평을 하면서도 그 사장에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니는 걸로 나옵니다. 가족의 생애를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나 벌레로 변신하게 되어 회사에 나가 돈을 못 벌게 되자, 그의 가족들 여동생, 어머니, 아버지가 생계유지로 인해 고생한다는 모습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작 중 진행되면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이 초반에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보살펴주기라도 하려 하지만, 나중에 후반에 가서는 가족들 전부 벌레에 대한 증오와 불편으로 만연하게 되면서 서서히 방치하게 됩니다. 더욱 재밌는 것이 그레고르는 여동생에 대해 애정을 품고 있었지만, 정작 여동생은 가족들에게 더욱 벌레에 대한 위험성을 가족들에게 설파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끝내 쓸쓸히 자기 방에 혼자 변사체로 변하게 되버리고, 가족들은 고생이 끝났다면서 안심을 하면서 이사를 가고, 나들이하러 끝나게 됩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이 작품을 통하여 인간의 소외 문제에 대해 면밀히 묘사하여 보여줍니다. 비록 100년이 넘은 작품일지라도 위화감은 느껴지지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현대에도 이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는 소리일까요? 일단, 이 벌레에 대해서는 시대에 상관없이 현대에 대입을 하면 무엇을 상징하는 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우선 사회적 소외를 받고 있는 사람으로 대입을 할 수 있겠지요. 저로선 치매 걸린 노인이 떠오르더군요. 치매 걸린 노인은 벌레가 된 그레고르처럼 골치를 썩는 문제입니다. 집에 부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여 주로 요양원 위탁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뭐라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자원 봉사자나 열반에 들어간 사람이 아닌 이상, 바쁜 현대인들이 어떻게 부양을 할까요. 자식을 키워준 부모인데도 불구하고 자식은 요양원에 보내는 것이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나, 이해할 수밖에 없는 슬픈 일이 일어나지요.

 장애를 가진 사람은 치매 걸린 노인과 대우가 다르지만 가족들과는 달리 일반인들이 다가서려하지 않습니다. 그저 벌레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최근에 EBS에서 주최하는 다큐메터리 영화 중 이와 관련된 한편을 감상하였습니다. <내추럴 디스오더>라는 영화였지요. 이 영화는 덴마크에 입양된 한국계 지체 장애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지체 장애인인 그는 어떤 연극을 기획을 하여 연극을 제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여러 전문가들에게 자신이 정상인 것과 정체성을 알기위해 취재하는 여러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아직까지 인상이 남는 대사가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철학자의 대사였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지체장애를 가진 분)처럼 변할까봐, 아니면 이미 변해있거나 겁이난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들은 모두 다 벌레가 될 수 있는 하나의 잠재적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벌레가 되었다고 멀리하고 싶어도 멀리할 수는 없는 이유이기도 하죠. 미래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언젠간 일이 생겨 소외를 받게 되고 쓸쓸히 고독사를 할지도 모르지요. 저 역시 그럴지도 모르고요. 벌레를 꺼려하면서도 벌레를 포용할 수 없는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는 언젠간 해결이 될까요.


후기-올린 사진은 제가 읽었던 번역 책입니다. <변신>말고도 <심판(소송)>있었습니다만, 번역이 영 시원찮아 펭귄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제는 날씨가 많이 선선해진 느낌이라 가을이 오고 있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네요. 그렇게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와 한 해가 끝나겠지요. 반론이 있으면 언제든 제기하여도 좋습니다. 글을 읽어주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