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계의 접근인가, 문화 차이에서 오는 관계의 불편함인가? - *

[프랑스 철학이라고, 흥! ]

프랑스 철학을 한다는 이름을 걸고 있을 때, 우리는 주위로부터 자주 다음과 같은 질문에 접하곤 한다. 프랑스 철학은 모호하고(경계가 불분명하고), 내용을 종잡을 수 없고(무슨 개념을 만들어서 쓰는지 모르겠고), 좀더 심하게 말하면 헛된 거짓말(공상)같은 이야기를(담론)을 말하는 것 같다고들 한다. 먼저 철학의 담론이 문학인지 역사인지 예술인지 구분이 없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철학 담론이라기보다 학문간의 영역을 넘나드는 수필 같은 것쯤으로 여기며 개인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또한 수사적 기법 또는 자기 스타일에 빠져서, 일반성도 보편성도 없이 그야말로 독특한(독단적인)하고 특이한 경우라고 하면서 말놀이 빠진 것으로 보이며, 즉 이런 담론도 \'철학한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비꼰다.

프랑스 철학을 한답시고 프랑스 철학 책을 보면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프랑스 철학에서 사람들마다 글쓰기 방식, 담론의 서술 방식이 독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철학자의 책을 읽다가 다른 철학자의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앞선 철학자의 관심과 내용을 가지되, 그 서술의 방식과 용어를 버려야 한다고 느끼곤 한다. 다른 사람의 글을 얼마간 읽다가 보면, \"아하\" 이 저자는 이런 관점으로 저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몇몇 용어를 쓰는구나 하고 느낄 때, 그 사람의 글을 읽는 속도가 빨라지고, 색다른 흥미를 느낀다. 다시 말하면 자기 한계 넘어서(초월해서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느낌에 빠지곤 한다.

이런 경험은 프랑스 철학이 아닌 경우라도 마찬가지이다. 개론적으로 한 사람의 사상, 과거 한 시대에 공유된 사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 한 사람의 특유한 용어 사용법에 대한 깊이 있는 내면적 이해는 일반적 이해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일반적 상식을 넘어서 주석서가 필요하구나, 나아가 주석서가 많은 것일수록 그 사람의 용어와 깊은 내용의 이해에는 문제 거리가 많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개론에서 정리된 것을 읽으면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그 설명을 들으면, 데카르트야말로 중세 철학을 마감하고 르네상스이후의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새로운 방법을 창안한 위대한 철학자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처음으로 방법서설 원문을 읽다가 보면, 이 평범한 글에서 어떻게 위대한 사상의 탄생을 찾아내었는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주석가가 인용하여 따로 강조한 몇몇 구절들을 자세히 본다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구절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작업을 했던 새로운 수학과 물리학의 설명,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의 주체로서 \"나는 생각한다\"로서 자아의 설명 등을 듣고서야 \"아하\"가 나온다.

이 \'아하\'에서 우리는 일반적 상식, 사회적 통상언어, 그 시대의 과학적 방식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 어떤 한 인간이 처한 고유한 경험에 대한 공감을 지닌다. 상식 언어 과학이 같은 궤도 위를 달리고 있고, 거기에 보태서 상품의 기호로서 화폐의 소통도 시대의 지정학적 영역 속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우리는 현상의 정태적 삶을 유지하는 상식을 넘어서, 현재의 삶의 개혁에서는 양식이, 그리고 미래를 위한 현재의 새로운 창조(철학에서 새로운 개념의 창안)에서는 고등 양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욕망(사랑 philo)의 고양이다.

[왜 낯선가? - 당연히... 그럴 수밖에... ] *

우리는 여기서 프랑스 철학의 수용 또는 이해에 대한 문제 중의 하나로 번역의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를 언급하자. 사람들은 번역은 반역이라고들 한다. 번역은 우선 번역자의 이해의 수준과 그 시대의 일반적 수준을 반영한다고 말하고 싶다. 번역자는 용어의 선택에서, 그리고 해석(번역은 해석의 일종이다)의 방식에서, 이미 잘하든 못하든 간에, 주석가와 닮았다. 사람들은 번역자가 사용한 용어 때문에 원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하기보다 어렵게 한다는 불평이다. 사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일반독자에게 그 용어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 저자의 저술들 전부를 읽어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자는 간단하게 정의해 달라고 한다. 프랑스 책들은, 흥미롭게도 또는 우리가 접근하기 어렵게도, 용어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 목록을 책 말미에 달지 않는다는 것이다.

번역자의 이해수준과 더불어 덧보태어야 할 것은 일반적으로 용어를 이해하는 그 시대의 학문적 문화적 수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안타까운 점은 이런 수준에 대한 반성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사실 한가지 말하면 남한에서 전문집단에서 철학 용어 자체에 대한 금기는 없을지 모르지만, 일반적 통용에는 걸림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은 용어에 대한 편견으로 작용하여 내용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낳는다고 본다. 우리가 보기에 이런 현실이 철학에 대한 거리감을 양산했다고 본다. 여기에는 학자의 용어보다 신문의 언어가 더 지배하고 현실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신문에는 이데올로기의 지배가 반영되어있다는 것만을 지적하자.

프랑스 철학 용어가 지니는 내용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은 프랑스와 우리 사이에 사회 문화적 연관이 적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러면, 용어가 쓰이는 그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의 노력하면 된다. 그런데 이런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노력이란 프랑스 문화의 수용에 대해서라기보다, 프랑스 문화의 발전과정에서 프랑스 인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었던 구체적 경험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우리들이 미국문화 또는 앵글로색슨 문화에 젖어 있든지, 전통적 한국문화에서 기준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사회 도덕적 실행에서 지정학적 위상이 있다하더라도, 문제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어느 인간이든 간에)인간들의 구체적 실천에 대한 진솔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성찰에서 선입견을 배제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인간 본성을 발현과 실현을 찾는다는 것이 철학의 중요한 작업이라고 본다. 서로 연관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이미 세계 속에서 고립적이고, 또한 자신도 모르게 배제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 내에서 살아가면서 겪고 있는 어려운 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른 관점을 참조하는 작업 중의 하나가 다른 경험에 대한 이해로서 번역이 있다. 사실상, 번역이란 다른 시각에 대비하여, 우리의 견해를 비추어보는 거울이다. 번역은 거울로서 우리의 모습을 번역의 글 속에 투영하고 있다. 그 번역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모호하다\', \'종잡을 수 없다\', \'환상이다\'라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이런 현상에 대해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을까? 우리는 이 문제를 나중에 반성의 기회로 삼을 것이다.

[접근 통로를 찾을 수 있을까?]

프랑스 철학을 연구한다고 말하는 우리로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먼저 이야기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실 프랑스 철학 책을 읽으면, 책 끝에 용어 목록이 없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마치 다 읽어보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 소설이라도 한번에 재미나게 다 읽고 나서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여러 사람이 한 소설을 읽고 난 뒤에, 각자의 견해를 발표하면,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철학서적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스 철학 개론서를 읽으면, 등장하는 인물의 열에 일곱 여덟은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어렵게 만든다. 전문 철학서를 읽으면, 우리가 개념을 정립하기보다 개념의 범위를 정하지 못하여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또한 문장이 잘 되었다고 하는 명문일수록, 글쓰는 방식에서 동일 술어를 반복하여 쓰지 않아서 같은 내용을 말하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프랑스 철학 책에서 저자가 설명을 위하여 인용한 소설이나 사회현상이 우리나라에서는 이해하기에 어려운 장면들이 많다. 그들에게는 일상적이고 쉬운 경우라도 외국인인 우리로서는 생소한 것들이다. 생각해보면, 한 예로서, 난생 설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하더라도 \'주몽과 혁거세가 그처럼 태어났듯이\'라고 말하면, 그들이 난생설화의 주인공으로 알에 태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이 인물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외디푸스의 설화에도 우리가 아는 것은 외디푸스의 콤플렉스 때문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사실을 알게된 외디푸스가 눈을 뽑고 방황하는 이야기까지 당연하게 알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쉬운 설명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것이라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프랑스 사상에 대해 접근을 어렵게 하는 것은 우리가 프랑스 역사와 문화적 풍토에서 프랑스 사상을 이해하려는 시각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는 우리나라와 프랑스간의 문화교류의 역사가 매우 짧다는 것과 더불어, 프랑스 철학에 대한 연구자가 수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독일이나 영미보다 시간적으로 연구기간이 짧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프랑스의 좌파를 두려워했던 박정희 군사정권이 프랑스와 문화교류를 두려워하였던 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일본을 통해 독일 철학, 세계 2차 대전 승전국으로 들어온 미국의 힘을 입은 영미철학이 지배적인 지정학적 위상에서 프랑스 철학은 강단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철학이 외연이 확장된 것은 프랑스 철학의 연구자로부터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필터(시각)를 거쳐 들어온 (소수이긴 하지만 독일이라는 관점을 통하여) - 일본의 식민지 교육을 통해 데카르트의 관념론이 들어오듯이 - 문학비평 또는 사회비평의 한 장르로서 미국 유행의 한 장면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에 대한 읽기 그리고 관점의 정립이전에, 반성도 없이 이미 앵글로색슨의 색안경을 쓴 사상으로 자리를 잡으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부 소수가 프랑스 사회사상을 수용하려 했으나, 사상의 자유가 없이, 게다가 철학적 반성의 토대 없어서, 담론에 깊이와 넓이를 전개 할 수 없었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결국 사람들은 \'프랑스 사상이 있기나 한가?\' 라고 애초에 부정하거나, 또는\'프랑스 사상, 그것 서양 사상으로 우리에게 맞기나 한가?\' 라고 소극적이거나, \'프랑스 사상 그것도 또한 외래사상으로 우리를 지배하려고?\'라고 거부의 심정을 드러낸다. 한쪽에서는 우리의 지정학적 위상을 풀어 가는데, 뭔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누가 좀 쉽게 알아듣게 설명해 줄 수 없는가?\'라는 새로운 욕구가 있기도 하다. 중국의 한자 문화에 1500여 년, 일본의 문화 100여 년, 미국의 문화 50여 년, 그 지배문화에서 탈피를 하고자 다른 방법은 없을까? 우리로서는 지배문화로서가 아니라, 세계 내에서 다양성의 한 문화로서 프랑스(라틴계)문화로부터 어떤 통로를 기대하고, 우리도 다양성의 하나로 살아남기 위하여 타문화를 타문화로서 이해하려고 시작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이해를 위한 징검돌 놓기]

1) 우리가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로서, \'프랑스 철학의 사조(경향)\'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선 요즈음 많이 듣게되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에 들어가지 전에 간단히 한 세대 앞선 실존주의 사조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물론 여기서는 철학적 내용에 대해여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겠다. 소위 세계 제 2차 대전 전후에 유럽에서 성행했던 철학적 문학적 사조로서 실존주의는 대부분의 문필가와 철학자, 즉 까뮈나 사르트르 등이 인정하고 그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상을 하나의 맥락으로 또는 한 범주에 넣기는 곤란하다. 이 사상적 경향이 어떤 계보에 속하지 않는 것이, 프랑스 철학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이런 전통은 소위 말해서, 데카르트, 꽁트, 베르그송의 전통처럼 대학 강단에 서지 않은 철학자들의 전통이다. 물론 대학은 대학대로 우수한 철학 담론을 생산하였고 현재도 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의 안정성은 여기에 있기도 하다.

이제, 구조주의의 경우를 보자. 세계대전 전에 소쉬르의 언어학에 힘입어, 초기 구조주의자로서 인류학의 레비-스트로스, 신화학의 뒤메질, 기호학의 롤랑 바르트 등이 있다. 이들의 사조가 실존주의에 가렸다가 60년대 후반에 일군의 철학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의 학문분야를 집중적으로 분해하기 하였다. 이들이 방식과 영역은 다르다. 정신분석학을 빌어온 라깡, 맑스주의 역사 철학에 방법을 적용한 알뛰세, 지식(인식)의 계보학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 실천의 함의로서 잠재적 구조를 찾은 푸꼬, 형이상학의 해체를 시도하면서 주관성을 공격한 데리다 등이 있다. 우리가 아는 구조주의는 이 후자들의 경우인데, 이들도 강단 철학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구조주의자라 명칭에 속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들을 구조주의라고 불렀다. 그런데 전쟁 전의 구조주의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후기구조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구조주의 명칭은 학파나 사조라기보다, 편이상 시대구분의 성격이 띨 뿐이다.

이에 비해,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철학적 시대 사조라기보다, 문예비평이나 사회 문화비평의 사조이다. 게다가 이 사조의 명칭은 프랑스에서 불려지기보다, 미국에서 옛 프랑스 문화권에서 사용된 사조의 명칭이다. 사실, 문학에서 또는 문화비평에서 이런 사조의 발생과 발전에는 미국의 문예비평의 경향이 독일의 영향에서 프랑스의 영향으로 이전하는 한 측면이라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미국의 철학적 사조와 프랑스의 철학적 사조 사이의 갈등에서, 미국의 청교도적 정신이 프랑스의 사회주의적인 사조에 대한 거부 반응의 일부라고 본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상적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사회개혁의 원동력과 이 원천에 대한 긍정적 시각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기보다, 미국은 자신의 패권주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회분석 또는 시대 경향(정신성)의 한 틀(도식)만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정으로, 프랑스 사상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이 빠진, 즉 앵글로-색슨의 필터를 거친 뒤에, 우리나라에로 수용은 프랑스 철학의 진면목을 맛볼 기회를 가로막고 있다고 본다. 사실 프랑스의 비강단 철학의 사조는 이미 \'(형상적) 신(창조주)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의미를 넘어서, 68 이후로 \'인간(보편인간, 인간의 이데아)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인간과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의 허상을 걷어내고, 보편 인간 개념의 허위를 프랑스 철학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사실이 프랑스 철학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이며, 앵글로색슨 철학의 관점에서 애써서 눈감은 부분이다. 프랑스 철학에서는 학파나 사조가 있는 것이라기보다, 다양하게 분기(분화)함에도 불구하고, 잠재적인 공통적 기반 위에 공통적 합의를 도출하는 시도로 보인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의 사조 또는 시대성을 말하기보다, 누가 어떤 문제로부터 어떻게 시대의 난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해를 위해 그 철학자의 기반인 개별적 관심을 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베르그송이 스피노자를 평가한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철학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있고, 다른 하나는 철학자 각각의 철학이 있다. 이 하나의 공통기반이 자연(본성)의 생성(창조)이다. 다른 하나는 각각의 위상에서 자신을 발현하는 철학이다. 프랑스 철학은 하나의 생성 위에 자신의 영역의 특이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공시적으로 각각의 철학을 연관지워 보려해도 어떤 틀로도 함께 묶을 수 없을 것이다.

2) 우리가 현대 프랑스 철학의 이해를 위한 도표에서 이미 보여주었듯이, 프랑스 20세기 철학은 이미 어느 지정학적 위상과 다른 철학의 길을 가고 있다고 본다. 소위 형상으로서 신은 이미 죽었다고 말하듯이, 형상으로서 인간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형상은 실재가 아니라 상징(symbole은 수학의 기호와 같은 단어이다)으로, y=ax2이란 기호에서 x에 지나지 않는다. 이 x는 단지 빈자리이다. 여기서 누가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y의 값이 바뀌듯이 x 자체가 어떤 완전한 불변한 무한한 절대적 존재가 아니다. 지금까지 형상형이상학이 이데아에 대한 설명으로 붙인 모든 개념은 검증 없는 또는 실증 없는 거울 속의 허상으로 여길 뿐이다.

형상의 존재에 대한 환상(착각)에서 벗어나서, 구체적 실질존재로서 개인(자아)이 담론의 대상으로 표면에 떠오른다. 이 개인은 자신의 과거의 경험과 미래에 대한 바램(욕망)의 실현에 관련 있다. 한 개인의 어제 자아와 오늘의 자아가 다르다(차이). 그런데 어제의 자아를 무시한다고 해서, 오늘의 한 장면으로서 자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제의 자아와 현재 자아가 어떤 연속성이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대부분은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 사이의 연속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런 연속의 논리에도 차이가 있다. 하나는 공간적이며 다른 하나는 기억적(시간적)이라는 것이다.

형상론자의 논리는 극한에서는 항상 최고의 목적, 최고의 형상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실질론자(질료론자)가 보기에 최고의 목적과 최고의 형상은 과거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다. 형상론으로 보면 자아는 과거자아, 현재자아, 미래자아로 3등분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한 자아로 머물지 않고 현재 속에 과거자아를 지니고 있고, 미래에 (전부가 아니라)일부분을 걸치며 산다. 그래서 자아의 지속을 말하면서, 인간(생명존재)은 무기력한 물체처럼 공간화 시킬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시간존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시간 존재란 공간화된 시간과 어떤 연관도 없고, 기억을 지닌 존재이며 미래에 예상참여하는 존재, 즉 인격(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실재존재, 생성 변화하고 확장 조직화하는 의미존재이다.

형상론자로서는 분명하게 완전하고 불변한 존재로 기준을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질료론자는 이 불변하고 정지하며 완전한 존재를 상정하는 것, 그 자체를 착각(환상)으로 여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부당 전제의 오류, 전제를 해결하지 않고 상정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본다. 프랑스 철학에서는 지지점이 없는 철학을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고 각자의 주장이 만연하면 혼란을 가져온다고 걱정하면서, 사람들은 기준이 없이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고민한다고 한다. 프랑스 철학에서는 루소 이후로 인민이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고, 인민이 주인이 되어 합의를 찾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 민주로서 공화국의 이념은 소외되지(양도하지 않는) 자아가 조직화의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을 사회의 높은 덕목으로 삼는다. 사회는 변하고 개체도 변한다. 그 변화에 따른 그 시대의 조직화는 필연적이다. 프랑스 혁명의 의미는 여기에 있고, 생산양식의 변화에 따른 사회형성체에 창조적(새로운) 조직화의 의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앙드레 로비네는 철학이란 인간(인민)의 어렵고 난처한 처지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하였다.

보편성에 대한 미련을 버린 프랑스 철학은 세상이 단일 성질의 통일체로 이루어 진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피라밑 식으로 일자(형상 신)를 정점으로 이루어진 위계의 세계도 아니라고 한다. 일자 밑(뒤로)에서 줄을 서고 지배체계로 된 세계는 권력과 이익을 행사하는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방식을 뒷바침하는 (지지점을 지닌) 사상은 아버지의 아버지의...의, 그 이상에서, 논리의 극한의... 아버지로서 창조자 아버지를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이 아닌 논리의 극한에 대한 사변을 이제는 개인적 믿음(doxa)이라 간주한다. 이런 독사 속에는 절대 왕정의 봉건성과 자본주의 물신성의 결탁과 더불어, 형상 권력의 음모에 의한 성의 억압과 인민의 억압이 있음을 보았다. 이 음모의 세상은 베르그송 식으로 보면 정태적 사회에 머물고 있고, 이를 신봉하고 교조로서 받들고 있는 신앙(믿음)을 정태적 종교라고 하고, 다른 말로 미신이라고 한다 - 이 미신을 맑스는 아편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현대 프랑스 철학은 이런 정태적 사유를 넘어서, 동태적 사유에서, 즉 근원에서부터 생성과 운동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이질성에서, 출발한다. 이 이질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근원이다. 그래서 다양한 모습들의 현재의 상태들이 곧 평등이다. 평등으로서 공화국의 이념은 인민(자아)의 다양한 발현으로 열린 사회에서, 열린 종교에서, 자신의 모습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베르그송 말을 빌면, 어쩌면 자연이 본성을 발현한다는 것은 개별 인격을 모두를 부처(예수)처럼 만들고자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는 \'예수가 오시네, 오시네\'라고 구복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처럼 인간은 모두 영겁회귀에 벗어날 것이다. 더 이상 다른 것으로 태어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들뢰즈가 니체의 영겁회귀를 보았다.

세기 후반의 프랑스 철학이 형상형이상학을 내버려둠으로서 이 세상에서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욕망을 가졌다고 본다. 꿈의 실현, 소원 성취, 그것을 프랑스 철학에서 \'욕망(désir 에로스)의 실현\'이라고 한다.

3) 이런 몇 가지를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은 이미 프랑스 철학이 경계의 구분을 넘었고 또한 무슨 개념인지도 모를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인간의 삶에서 이미 있었고 있어왔던 것이다. 단지 형상 존재론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는 부분을 긍정으로 되세운 것일 뿐이다.

형상 형이상학에 근거한 자들이 그들의 사상과 삶의 방식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사람들은 서구사상사에서도 여러 번 있어왔다. 고대에서는 인간의 규정을 깃털 없는 몸에 두 다리로 걷는 동물이라고 했을 때, 깃털 뽑은 닭을 강의장에 던지기도 한다. 게다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달리기를 시합하는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는 논증에 대해, 거북이를 데려와 보면 보여줄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여자가 철학을 할 수 없다고 한 사실에 대해, 르네상스시대에 여성이 그 철학자를 말 타고 채찍질하는 풍자도 했었다. 헤겔의 거꾸로 선 철학을 바로 세우는 맑스의 철학도 한 반박이며, 나아가 베르그송의 철학이 고대 철학 이래로 서양철학이 전도된 심리학이라고 방향을 바꾸어보아야 한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 속한다.

데카르트 이후로 상식을 토대로 철학적 체계를 수립하고, 양식이란 이름으로 실천에 대한 학문의 조건을 만든다. 그러나 이런 양식이 한 방향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 생물학 특히 진화론과 심리학 특히 정신병리학(정신분석학)에서는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19세기까지도 어린이나 광기 있는 사람을 철학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아직 미완성이거나 결함있는 존재로서 인격적 자유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루소는 어린이가 자연 즉 본연의 성품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하고, 오히려 사회인이 제도와 권력에 구속된 자로 보았다. 프랑스 20세기 철학은 어린이 광기있는 자 뿐만이 아니라, 들뢰즈에 이르면, \"생후의 살덩이\"도 주요한 주제로 삼는다.

이러한 철학의 담론들은 따라야할 다른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 즉 형상(논리적 용어로 형식)은 논리라는 이름으로 진위를 따진다. 우리는 이 형식 논리가 내용(질료) 없는 외연의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물리적 사실이나 기계론적 사실도 공간적 축소 또는 논리적 환원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 공간적 실험으로 정해진 조건 속에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을 끌어낸다. 그러나 생명 있는 존재에는 논리적 진위나 물리적 설명으로, 설명되는 부분보다 설명 안 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이 있다. 그래서 설명이 아니라, 생물의 사실을 밝히는 것을 논쟁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들뢰즈가 주목한 것은 설명이란 의미를 동어반복이라 보기보다, 이질적 내용의 풀어냄(ex-plicatio)이라고 보았다. 생명적이고 인격적(심리적) 사실은 논쟁거리라기보다, 문제제기이다. 왜냐하면 한 인격이 자신의 권한을 양도하지 않고 살아온 과정(지속)은 생물학적 존재로서 논쟁을 넘어서 고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각자의 고유성(루소의 고독) 때문에, 그 삶 자체를 문제삼을 뿐이다. 베르그송은 생명이자 기억인 인격에 대하여 문제 삼을 때, 철학이 정확하게 문제 제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들에 대해 배제나 소외 없이 철학적 문제제기를 하는 프랑스 철학은 어느 나라 철학적 풍토와 달리 고등학교 철학에서도 프로이트를 매우 많이 다루고 있다. 유일 신앙에서 벗어난 프로이트 입장을 수용한 프랑스의 철학으로 보기에, 형상론에 근거한 기독교 정의를 부르짖는 현 부시의 정책은 한낮 광기에 지나지 않으며, 정신병 환자(psychose) 또는 파라노이아 환자로 볼 수 있다. 형상론의 잣대로 재는 한, 형상론에 줄서지 않는 자는 항상 악이며, 무력에 의한 타도의 대상이다. 그래서 형상 철학을 전쟁의 철학이라고 우리는 본다. 프랑스 철학이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형상론자의 (착각의) 잣대로 타자를 잴 수 없다는 것을 \"구조의 빈 지위\"이라는 점에서도 \"구조없는 구조\"에서도 우리는 보아왔다. 또한 프랑스 철학의 장점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각각이 발언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옹호의 입장을 가진 다수의 급진적 공화주의자(좌파)가 49%나 된다는 점에서 건강하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만큼, 미래에 새로운 형태의 합의체로서 조직화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인류가 미래에 어떤 방식으로 전세계를 조직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형상론자는 완전한 미래, 목적론적 결과가 있지만, 질료론으로서 프랑스 철학은 비규정(비결정)이라 한다. 미래의 조직화에 대한 다수의 견해의 합의점 찾을 수 있는 능력을 베르그송은 \"상위 양식\"이라 부른다. 이 상위양식을 지닌 인간들은 합의점을 도출하여 새로운 조직화가 가능하다. 이 가능한 조직체는, 교육과 의료를 인민의 안녕으로서, 안전망 장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다. 이 미래의 새로운 조직의 창조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열린 사회와 열린 종교를 말할 수 있고, 또한 미래에 열려있으며, 정해진 한 방향으로 달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한 종교만을 한 공동체만을 주장하고 계몽할 수 있단 말인가?

4) 새로운 철학의 길을 열려고 디딤돌(기초공사)을 놓고 있는 프랑스 철학을 형상철학(형상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같이 거꾸로 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양자 사이는 대칭적 역전 대비가 아니다. 질료철학(자연내재주의)에서 보면, 형상론자들의 철학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논리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의 논리에도 그 나름의 생성과 발전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단지 그들의 논리, 실험, 논쟁을 인간의 문제에 적용하는 잣대로 삼아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베르그송의 설명을 빌어서, 형상론자 또는 창조론자의 허상을 세 가지로 요약하자. 첫째로 무로부터 존재를 창조하는 것은 착각이다. 형상이 등질적 존재로 규정하는 데 비하여, 질료론에서 존재는 이질적 존재이다. 둘째로 형상론에는 극한에서 질서가 단일 질서이고, 다른 질서는 무질서이라고 하지만, 질료론에서 양 극한으로 두 개의 질서가 있고, 대부분은 두 질서를 포함하고 있지만, 한 극한에서 다른 극한을 무질서라 부른다. 셋째로 형상론은 부동(정지)으로부터 질서를 구성하고 운동을 설명하는데 비하여, 질료론에서는 변화(운동)중에서 한 측면이 정지이며, 변화를 드러나는 방식이 세 측면으로, 즉 실재(실체)로, 성질로, 활동으로 보인다.

모순이라기보다, 비대칭적으로 대립된 철학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철학사적 중요한 용어, 실재성에 대한 개념도 여기서 다루어 보자. 고대 철학에서 이데아는 실재이다. 데카르트에 와서는 관념도 실재이지만 물리적 대상도 실재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에 와서는 기억도 실재한다. 관념, 물질, 기억이란 세 가지 실재는 서로 다른 차원이다. 이런 차원의 차이는 철학적 단위에서도 드러난다. 소박한 관념론에서 관념은 기하적 단위이고, 유물론에서 물체가 산술적 단위이라면, 70년대 이후로 프랑스 철학에서 개별적 인간은 \"생명(심리)의 단위\"이며, 들뢰즈는 새로운 공동체의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인격을 \"기관 없는 기관\"(우리가 보기에 인간적 연대의 \'조직 단위\')이란 단위를 설정하려 한다.

이런 철학적 단위 설정으로부터 철학의 중심개념 실체, 속성, 생성물을 규정하는 방식도 설명의 범주도 달라진다. 우리는 여기서 실체라는 의미만을 따라가 보자. 기하적 단위로서 이데아는, 예를 들어 원과 같아서, 모든 원이 동심원이듯이 동연적이다. 그래서 동일한 형상으로서 한 전체 속에 모두 포함되는 실체가 성립한다. 그러나 산술적 단위로서 원자는, 예를 들어 다양한 삼각형과 같아서, 정의 상으로 동일자이지만 각각은 다른 형태를 지니고, 각각은 어떤 조건(데모크리토스의 무, 유크리트의 절대공간)에서 공존한다. 생명 단위는 동일성도 개별성도 앞의 두 방식과 전혀 다르지만, 생명이 한 덩어리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공연적이며, 다른 개체와 동시에 살고 있다는 합의(협력)의 존재로서 공존적이다.

이런 똑같은 단어를 생명존재와 물체존재에서 달리 설명해야 할 때, 그 구분 방법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른 개념을 창안하지 않을 수 없다. 들뢰즈가 철학을 개념의 창조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학에서 포물 곡선의 각 점들은 도함수(유율)가 다르다. 또한 구체적 물체의 위치에 따라서 그 에너지도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수학의 점들과 에너지의 점들 사이의 차이(differentiation, 미분화)는 생명존재들에서 각각의 차이(differenciation, 분기화)와 전혀 다르다. 그래서 개념을 달리 창안한 것이다. 우리가 형상론자의 이데아의 동질적 \'일자\' 와 질료론자의 이질적 \'하나\'를 달리 쓰는 것도, 전자의 일자 부동이며 상기(재현)의 대상이다. 그러나 \'하나\'는 움직이며 변화하며, 기억의 덩어리로 확장 중에 즉 생성 중에 있는 실재 즉 인격이다. 이 인격은 연속성이 있다. 연속성이 없다면 이는 이미 생존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형상론자에서 생성은 나올 수 도 있고 안 나올 수 도 있는 불연속이다. 또한 형상론에 따른 유일신앙자는 한번 왔던 그(크리스트)가 불연속적으로 \"다시 온다\"고 한다. 질료론자에서는 그 예수는 다시 오지 않고 올 필요가 없으며, 연속적으로 인류의 인격 속에 이미 내재해 있다. 즉 우리의 기억 속에 있으면서 언제든지 억압과 불평등이 있는 곳에서 창발하려고 하는 충력과 같다. 그 기억이 확장되어 부풀어가기 때문에, 나사렛의 예수와 동일한 예수는 오지 않고 나올 수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각 인간에게 연속적으로 부처가 들어있으니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그 실현의 장면이 인격의 특이성이다. 이 특이성이 동일한 것 일리 만무하듯이, 동일한 부처도 없고 동일한 예수도 오지 않는다. 인격은 그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풀어내기만 하면 된다. 루소에서 보면, 이를 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 당시의 억압적(봉건적) 계율적(종교적) 사회이며, 이 사회가 순진 무구한 (자연의) 인간을 망친다. 또한 들뢰즈를 통한 스피노자의 논법을 빌면, 현 여건에서 그 성질(부처)을 새로운 세상에서 다 풀어 내지(ex-plicatio)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자연 즉 \'하나\'에 \'님\'자를 붙여서 종교화하기를 그만 두어야 한다. 이 \'하나\'의 생성과 발현이 인류 욕망의 실현이다. 인간답게 사는 사회란 자신의 권한을 천상에 권력에 양도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좀 더 세부적인 용어의 어려움에 대해 마주해보자. 들뢰즈는 노마드(nomade)를 말한다. 노마드의 세계를 통하여 무엇을 알리고 또 삶의 방식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할까? 노마드의 세계는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이다.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monad)는 자신 속에 모든 시각을 가지고 있기에 한계내에서 스스로 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노마드의 개체는 끊임없이 확장하는 과정 중에 있기에, 가만히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시각을 보충하고 확충하면서 부풀어 간다. 말하자면 돌아다니는 것, 그 자체가 시각의 자기 확장인 것이다. 모나드가 자기 한계 내에서 시각에 만족하고 있다면, 노마드에서는 시각의 한계가 자기를 비하시키고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고 본다. 천박하지 않는 노마드적 자아는 자연의 본성을 (극복하고자)넘어서 - 왜냐하면 그 본성이 자신의 한계임을 자각하기 때문에 - 자아의 새로운 형성 즉 자기 형성에로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이는 자신의 형성을 넘어서 개체들 공동의 형성체를 성립시키고자 노력한다.

다른 한편 베르그송의 낙천적 \'삶(la vie)\'와 달리 들뢰즈가 말하려는 \'삶\'은 무엇인가? 들뢰즈에서 삶의 방식 자체가 무덤으로부터 이탈도 아니고, 죽음으로부터 구원도 아니다. 무덤을 뒤에 유성처럼 달고 살아가며, 죽음의 신체를 데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 무덤 즉 신체는 인간이 갖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의미체이다. 왜냐하면, \'삶의 양식\'이란 문법에서, 또는 \'의미논리\'라는 위상적 도식에서 죽음(무덤)과 신체(추억)는 의미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 삶과 직접적 연관 중에 있음(연속성-기억)을 간직하고 표출하고 의미화 한다. 말하자면 이런 죽음과 신체를 반대 즉 대상(문자 그대로 앞에다 놓는)으로 여기고, 적(악마)으로 또는 무화시키려는 의식자체가 병든 의식이다. 왜냐하면, 상대 없는 자신이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환상에 빠진 것이다. 이것이 미신(믿음)이다. 상대가 있는 긴장을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미 말했다. 다른 한편 상대 없이 자족적으로 살아가는 세계, 천상의 세계가 있다. 그것을 그리스트교인은 믿는다. 마치 기하적 점이 위치와 크기 없이도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천국의 세계가 있단다. 이것이 실재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앵글로색슨 철학이 무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의식이 병든 의식으로, 천상의 긍정으로부터 시작하는 철학이 건강한 의식으로 여긴다. 그러나 프랑스의 20세기 철학에서는 천상의 철학이 정신병을 낳는 기본이고, 무의식과 인류의 기억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욕망을 실현시키는 노력이 건강한 의식이 된다. 이 전도된 사유방식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이미 맑스가 헤겔에 대하여 비판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프랑스 철학이 자신의 역사의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세기 동안의 혁명의 풍부한 실증적 자료를 이용한다. 그리고 종교에서 탈피를 위하여 케에르케고르를, 정태적 역사에서 탈피를 위하여 맑스를, 사회에서 정태적 도덕적 사실들에서 탈피를 위하여 니체를, 인간의 꿈의 실현을 가로막는 저 권력에 대한 저항을 위하여 프로이트를 끌어들이기도 하면서. 프랑스 철학은 이들을 잘 쓰고 되돌려 주면서 자신들 속의 실증적 사실들을 가지고 새로이 만든다. 프랑스 자신의 역사와 사회의 다양성이 이 실증자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다양한 외국인을 수용하는 것만큼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에 프랑스에는 프랑스라고 주장할 어떤 프랑스 종교도, 프랑스 민족도, 프랑스 사람도 없으면서, 프랑스 공동체만이 있는 것 같다. 이 공동체를 세계공동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프랑스 철학자들의 노력인지도 모른다.

[마무리를 대신하여 - 한 발자국을 내디디며....]

물론 프랑스라는 나라도 아프리카의 반식민지나라 여럿을 끼고 있어서 제1세계로서 발전하기도 하지만, 또한 제3세계로부터 많은 활력을 얻어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그럼에도, 흑인에 대한 지위나 이슬람에 대한 지위를 비하하지 않고, 또 소수민족으로 프랑스에 이주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 어쩌면 다양한 외국인의 유입에서, 다양한 사상과 문화가 혼융될 수 있는 길을 열고, 또한 프랑스를 살찌우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사회의 개방성과 다양성이 사유의 다양성을 생산하고 있는지 모른다. 구체적으로 외국인에 대해서도 인민의 권한으로서 교육과 의료 등의 혜택은 자국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사회구조가 인민의 삶의 토대를 안정되게 하는 안전망 장치를 잘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과 예술도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말하자면, 하부가 튼튼하여 상부의 뛰어난 몇몇의 특이한 자가 출현가능하고, 또한 특이한 외국인이 왔을 때도 개방성과 다양성이 있기 때문에 알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부의 다질적 뿌리(리좀)가 있는 곳에서 다양한 줄기가 솟아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앵글로색슨의 철학에서 보이는 부정성이 없다는 장점은 프랑스인 들이 현실을 긍정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19세기에 정신병 환자나 소외된 자를 가두지 않고서 사회에 함께 살아가게 했다는 점도 한 도움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장점의 하나는 인간 위에 실재로서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지위도 거부하는 혁명을 인민이 이루었다는 것이다. 혁명은 권력으로서 절대자를 단두대에 이슬로 보냈다. 그리고 거듭된 혁명의 과정에서 인민이 자각하면서, 전통적으로 신앙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영혼을 지배해오던 종교에서 탈피한 교육과 더불어 무상교육 보통교육을 19세기말에 시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혁명의 과정을 통하여. 인민이 주인이 되고 인민의 합의에 의해 프랑스 대혁명의 결실을 맺을 수 있고, 그리고 인간 본성을 실현하는 길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되었다.

프랑스 철학은 실천을 통한 실증적 사실과 프랑스라는 지정학적 위상 위에서 성립한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프랑스만이 철학을 전 고등학교에서 필수로 하고 있고, 대학을 진학하기 위한 학생은 철학시험을 통과해야만 된다. 이런 제도의 토대가 인간 본성을 실현하려는 장치이기도하고, 타국의 지배에 저항하고, 제국주의적 이론에 비판을 가하는 인물을 생산해 낸다. 저변의 두께 위에서, 각 분야에서 구체적 실증의 토대로부터 출발해서, 문제 제기된 사실의 정확성과 솔직성을 드러내고, 다양한 연구의 영역 속에서 논쟁의 장을 형성하고, 그리고 관점의 차이 속에서 합의점을 찾고서 새로운 길을 창조해 나간다.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체적 실증의 사실을 정확하게 문제제기 하는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에밀졸라의 고발이 프랑스 전체를 양분화 한다고 하더라도, 외디푸스가 진실을 끝까지 탐문하듯이, 드레퓌스 사건의 탐문은 사실을 밝힌다. 건강한 20대에 179cm 45kg의 정확성을 분명히 하기보다, 그 종이 위에 쓰여진 글자에 정확성에 관심을 돌리고 있는 현실이나, 타살의 죽음에 죽음을 밝힐 수 있는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또다시 묻혀 버리는 의문사 진상에 대해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라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형상론의 철학과 달리 철학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철학의 철(philos, désir)자도 관심이 없는 곳이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언제 우리 땅에도 부처의 심성(본성)이 인간 누구에게나 내재해 있다는 \"자연 내재주의 철학\"이 통용될 수 있을까?

* 다시 한번, 우리가 프랑스 철학이 특이성을 들여다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자. 예를 들어, 진정으로 한 인격이 179cm의 키에 45kg의 몸무게로 정상적인 학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특이성으로 받아들이고 정확한 문제제기를 하여야 한다. 평균키 (170cm)의 남자라면 긴 기간(근 3년) 군대가기보다 자신의 특이성을 살리기 위해, 179cm도 실현했는데 170cm라고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프랑스 현대 철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인간의 경험도 현실화 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제기하고 담론으로 만든다. 프랑스 철학은 쓰여진 논리(문서의 논리)에 따라 소설적(문학적) 인물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현한 그 인물, 179cm의 키에 45kg의 몸무게로 건전한 활동을 하는 인간을 문제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진솔하게 북한에 대해 말해보자. 형상론자처럼 배제의 원리에 의해 이북을 북괴라고 단정하고 한 목소리로 \'무찌르자\'라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곳에서 철학의 담론들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루소가 보기에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입에서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소리가 나왔다고 한 목소리를 내는 이런 정신병(그 중에 파라노이아)에 함몰 된 현상에서 진솔한 담론이 가능하냐고 묻는 것, 마치 신(창조주)가 형상으로 존재하고 세상을 만들었다고 파라노이아에 빠진 카톨릭 문화에서 진솔한 담론이 가능하냐고 문제제기 하는 것처럼, 이것을 철학자 라깡처럼 말하고자 하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여기 지금인가? 아니 일반 프랑스 경우에 우파뿐만 아니라, 공산당, 사회당, 트로츠키당 등이 이 있는 곳에서도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반대되는 이야기 즉 \'공산당이 좋아요\'라고 한다고 잡아가지 말라는 볼테르적 견해를 밝힌 한나라당 총재로서 국회에서 발언한 이회창님의 말도, 왜 지나가는 북한선수에게 인공기를 흔들어 환영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들의 자유를 표현하는데 그대로 두지 않는 것을 보면, 한나라 당 이회창님의 과거 발언은 파라노이아에 걸린 발언이다.

프랑스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상징으로서 국기는 그냥 빈 것이다. 국기를 들고 사람을 치거나, 다른 사람에게 시야를 방해하는 일이 아니면, 프랑스 인은 그래 한번 흔들고 싶으면 인공기를 흔들든, 어느 음악회에서처럼 빤스를 흔들든, 흔들어 봐라 라고 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너의 철학적 담론, 그래 어떤 담론인지 모르지만, 나는 너처럼 살아보지 않았기에(인생은 한번이며 또한 다시 너처럼 살수 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너의 담론을 전개해 보아라. 인생은 두 번 살 수 없으니, 너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남겨 봐라.\' 179cm의 키에 45kg이야기든지, \"공산당이 싫어요\"가 말도 안 된다든지, 인공기를 흔든다는 이야기든지, 그 이야기를 자신의 관점에서 담론으로 전개해 보아라! 여기서 \'삶\'은 풍부해 진다. 프랑스 철학에 이런 담론이 있기에 다양성이라고 한다. 이런 담론을 전개하는 사회가 분열과 갈등으로 갈갈이 찢어진 사회인가?

분단되었으나, 현재도 그 분단이 당연한 것으로 살아가고 그것도 더 나아가 지역조차 나누려는 이 발상은 어디서 오는가? 그러면서 자신과 다른 소리에 대해, 억지로 막겠다고 심한 정신병(파라노이아)이 도진 것처럼, 악다구니를 쓸 것 인가? 우리의 사상이 형상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데 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좋은 도구이자 통로가 프랑스 철학이 아닐까?


[마실에서 천하루밤, www.masilga.co.kr.]

= 미주없는 본문은 신라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에서 시행하는 <수요인문학 강좌>에서 2002년 10월 2일 수요일 행한 것이다. [마실에서 천하루밤]에 이 본문을 실을 수 있게 허락해준 데 대해 연구소소장 류의근 님께 감사한다.

= 발표 시에 지면 관계상 미주를 생략했으나, 여기서 그대로 싣기로 한다.

= 발표문에 대한 논평도 이곳에 싣게 해준 부산대학교 이지훈 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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