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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로 돌아오고 이틀이 지난 후, 마쓰가에 기요아키는 스물의 나이로 죽었다."


봄이란 계절은 마치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다는 양 서늘하고 아름답게 시작되다가, 눈치 채지도 못한 사이에 급작스럽게 변하는 변덕스럽고 가벼운 계절이다. 그런 봄에 내리는 눈은 봄과 마찬가지로 나풀거리며 내려앉는데, 연분홍색 벚꽃과 함께 아리따운 순백의 대조를 이루다 벚꽃이 그러하듯 어느새 녹아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슬퍼할 수는 없는 것이, 봄눈이 그 어느 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그 자체의 수려함도 있지만 이 처연한 생애도 한몫 하는 탓이다. 이 봄눈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불보듯 뻔하다.

유키오의 글에서 아름다움은 늘 중심을 차지한다. 그러니 글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선 선행적으로,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보아야 한다. 물론, 봄눈, 기요아키, 사토코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와 함께 제시되는 다른 아름다운 것이 있다. 황실의 우아함이다. 하나의 아름다움에 이끌린 것들이 자연스레 그것에 대항한 또 다른 아름다운 것을 목조른다. 기실, 대항조차 어떤 의미로는 이미 하나의 아름다움에 이끌린 결과이겠지만 말이다.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의 이면에는 이러한 미의 투쟁이 자리잡고 있다 할 수 있으리라.

일견, <봄눈>은 통속적인 연애 소설의 형태를 띠는 듯 보인다. 조숙했지만 가볍진 않은 사토코와, 아이 같고 변덕스러운 기요아키의 잘 맞물리지 않는 사랑 이야기 말이다. 이를 그려냄에 있어 사람의 정서를 어찌나 유려한 비유들로 묘사하는지, 실제로 연애 소설로서 보더라도 틀린 이야기는 아닐 터.

그러나 독자가 그런 단순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늘 무언가 붕 뜬듯 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주제들이 던져진다. 시대 정신을 움직일 수 없는 개인의 이야기. 사람의 영혼이 계속 다른 몸에서 이어질 수 있다면, 사람의 사상이 다른 몸을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 불멸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이야기. 너무나 아름답지만 도저히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도록 용납하지 않는 미의 이야기. 미의 세계가 이미 추의 세계로 변해 버렸지만 이를 눈치챌 수 없던 이야기. 이 점들을 간과할 수 없다.

여기까지가 <봄눈>이라는 하나의 낱권에 대한 감상이다. <풍요의 바다>라는 4부작의 첫 권으로서의 감상은 조금 다르다. 왜냐면 이 차원으로 넘어오면, <봄눈> 자체에선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하진 않아 보일 법도 한 혼다라는 인물이 매우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의미심장한 주제들은 하나의 거대한 틀에서 의미를 갖는다. 어째서 태국 왕자들은 환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걸까? 사상, 또는 정신으로서 불멸하는 사람이란 어떤 의미일까? 물론, 조금의 눈치로도 이 영생의 대상이 기요아키라는 건 알 수 있다. 다른 시대, 다른 배경에서 기요아키는 또 다른 삶을 살아간다. 물론, 봄이란 계절에 걸맞는 가볍고 변덕스러운 성격은 아니다. 기요아키가 그랬던 것은 그저 이 시대는 더 이상 그런 감상적인 우아함을 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생적 반골이 바로 그의 근본이다. 포용될 수 없지만, 주변에서 바라보자니 아름다운 것. 그것만이 늘 유지된다.

여기서 혼다가 등장한다. 아름다운 것은 물론 내적으로 미의 속성을 품고 있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아름다움은 관찰자와 떼어놓을 수 없다.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기에 아름답다. 물론 모두가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자라면 분명히. 그 눈으로 혼다는 기요아키의 아름다움, 불멸하는 속성을 정의한다.

혼다는 그런 눈을 가졌지만 그런 심장을 가지진 못한 사람이다. 기요아키와 사토코의 맹목적인 열정과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우아함, 그리고 서로를 통해 완성되었기에 다른 누구를 들일 수 없는 배타적인 완벽성까지. 그 모든 것을 알아보면서도, 스스로 그렇게 되고 싶다고 느끼진 못한다. 그렇게 느낄 수 있기를 원한다. 말하자면, 그는 미술 작품을 관찰하는 관람객과 같다.

그렇기에 혼다는 덧없음의 아름다움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는 기요아키에게서 보았던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언뜻 체화되는 것을 찾아나선다. 자신이 기요아키를 찾아내는 한, 기요아키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셈이니 말이다. 이어지는 글들은 그러한 탐색을 다룬다. 그리고 이러한 미의식이 점차 진화하고 노골적으로 되며, 무엇이 아름다운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어째서 불멸할 수 없는지를 알게 되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봄눈>에서 암시한 바 있듯, 아름다움은 끝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니 말이다.

<봄눈>이 한국어로 번역되기 전에 영역본을 일종의 중역처럼 읽은 적이 있다. 3부에 해당하는 <새벽의 사원> 초반에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는데, 중역으로 보다 보니 생각만큼 글이 유려하지도 않았고 이 사상과 밀접하게 이어지는 부분들이 다소 어렵게 느껴졌던 탓이다. <풍요의 바다>는 유키오의 미학을 그대로 녹여낸 글이다. 일찍이 유키오 본인도 자신의 모든 것을 이 글에 녹여내었다 말한 적 있는데, 그렇기에 이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되는지, 그 사상이 어떻게 정치와 떼어놓을 수 없게 되는지 역시 포함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그 사상 자체는 꽤나 조악하고 괴상한 축에 들기에, 저자의 아름다운 글솜씨가 없으면 영 읽기가 곤혹스럽다. <봄눈>의 번역이 상당히 수려했으니 후속작들 역시 마찬가지 솜씨로 옮겨내, 영역본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이유로 멈추지 않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멀찍이서 유키오의 할복을 지켜보던 자위대 대원들과 비슷한 감상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거기엔 어떤 아름다움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