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새로운 물음이 아닙니다. 같은 제목으로 나온 생트뵈브의 유명한 에세이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특히 베르길리우스와 관련해서 이 질문을 던지는 일이 적절한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전을 어떻게 정의하건 베르길리우스는 빠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전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그를 다룬다는 확신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더 이야기하기 전에, 몇 가지 편견을 없애고 오해를 예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고전이라는 말의 쓸만한 선례를 대체하거나 없애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여러 문맥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져왔고, 가질 것입니다.


제 생각은 하나의 문맥 속의 하나의 의미일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고전을 정의하면서, 앞으로 이 단어를 다른 방식으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제 자신을 구속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앞으로 다른 글이나 연설, 대화에서 ‘고전’을 단순히 ‘기본 작가 standard author’라는 뜻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그냥 훌륭하다는 뜻으로 쓰거나, 어떤 분야에서 저자의 중요성이나 영속성을 가리키기 위해 쓸 수도 있습니다.

“The Fifth Form at St. Dominic’s”를 학원 소설의 고전이라고 말하거나 “Handley cross”를 사냥 소설의 고전이라고 말하더라도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A Guide to the Classics”라는 흥미로운 책도 있는데, 더비 경마장에서 말 고르는 법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고전이라는 말이 라틴 및 희랍 문학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고, 문맥에 따라 그 가운데 위대한 저자들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이 자리에서 말하려는 고전에 대한 설명은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의 대립의 장을 벗어나고, 문학평론가들의 열풍은

아이올루스의 가방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길 바라겠습니다. 이 문제는 다음 주제로 이어집니다.


고전-낭만 논쟁에서 어떤 작품을 ‘고전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쪽에서 하는 말이냐에 따라 최고의 칭찬일 수도 있고 경멸적인 욕설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장점이나 단점, 완벽한 형식 혹은 순전한 불감증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종류의 작품을 정의하고 싶을 뿐,

그것들이 모든 면에서 다른 것들보다 절대로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고전에서 기대할 수 있는 특징들을 나열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문학이라면 반드시 그런 특징을 보이는 어떤 작가, 혹은 시기를 포함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제가 생각하는대로 베르길리우스에서 그런 특징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가장 위대한 시인이었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주장은 어느 시인에게 하건 무의미한 것이겠지만) 라틴 문학이 다른 어떤 문학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완벽하게 고전적인 작가나 시기가 없었다거나, 영국 문학의 경우처럼 고전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작품들이 쓰여졌을 때가 가장 위대한 시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어떤 문학의 결점으로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영국 문학이 대표적인데, 고전적인 특징이 다양한 시기의 여러 작가들에게

흩어져 있는 문학이 오히려 풍성할 수도 있습니다. 언어마다 각각의 자원이 있고 각각의 한계도 있습니다.


언어라는 조건과 그것을 말해온 사람들의 역사라는 조건 때문에 고전기나 고전 작가를 기대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후회할 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그랬고 라틴어의 특성이 그랬듯, 어떤 시점이 되어서야 독보적인 고전 시인이

나타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시인과, 그 시인의 고전을 만들기 위한 일생에 걸친 노력이 필요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베르길리우스는 고전을 쓰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어느 시인만큼이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고전을 쓰는 일을 추구하거나 깨달을 수 없었을 뿐입니다.


고전이란 일이 끝난 다음에만, 역사적 관점에서만 고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이 뜻하는 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가 하나 있다면, 성숙함입니다.

저는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보편적인 고전을 다른 고전들, 예를 들면 어떤 언어의 문학 안에서 고전적인 작품들이나 어떤 시대의 인생관을 기준으로 한

고전들과 구분할 것입니다. 고전은 문명이 성숙한 다음에만, 언어와 문학이 성숙한 다음에만, 성숙한 마음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작품이 보편성을 갖는 데에는 시인 개인의 이해력 만큼이나 문명과 언어가 중요합니다. 성숙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그 뜻을 정의해 주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성숙하고 잘 배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성숙함을 알아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명과 문학의 성숙함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성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것을 이해시키는 일은 (그저 가르쳐 주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곧바로, 혹은 세밀한 조사를 통해 성숙함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를 읽는 사람은 자신이 성장할수록 점점

원숙한 셰익스피어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덜 배운 독자들도 엘리자베스 시대의 문학과 희곡 전체를 보면 미숙한 튜더 왕조의 작품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이르는 모습, 그리고 셰익스피어 뒤로 이어지는 쇠락을 볼 수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크리스토퍼 말로의 희곡은 같은 나이의 셰익스피어가 썼던 것보다 성숙한 마음과 문체를 보여줍니다.

말로가 셰익스피어만큼 오래 살았다면 같은 속도로 발전해 나아갔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저는 그렇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보다 일찍 성숙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첫째, 성숙함의 가치는 무엇이 성숙했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며, 둘째, 각 작가의 성숙함과 함께 문학적 시대의 상대적인 성숙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별적으로 보다 성숙한 마음을 지닌 작가가 덜 성숙한 시대에 속해 있다면 그 점에서 그의 작품은 덜 성숙했을 것입니다.


문학의 성숙함은 그것이 만들어진 사회의 성숙함을 반영합니다. 각각의 작가는 (특히 셰익스피어와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언어를 충분히 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필치를 더할 수 있도록 해준 선배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언어를 성숙하게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숙한 문학은

역사가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역사란 단순한 연대기처럼 이런 저런 원고나 작품이 쌓인 것이 아니라, 언어가 무의식적이지만 잘 정돈된 방식으로 진보해서

자신의 한계 안에서 가능성을 깨닫게 되는 일을 말합니다.


사회와 문학은, 한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동시에 똑같이 성숙하게 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조숙한 아이는 어떤 면에서는

종종 다른 아이에 비해 눈에 띄게 어리숙합니다. 모든 면에서 포괄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시기가 영문학에 있었을까요? 저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없었기를 바랍니다. 영문학의 어떤 시인도 일생에 걸쳐 셰익스피어보다 성숙한 적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셰익스피어만큼 성숙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미묘한 생각과 섬세한 감정의 그림자를 영어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만일 윌리엄 콩그리브의 “Ways of the World”가 어쩐지 셰익스피어의 작품보다 더 성숙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더 성숙한 사회를 반영했을 뿐이며, 더 성숙한 양식을 보여줄 뿐입니다.


콩그리브가 작품을 쓴 사회는 우리가 볼 때 조악하고 난폭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회는 튜더 왕조보다 우리 시대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기를 더 심하게 평가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는 더 세련되고 덜 촌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정신은 얄팍해지고 감수성은 제한되었습니다.

어떤 성숙함의 징조들은 사라졌지만 다른 것들은 실현되었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성숙함에 우리는 양식의 성숙함을 더해야 합니다. 언어의 성숙을 향한 진보는

운문보다 산문의 발전에서 더 쉽게 곧바로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문을 생각할 때 우리는 위대한 개인들의 차이에 마음을 빼앗기는 대신

공통의 기준, 공통의 어휘, 공통의 문장 구조에 가까운 기준을 요구하게 됩니다. 


사실 어떤 산문은 공통의 기준을 멀리 벗어나 극단적으로 혼자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시적인 산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영국은 시에서 이미 기적을 이루었던 시기에 산문이 상대적으로 덜 성숙해서 어떤 용도로는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어는 영어와 같은 위대한 시를 낳을 희망이 없었지만, 영국의 산문보다 프랑스의 산문이 훨씬 성숙한 상태였습니다.


이는 튜더 왕조의 아무 작가나 몽테뉴와 비교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문장가로서 몽테뉴는 선구자였을 뿐, 그의 문체는 프랑스어로 고전을 만들 만큼

성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산문은 한 분야에 잘 쓰이고 나서야 다른 분야를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토머스 맬러리는 후커보다 훨씬 전에 나올 수 있었고,후커 다음엔 홉스, 그 다음엔 조셉 에디슨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준을 시에 적용하는 것은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고전적인 산문의 발전이 일반적 문체를 향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최고의 작가들을 서로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질적이고 특징적인 차이는 남습니다.

그들의 차이는 적다기 보다 섬세하고 미묘합니다.


예민한 입에서 느껴지는 에디슨과 스위프트의 차이는 마치 감정가들이 최고급 와인에서 느끼는 차이와 같을 것입니다. 고전적 산문의 시기에 볼 수 있는 것은

신문 사설의 일률적 문체와 같은 공통의 글쓰기 관습이 아니라 취향의 일치입니다. 고전기 이전의 시대는 편향적이면서 동시에 단조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단조로운 것은 언어의 자원을 충분히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이며, 편향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준이 세워지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없는 것을 편향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 시기의 작품은 또한 현학적이고 파격적일 수도 있습니다.

고전기를 따라 오는 시기도 편향성과 단조로움을 보일 수 있습니다. 단조로운 것은 언어가 가진 자원이 최소한 한 동안은 고갈되었기 때문이며,

독창성이 올바름보다 가치있게 변하기 때문에 편향적이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 문체가 보이는 시대는 사회가 안정과 질서를 통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때입니다.

이는 마치 개인적인 문체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시대가 미성숙한 시대이거나 나이 든 시대인 것과 비슷합니다.

언어의 성숙은 당연히 마음과 양식의 성숙과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언어가 성숙함에 가까워지는 시점은 과거에 대한 비판적인 감각과 함께

현재에 자신감을 갖고 미래를 의심하지 않을 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학에서 이것은 시인이 선배들을 의식한다는 것을 뜻하며,

이때 우리는 시인의 작품 뒤에서 선배들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에게서 개인적이고 독특한 면과 함께 조상들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들은 물론 그 자체로 위대하고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업적은 언어의 개발되지 않은 자원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하지,

그 언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했다는 두려움으로 젊은 세대를 짓눌러서는 안됩니다. 

성숙한 시대의 시인은 틀림없이 선배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에 고무될 것입니다.

심지어 선배들과 맞설 수도 있을 텐데, 이는 전도유망한 청년이 부모들의 믿음, 습관, 태도에 맞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되돌아볼 때에는 그가 가족의 본질적 특성을 보존하며 여전히 그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사람이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시대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명성에 가려진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업적이 비교적

덜 중요해 보이는 경우에는 나중 시대의 작품이 뛰어난 조상과 겨룰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시대가 끝나갈 때 이런 시인들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오직 과거를 의식할 뿐이거나, 미래의 희망을 과거를 되풀이하는 것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에게 창조력이 지속되려면 넓은 의미의 전통,

말하자면 집단적 개성이 과거의 문학에서 실현되어야 하며, 거기에 살아있는 세대의 독창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문학을 그만큼 위대하고 완전히 성숙했다고, 한 마디로 고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희랍와 라틴 문학의 발전에서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라틴 문학은 희랍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 문학과 이들 사이에서는 비슷한 점을 찾기가 더욱 어려운데, 현대 문학이 라틴과 희랍 문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서 조숙해 보이는 것은 고대로부터 빌려온 것들입니다. 우리는 성숙함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밀턴에게서 보게 됩니다.


밀턴은 그의 선배들보다 영문학의 과거에 대한 비판적인 감각을 갖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밀턴을 읽는다는 것은 분명 스펜서의 천재성에

경의를 표한다는 뜻이며, 밀턴의 문장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에 대해 스펜서에게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밀턴의 문체는 고전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문체이며, 문체의 주인은 영어가 아니라 라틴어와 약간의 희랍어입니다. 이 점이 존슨, 그리고 뒤이어 랜더가 밀턴의 문체에 대해

온전한 영어가 아니라고 비판했을 때 뜻한 바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단정을 부드럽게 하자면 밀턴은 언어를 개발하는 데 많은 일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고전적 문체에 접근하고 있다는 표시는 더 복잡한 문장과 구절 구조를 향한 발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발전은 셰익스피어 한 사람의 작품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그의 문체를 초기부터 후기 희곡까지 따라간다면, 후기에는 희곡의 시행에서 가능한 한 가장 복잡한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종류에 비해 범위가 좁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복잡함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의 목적은 무엇보다 느낌과 생각의 섬세한 차이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보다 세련되고 다양한 음악성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복잡한 구조를 사랑한 나머지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간단하게 말해야 옳은 것을 복잡하게 말하는 경향에 빠지게 되어 표현의 범위가 좁아지면

복잡성은 건강을 잃고 작가는 입말과 조화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에서 시인을 거쳐 문장이 발전하면서 단조로움에서 다양성으로 향하고 단순함에서 복잡성으로 향하는 것처럼 쇠퇴할 때에는 천재성이 생명과 의미를

불어넣었던 형식적 구조가 유지된다 할지라도 다시 단순함을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반화가 베르길리우스 이전과 이후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는

여러분 스스로 알아볼 수 있고, 나중에 오는 단조로움은 18세기에 밀턴을 – 밀턴 자신은 전혀 단조롭지 않았지만 – 모사하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비교적 거칠지만 새로운 단조로움만이 대안이 될 수 있는 때가 오게 됩니다.


제가 그린 결론을 예상하셨을 겁니다. 이제까지 이야기한 고전의 특질들, 마음의 성숙과 양식의 성숙, 언어의 성숙과 일반적 문체가

영문학에서 가장 가깝게 그려진 것은 18세기의 시문학, 그 중에서도 알렉산더 포프의 작품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야기의 전부라면 전혀 새롭지도 않고

말할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가지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오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는 18세기가 영문학에서

가장 훌륭한 시기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전적인 사상이란 철저하게 의심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영문학에서는 고전적인 시기도 없었고

고전 시인도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알면 전혀 후회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고전적 이상을 눈 앞에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영어의 천재성에 몇 가지 더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에, 포프의 시기를 거부하거나

과대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고전적인 특성이 포프의 작품에서 얼마나 예증되는지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영문학 전체를 조망하거나

올바르게 겨누어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포프의 작품을 즐길 수는 있지만, 아직 영시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포프가 고전적 특성을 재현한 것은, 영어 운문의 큰 가능성 가운데 일부를 제외했다는 점에서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 분명합니다.

어느 정도는, 어떤 가능성을 희생하고 다른 것을 실현하는 것이 일반적인 삶의 조건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조건입니다.

평생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평범하거나 실패한 삶을 살기 마련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전문가들은 너무 적은 것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거나, 너무나 완벽하게 태어나 아무 것도 희생할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문학의 18세기는 너무나 많은 것이 제외되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마음은 성숙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영국 사회와 영문학은 지역적 양식이 아니었고, 최상의 유럽 사회나 문학에서 동떨어지거나 뒤쳐지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는, 말하자면 지역적이었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 셰익스피어,제레미 테일러, 밀턴을, 프랑스에서 라신, 몰리에르, 파스칼을 생각해보면, 18세기에 형식의 정원을 완벽하게 가꾼 것은 돌볼 영역을

제한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아마도 고전이 진정 추구할만한 것이려면, 18세기가 닿을 수 없었던 넓이와 포용성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특성은 초서와 같은 위대한 작가에게서 보이지만 그는 제 생각에 영문학의 고전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단테의 중세다운 마음에서는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곡에서 비로소 근대 유럽 언어의 고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18세기에 우리는 제한된 영역의 감성, 특히 종교적 감정의 잣대에 짓눌렸습니다.

적어도 영국에서는 시가 속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인들이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했습니다.


원칙적 신념과 참되고 경건한 감정의 모습을 찾으려면 새뮤얼 존슨까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믿음과 실천에 대해서는

추측할 수 밖에 없지만, 그의 시에도 깊은 종교적 감수성의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한된 종교적 감수성은 일종의 지역성을 만들어냅니다.

같은 의미로 19세기가 더욱 지역적임을 덧붙여야 하지만 말입니다. 지역성은 기독교 세계가 해체되고 공통의 믿음과 문화가 손상되어 간다는 징후입니다.

그러므로 18세기는, 미래를 위한 예를 보여준다는 중요한 점에서 성취라고 할만한 고전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고전을 창조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조건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베르길리우스로 돌아가야 합니다.


먼저 이제까지 고전의 성질이라고 했던 것들을 베르길리우스와 그의 언어, 문명, 그리고 그의 언어와 문명이 도달한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마음의 성숙, 이것은 역사, 그리고 역사에 대한 자각을 필요로 합니다. 역사는 시인 자신의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가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충분히 자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적어도 다른 하나의 고도로 문명화된 사람들, 특히 자신의 문명으로 이어지거나

영향을 준 기원에 해당하는 역사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자각은 로마인들에게는 있었지만 우리가 아무리 높게 평가하는 문명이라고 할지라도 희랍 문명에는

없었고, 사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희랍 문명을 더욱 높이 평가합니다. 베르길리우스도 틀림없이 이러한 자각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처음부터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동시대인이나 바로 앞선 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희랍 시의 전통과 발견, 발명을 받아들여 사용했습니다. 외국의 문학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은

자신의 예전 문학만을 이용하는 것보다 한 단계 나아간 문명의 징표입니다.


그러나 저는 베르길리우스가 다른 어떤 시인보다 훌륭한 비율로 희랍 시와 이전의 라틴 시를 잘 섞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한 문학, 한 문명의 상대적인 발전이야말로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라는 주제가 특별히 중요한 이유입니다. 호메로스의 시에서 희랍인들과 트로이아인들의

싸움은 한 도시 국가와 다른 도시 국가 연맹 사이의 불화보다 조금 큰 규모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이네이스의 배경에는 보다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편으로 두 위대한 문명 사이의 관련성을 보여주고, 다른 한 편으로 모든 것을 끌어안는 운명 앞에서 화해를 말합니다.


베르길리우스의 마음의 성숙과 그 시대의 성숙은 이러한 역사적 자각을 보여줍니다. 마음의 성숙을 저는 양식의 성숙과 지역성의 부재에 관련지었습니다.

아마도 현대 유럽인이 과거로 돌아간다면 로마인과 아테네인들의 사회적 행동은 조잡하고 야만적이며 공격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당대를

넘어선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후대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새로운 행동 양식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이

어떠할 것인지를 직관을 통해 보여줄 것입니다. 에드워드 왕조 영국 부자들의 하우스 파티는 헨리 제임스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제임스의 사회는 바로 그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이지, 전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습니다. 카툴루스와 프로페르티우스는 다소 무도하고,

호라티우스는 다소 서민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시인보다 베르길리우스에게서, 섬세한 감수성으로부터 나오는 정제된 양식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남녀가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만나는 부분에서 이러한 양식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뛰어난 학자 분들이 모인 곳에서 제가 아이네아스와 디도의 이야기를

검토하는 일은 적당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6권에서 아이네아스가 디도의 영혼과 만나는 부분이 가장 마음 아픈 부분일 뿐만 아니라, 이 시에서

가장 품위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 부분이 간결한 표현 안에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디도의 태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아이네아스의 태도까지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도의 행동은 마치 아이네아스의 자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이네아스의 자의식이 디도에게 기대하는 행동인 듯합니다. 디도가 그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이네아스를 비난하는 대신 돌아섭니다. 이것은 시의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외면입니다.) 중요한 점은 아이네아스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이제까지 해온 일이 그의 운명을 따랐거나 신들의 음모의 결과였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여기서 제가 품위 있는 양식의 예로 들었던 것은 품위 있는 자의식과 양심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어떤 수준에서 살펴보는 특정한 일화들은 결국 그 안에 포함됩니다.

결국 베르길리우스의 인물들은, 어쩌면 자신의 운명이 없는 투르누스같은 사람조차도, 순전히 지역적이거나 부족적인 양식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대 안에서 그들의 행동은 로마인답고 유럽인다웠습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양식에 있어서는 틀림없이 지역적이지 않았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언어와 문체의 성숙을 보여주는 일은 지금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저보다 훨씬 잘 하실테고, 반대하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의 문체의 배경에 다른 문학과 그 문학에 대한 깊은 지식이 필요했다는 점은 다시 언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틴어 시를 어떤 의미에서 다시 만들어내는 동안, 그는 앞선 사람들로부터 구나 문장을 빌려와 개선했습니다. 잘 배운 작가로서 문학 지식은 그의 작업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문학은 그의 배경에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았습니다. 문체의 성숙에 있어서 그는 의미와 음성의 복잡한 구조를 어떤 시인보다 훌륭하게

개발했고, 필요할 때는 직접적이고 간결하고 놀랍도록 단순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점은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하지만 일반적 문체에 대해서는 한 가지 덧붙이겠습니다. 왜냐하면 영시에서는 이것의 예를 온전하게 찾을 수가 없어서 이 점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유럽 문학에서 일반적 문체에 가장 가까운 예는 아마도 단테와 라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영문학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포프이지만, 그의 문체는 비교적 좁은 영역에서 일반적 문체입니다. 일반적 문체를 볼 때 우리는

“그 언어를 쓰는 천재 작가”라고 말하지 않고 “언어의 천재성을 실현한 작가”고 말합니다. 하지만 포프를 읽을 때에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영어에서 미처 이끌어내지 못한 많은 것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해야 그가 “어떤 시대의 영어의 천재성을 이끌어낸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나 밀턴을 읽을 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작가의 위대함과 언어를 사용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작가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초서는 이상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초서는 우리가 보기에 조악하고 조금 다른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또한 셰익스피어와 밀턴은 후대에 보여지듯 영시의 다른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이에 반해 베르길리우스 이후에는 라틴어가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하기 전에는 더이상 위대한 발전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좀 전에 제기했던 질문으로 되돌아가고자 합니다. 제가 사용한 의미의 고전적인 업적이 과연 언어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자랑스러운 것일지라도 그저 순수한 은총이기만 할까요. 베르길리우스 이후, 라틴 시에서 얼마나 많은 후대의 시인들이 그의 위대함에 그늘져 있었는지

생각해보기만 해도 쉽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베르길리우스가 세운 기준에 따라 시인들을 칭찬하거나 비난했고,

어떨 때는 원래 시의 희미한 흔적을 보여주는 변형된 단어나 재배열된 단어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영시와 프랑스 시는 위대한 시인들이 특정한 분야만

끝냈다는 점에서 다행인 셈입니다. 셰익스피어 시대, 그리고 라신의 시대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최고의 희곡이 나왔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밀턴 이후 훌륭한 장시는 있었지만 최고의 서사시는 없었습니다. 뛰어난 시인들이란 고전이건 아니건 그가 경작하는 땅을 고갈시키기 때문에,

줄어드는 작물을 모두 거둔 다음에는 여러 세대 걸친 휴경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문학에 미치는 고전의 영향이라고 제가 주장하는 것이, 작품의 고전적 특징이 아니라 단순히 작품의 위대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반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셰익스피어와 밀턴에게 이제까지 사용한 의미의 고전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았으면서도, 같은 종류의 위대한 시는 그 이후에 쓰여지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위대한 작품이 같은 종류의 다른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맞습니다. 부분적인 이유는 시인의 의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류 시인이라면 그의 언어로 만들어질 수 있는 최고의 결과를 반복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언어가 단어와 문법 뿐만 아니라 운율까지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변하면서 충분히 달라지고 나면, 셰익스피어만큼 위대한 극작가가, 혹은 밀턴만큼 위대한 서사시인이 나타날 것입니다. 위대한 시인들 뿐 아니라

평범하지만 독창적인 시인들이 언어의 가능성을 충족시키고 나면 후손들에게는 그만큼 적은 가능성이 남습니다.


빠져나간 맥은 얼마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주된 형식인 서사시나 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시인이 고갈시킨 것은 언어 전체가 아니라 하나의 형식입니다. 위대한 시인일 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시인이라면,

하나의 형식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언어 전체를 다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한 당대의 언어는 완전함에 이른 언어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인과 함께 그가 쓰는 언어도 고려해야 합니다. 시인은 아무 언어나 고갈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전 작품을 쓸 수 있는 언어를 고갈시킵니다.


고전을 만들어낸 대신 다양한 과거와 새로운 미래가 있는 언어를 가졌다는 점이 다행인지 묻게 됩니다. 우리가 문학 안에 머무는 동안,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과거의 문학을 만들어낸 것과 같은 문화에 사는 동안은 두 가지를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우리 문학이 과거에 이룬 것들에 대한

자긍심과 미래의 성취에 대한 믿음입니다. 미래를 믿지 않으면 과거는 온전히 우리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라진 문명의 과거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영문학에 작품을 더하려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설득력 있게 다가가야 합니다. 영어에 고전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나 후대의 다른 시인이 – 자신이 마지막 시인이라는 생각에 태연할 사람은 없으니 저도 제 뒤에 다른 시인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전할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쓸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미래에 대한 관심은 무의미합니다.


사멸한 두 언어가 있을 때, 우리는 시인의 수와 다양성, 혹은 시인의 천재성이 온전히 작품에 드러난 정도를 보고 한 쪽이 더 위대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두 가지를 동시에 분명히 해두고자 합니다. 영어가 살아있는 언어이며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고전적 시를 완벽하게 실현해내지 못했다는 점에

기뻐해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고전의 기준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우리가 고전을 만들어낸 문학과 우리 문학 전체를 비교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의 시인들 각각은 평가해야 합니다. 어떤 문학이 고전에 이르는 일은 운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어의 요소들이 합쳐지는 정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라틴어가 고전에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라틴어이기 때문이 아니라, 영어보다 동질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더 자연스럽게 일반적 문체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영어는 다양한 위대한 언어들로부터 만들어졌기에 완전함보다 다양성을 향하게 되고,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마 더 많은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을 것입니다.

영어는 어쩌면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장 많이 지닌 채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제 상대적 고전과 절대적 고전을 구분해 보려 합니다.

이것은 언어 안에서 고전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과 다른 언어에 관해서도 고전인 것들의 구분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포프와 베르길리우스를 나누는 이 구분에 기준이 될 고전의 특징을 한 가지 덧붙이고자 합니다.

이제까지 했던 주장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저는 성숙한 개인에게 항상은 아니더라도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은 (의식적이지 않더라도) 선택의 과정이며,

다른 것들을 제외하고 일부를 개발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언어와 문학의 발전에서도 그런 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17세기 후반과 18세기의 영문학과 같은 다소 고전적인 문학에서, 성숙에 이르기 위해 제외된 요소들이 더 많았거나 더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를 확인하려면 우리는 잊혀진 이전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언어의 가능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영문학의 고전적인 시기는 영어의 천재성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암시한 것처럼, 어느 한 시기에 천재성이 충분히 실현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이런저런 시기를 언급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영어는 다양한 문체를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어떤 한 시기, 어느 한 작가가 기준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불어는 표준적인 문체에 더 많이 구속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잘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불어조차도 한때 17세기에는 ‘프랑스인 기질esprit gaulois’이 있어서 비용과 라블레의 풍성한 요소들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이 제대로 표현되지도 잘 조화되지도 않았음을 알기 때문에 라신과 몰리에르의 전체성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완벽한 고전이란 언어 사용자의 천재성을 감추지 않는 이상 전부 드러내야 하고, 그것은 천재성이 한 번에 드러날 수 있는 언어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전의 특징들의 목록에 포괄성을 추가해야 하겠습니다. 고전은 언어 사용자의 성격을 드러내는 모든 가능한 감정들을 형식적인 한계 안에서

표현해야 합니다. 고전은 이렇게 표현될 때 그 언어에 속한 사람들에게 모든 조건과 계급을 넘어 가장 넓은 반향을 얻을 것입니다.


문학 작품이 자기 언어 안의 포괄성을 넘어 외국 문학에서도 그만큼 중요해질 때, 우리는 이것을 보편성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괴테의 시가 독일의 언어와 문학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고전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총체적이지 못하며,

어떤 내용은 일시적이고, 독일다운 감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외국인의 눈에 괴테는 그의 시대와 언어, 그리고 문화에 제한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는 유럽의 전통 전체를 대변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19세기 시인들처럼 그는 어느 정도 지역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고전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유럽인이라면 그를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는 보편적인 작가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유에서건 현대 언어에서

고전에 가까운 것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고전을 찾으려면 이제는 쓰이지 않는 두 언어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는 거기서 나왔으며, 이제는 쓰이지 않기 때문에 유럽의 모든 이들이 그 혜택을 입었다는 점만이 그것들을 가치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희랍과 로마의 모든 시인들 가운데 저는 베르길리우스가 우리의 고전의 기준에 걸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가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는 뜻은 아니고, 모든 면에서 우리가 빚지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의 포괄성, 그가 가진 특별한 포괄성은 로마 제국과 라틴어의 역사적 위치로부터

나옵니다. 그것은 운명을 실현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이 운명에 대한 자각은 아이네이스에서 이루어집니다. 아이네아스 자신은 처음부터 끝가지 운명지워진

사람이었고, 탐험가나 책략가, 방랑자나 직업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운명을 실현하는 자였고, 충동이나 어떤 명령에 의해, 혹은 영광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그를 방해하거나 이끌어주는 신들의 뒤에 있는 더 높은 힘에

자신의 의지를 맏겼습니다. 그는 트로이에 머물고 싶었겠지만 추방자가 되었고, 결국 어떤 추방자보다 더운 위대하고 중요한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추방된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위대한 목적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의미에서 행복하거나 성공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로마에게 아이네아스는 유럽에게 로마와 같습니다. 따라서 베르길리우스는 특별한 고전의 중심입니다.

그는 어떤 시인도 함께하거나 빼앗을 수 없는 유럽 문명의 중심에 있습니다. 로마 제국과 라틴어는 흔한 제국이나 언어가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운명을 지닌 것들입니다. 그리고 제국과 언어가 자각과 표현을 얻게 해준 시인은 특별한 운명의 시인입니다.


베르길리우스가 로마의 의식이며 라틴어의 뛰어난 목소리라면 그는 문학적으로 칭송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는 중요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문학의 문제에 한해, 혹은 삶을 다루는 문학의 방법에 한해, 몇 가지를 더 포함해볼 수 있겠습니다. 베르길리우스가 문학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준을 정해준다는 점입니다. 제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다른 언어로부터 이러한 기준이 주어진 것을 기뻐할 수 있지만, 그 기준을 거부할 이유는 없습니다.

고전의 기준을 유지하고 각각의 문학 작품을 그 기준에 맞춰 평가하는 일은, 우리 문학이 전체로 보았을 때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해도 각각의 작품에는 결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점이 없으면 장점도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결점은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결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말한 것과 같은 기준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문학만으로는

명백히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에, 블레이크의 철학적인 면을 격찬한다거나 홉킨스의 문체를 찬양하는 것처럼 잘못된 이유로 천재들의 작품에 감탄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류 작품을 일류와 같이 취급하는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짧게 말해, 다른 어떤 시인보다 베르길리우스가 제공하는 균일한 고전의 잣대를 적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역적이게 됩니다.


여기서 ‘지역성’은 사전의 뜻과는 조금 다릅니다. 예를 들면, ‘도시의 우아한 문화를 바란다’는 점에서 베르길리우스는 후대의 시인들이 바라보는 수도가 됩니다.

하지만 ‘생각와 문화와 믿음이 편협하다’는 정의가 애매한 것은, 지금의 관점에서 단테의 ‘생각과 문화와 믿음이 편협하’긴 하지만

영국 국교회의 광교회파(Broad Churchman)가 오히려 더 편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치를 왜곡하고 어떤 것을 배제하며 다른 것을 과장하는 일은

지리적으로 좁아서가 아니라 좁은 지역에서 나온 기준을 모든 인간의 경험에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발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과 혼동하고 덧없는 것을

영원한 것과 혼동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는 어떤 때보다 지식을 지혜로 착각하기 쉽고, 정보를 지식으로 생각하기 쉬워서 인생의 문제를 공학으로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새롭게 등장하는 지역성에 또다른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지역성입니다.


역사는 사람들이 한동안 사용했던 물건들의 연대기가 되었고, 세계는 살아있는 사람들만의 것이며 죽은 자들은 아무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역성의 위험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지역적이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성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은자가 됩니다.

이러한 지역성이 더 큰 참을성과 관용으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오히려 분명한 신조와 기준이 필요한 부분에는 무관심을 불러오고, 아이들이 모두 같은 학교에

가는 한 어떤 종교를 가르쳐도 괜찮은 경우처럼 개인적인 취향에 맡겨야 할 부분에는 옹졸함을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관심은 문학의 지역성을 고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럽은 하나이며, 점진적인 분열과 손상에도 불구하고 그 유기체 안에서 위대한 조화가 발전할 것입니다.

따라서 유럽의 문학도 하나의 혈액이 몸 전체를 흐르지 못하면 각각이 발전할 수 없는 한 몸입니다. 유럽 문학의 혈액은 라틴과 희랍 문학입니다.

라틴 문학을 통해 희랍의 조상들로 이거지기 때문에 이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입니다.


유럽의 여러 언어들이 공유하는 뛰어남의 척도가 고전적인 기준 말고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든 사람들과는 달리 유럽인들끼리 더 잘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 두 언어로 된 생각과 느낌의 유산이 아니면 어디에 있을까요?

라틴어보다 수백만 명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현대 언어를 쓴다고 해도, 혹은 모든 언어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공통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그 언어가 쓰이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라틴어의 보편성을 넘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현대 언어도 제가 베르길리우스를 고전이라고

말한 의미에서 고전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전은, 모든 유럽의 고전은 베르길리우스입니다.


우리의 몇몇 문학에서 라틴 문학에 없는 자랑할만한 것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각각의 문학은 각자의 위대함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가 세운 더 큰 테두리 안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저는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중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요, 이런 역사에 대한 통찰은 아이네아스가 자신의 업적을 훨씬 넘어선 미래를 위해 로마에 바친 헌신을 통해 그려졌습니다.

아이네아스가 얻은 보상은 겨우 작은 출발점과 지친 중년의 정치적인 결혼이었을 뿐입니다. 그의 젊음은 쿠마이 저편의 어둠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고대 로마의 운명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의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몇 안되는 위대한 이름들만 있는

제한된 범위의 문학이었던 것이 다른 어떤 문학보다 보편적이 되었고, 의도하지 않게 자신을 희생하여 유럽의 운명에 순응했습니다.


다양하고 풍부한 후대의 언어를 낳았고, 우리에게 고전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기준은 한 번 성립된 것으로 충분합니다. 같은 일을 두 번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준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 대가이며, 혼돈으로부터 자유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단테의 순례를 인도했던 위대한 영혼을 해마다 기리는 모임에서 우리는 이러한 의무를 되새겼으면 합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할 수 없었던 환상으로 단테를 이끌었고, 자신은 알 수 없었던 기독교 문화로 유럽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이탈리아 말로 작별을 고했습니다.


아들아, 너는 순간의 불과

영원의 불을 보았고, 이제는 내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렀구나.




뭣 좀 검색하다가 발견했는데 이게 애갤에 올라와있었음 독붕이들도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은 글이길래 구글링해보니 한 분이 번역해놓은 거

출처 : https://jaythesheep.com/blog/class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