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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행동의 까닭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깔끔한 형태는 아니겠지만 굳이 정의하자면,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구를 그에 맞는 행동으로 충족시키려는 성격을 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자기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행동을 되풀이할 수도 있지만, 장기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그 행동들 역시 나중의 더 큰 행복을 충족하기 위한 디딤돌인 경우가 많다. 장기적인 행복의 궁극적 목적이 주변 사람과의 화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든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든지 간에 상관 없이 그러한 경향을 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이고, 또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그 행복을 위해 행하는 모든 일들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100명 중 99명이 동의할 이 반듯한 명제에, 올더스 헉슬리는 극단적이고 부담스러운 사례를 제시해 반듯함과 확고함을 자랑하는 명제를 지리멸렬한 논쟁의 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헉슬리가 묘사한 디스토피아 소설은 같은 장르의 다른 소설들과도 궤를 달리하는 면이 있다. 헉슬리와 같은 반열, 어쩌면 그 이상의 경지에 올라있다는 평가를 받은 조지 오웰의 『1984』는 다른 양산형 디스토피아 소설과의 비교를 압도적인 문장력과 묘사를 이용해 불허한다면,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독창적인 관점과 장르 대비 특이한 분위기를 비롯한 이질감으로 차별화에 성공했다. 물론 이런 평가는 디스토피아 소설의 중흥기를 이끈 오웰에게 부당한 평가라고 봐도 무방한데, 애초 『1984』역시 탈고 당시의 이질감은 기존의 소설들과 사뭇 달라 오웰이 허슬리보다 창의성이 부족하다고는 보기 힘든 면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후발주자들이 오웰에게 진한 영향을 받은 나머지 『1984』 특유의 회색빛의 도시를 차용하고 남용해 오늘날 오웰의 창의성은, 퇴색되어 보이는 감이 없잖아 있다.


 오웰의 후발주자들이 더 나은 출발선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웰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오웰이 창의성이라는 과목에서 저평가를 받을 이유가 전혀 되지 않는다. 내가 무리해서 저런 단언을 가한 이유는, 오웰을 깎아내리고자 함이 아닌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의 느낌이 이질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음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작중 헨리 포드라는 신적인 존재, 더 낮게는 10명의 총통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들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비윤리적인 공정을 당하지만, 그 비윤리적인 모습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20세기 당시의 관습을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임신과 출산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농담 삼아 그것들을 논하는 것 자체가 사람 대 사람간의 관계에서 말로 빚을 수 있는 가장 큰 실례다. 포드 이전의 위인들 - 고대의 철학자들, 문학가들, 과학자들 등은 업적을 모두 말소당했고, 그들의 업적인 문학, 과학 등은 지도자인 총통들에 의해 매우 제한적인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제한과 사회적 분위기는, 총통들이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행복에 방해될 만한 요소들은 제한하고 억압하였기 때문에 나온 결과물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 가장 노력하고 염두에 두는 것은 단연 자신의, 가족들의 행복이라는 목표를 충족하기 위함이다. 태생적으로 5단계의 계급을 부여하고, 특히 낮은 계급들은 생식 과정을 복제된 난자에 일임해 수 많은 쌍둥이들을 만들고 이들에게 지극히 제한적인 일만을 맡기며 이들은 사회적으로 좋은 위치를 절대로 차지하지 못하지만,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차별과 비윤리적인 공정들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불만은 유아 시절 방송을 통해 심어 둔 세뇌와 소마라는 물질로 손쉽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소마는 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없이 행복감에 빠지게 하는, 행복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엘리트층들에게 안성맞춤인 물질이다. 제아무리 현재 상황이 부정적이고 희망이 없어 보여도, 적당량의 소마를 섭취한다면 절망이라는 수렁에서 손쉽게 뛰쳐나올 수가 있다. 소마 덕분에, 헉슬리가 묘사한 세계는 현실 세계보다도 개인의 행복이라는 측면을 잘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저런 세계관이 정말 문제가 없을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목표를 달성하게 해 주었다고 해도, 그 과정이 너무 잔혹하며 비인간적이지 않나? 라는 의문은, 작품의 초반부, 후반부의 주인공격인 버나드 마르크스와 존의 시선에서 긍정되고 뒷받침된다. 저 둘은 행복을 위해 나머지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많은 관념들을 부정하는 세계에 환멸을 느끼지만 둘 사이에는 태생적인 환경에서 비롯되는 관점과 비판의 정도가 분명 상이하다. 혹자는 버나드라는 인물이 이질적인 세계관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계 자체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등 그나마 작품의 초반부에 유일하게 감정 이입하기에 좋은 사람이지만, 능력 이상의 유명세를 얻자 비판적인 시각을 거의 내려 놓고 여자라는 향락에 빠져든 것을 보고 주인공 격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하지만, 버나드야말로 일반적인 사람들을 빗대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버나드와 똑같은 상황에 빠졌을 때 플러스 알파라는 그의 신분을 이용해 향락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혹은 절대적인 행복감을 가져다 주는 소마를 섭취하지 않을 것인가? 버나드는 사내 평판은 분명 좋지 못했지만, 저런 혜택들을 받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높은 신분을 타고났다. 본인이 열등감으로 가득한 천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자신이 적응하기 힘든 사회를 비판한 면이 분명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열등감이 충족될 때까지는 사회에 굽히고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면을 지닌 주인공이라고 보는 것이 그렇게 이치에 어긋나는 관점은 아닐 것이다.


 버나드가 현실에 굴복한 주인공이라면, 야만인 격리 구역에서 태어난 존은 끝까지 현실에 저항한 고전적인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고로 인해 야만인 격리 구역에서 실종된 어머니의 긍정적인 말들을 귀담아 듣고 상상 속의 신세계를 기대했지만, 막상 도달한 도시는 비인륜적이며, 남의 죽음에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 한없이 저속한 사람들이 가득한 것을 목도하였기 때문에 기존의 기대는 한없는 혐오감으로 바뀌어 소마 배급을 방해하는 것을 자유를 선사하는 것이라고 항변하고 실행해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을 시작한다. 이 일로 인해 버나드, 그리고 그의 친구 헬름홀츠와 같이 체포된 후 총통 중 한 명인 무스타바 몬드와의 대담 등 기존의 체제를 한없이 비판하고 저항하지만 총통의 주장을 꺾지 못하고, 세상을 바꾸는 등의 업적은 전혀 이루지 못한다. 결국 최소한의 의견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인적이 드문 등대로 도망친 후 내적으로라도 저항을 지속하지만, 잇따른 기자들의 방문과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는 담금질이 흥미로운 볼거리로 전락되는 등 최소한의 저항도 힘들게 되자, 자살함으로써 끝까지 사회와 타협하지 않았다. 이처럼 헉슬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뒤틀린 세계에 대한 존의 끊임없는 저항이겠지만, 그렇다고 버나드가 스스로의 심약함과 비겁함 때문에 작품의 주인공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존이라는 존재가 독자에게 건네 주는 메세지가 가장 강렬하지만, 버나드가 건네 주는 메세지 또한 중요도에서는 크게 밀리지 않는다. 버나드의 행동과 사상이 오히려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니까...


 작품이 나온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발전한 과학 기술에 대한 묘사가 현대와 동떨어졌음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다섯 계급 중 중점적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의 범주가 알파와 베타 계급에만 국한되었다는 점은 아쉽다. 오히려 하층 계급의 인물이 처한 상황 - 단순 노동과 그에 대한 권태감, 혹은 특정 이유로 소마를 섭취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등장했다면 작품 안의 등장인물의 관점이 더 다채롭게 형성되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절로 나온다. 현 체제에 비판적인 면모가 없는 인물이더라도, 그 인물로 인해 집단 세뇌의 해악이 물씬 드러나 더 작품이 더 풍성해졌을꺼라는 생각이 드니 아쉬울 따름이다. 이 작품에 중점적으로 조명되는 인물이 적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층민을 위한 한 자리 정도 더 마련해줬다면...이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다. 자리를 마련해주기 힘든 경우 캐릭터의 결에 비해 비중이 적었던 헬름홀츠 왓슨을 감마 계급 혹은 그보다 더 낮은 계급으로 설정했다면, 버나드와 더 큰 대조를 이룰 수 있어서 여운이 더 남지 않았을까라고 하는 주제 넘은 발상마저 머리 속을 헤집어 놓는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라는 분야에서 명작임과 동시에 이질적이다. 『1984』로 대표되는, 지도자가 국민들을 억압하는 유형의 압제형 디스토피아와는 다르게 세계관이 어딘가 뒤틀리고 잘못되었다는 지적은 할 수 있어도, 어느 방향으로 고쳐 나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압제형 디스토피아에는 억압받는 국민들을 위해 현실의 예를 들어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만, 적어도 『멋진 신세계』의 세계관의 방향성은 국민들에게 행복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적어도 비윤리적인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초과 달성해 제시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안을 말하기 힘들다. 지급하고 있는 소마라는 물질에 대한 의존도도 높으며 이 물질이 현실 세계에 대응하자면 마약과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단기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은 더더욱 줄어든다. 변화로 인한 사회적인 동요와 여파 역시 압제형보다 극렬하게 일어날 것이다. 장기적인 방향으로 보자면 천대받는 문학과 과학을 다시 중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상당할 것이지만, 그런 조치를 취할 경우 행복이라는 가치는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약간은 퇴색되기 마련이고, 이 과정을 세뇌당한 국민들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 대안을 쉽사리 제안하는 것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가장 큰 여운을 담당하는 부분은 사태 해결을 위한 대안을 스스로 생각해 보는 일일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엇나간 호의는 어떤 의미로는 극렬한 악의보다도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아이러니함을 통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