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철학을 선이해후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면 당연히
그걸 알지 못하면 온전히 이해가 불가능한게 맞는데 이걸
등한시하는 태도를 아카데미즘이라고 합리화시키는건 대체 뭐냐
예를 들어 단테의 신곡의 경우 고대 문학은 물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들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종교철학이 기본 바탕이 되어서 신곡이 나오게 된 것이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경우에도 라이프니츠의 절대적 순수이성을 비판하는 개괄하는거라 순수이성비판이고 쇼펜하우어의 경우

“마지막으로 내가 독자에게 하는 세 번째 요구는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전제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그것은 칸트의 주된 저서들을 읽어야 한다는 걸 일컫는 것이다. …. 그에 따라 내가 칸트가 이룩해낸 업적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사실 그의 저서를 진지하게 검토한 결과 거기에 중대한 결함도 있음을 알아내게 되었다. …. 그에 대한 비판을 특별 부록으로 실었다. 이미 말했듯이, 나의 저서는 칸트 철학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볼 때 부록을 먼저 읽는 게 좋을 듯싶다.”
p. 12
 
“그러므로 칸트 철학이야말로 여기서 사상을 펼쳐 보일 때 철저히 알아야 하는 전제가 되는 유일한 철학이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독자가 신과 같은 플라톤 학파의 연구에 헌신해왔다면 그만큼 내 강론을 들을 준비가 잘 된 것이고 그것을 보다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pp. 13-14
 
“우파니샤드를 통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베다를 읽는 혜택을 독자가 받았다면, 따라서 말하자면 그가 이미 고대 인도의 신성한 지혜도 받아들이고 소화했다면 내가 펼칠 강론을 들을 최상의 준비를 갖춘 셈이다. …. 너무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사상이 이미 우파니샤드에서 결코 발견될 수는 없겠지만, 우파니샤드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단편적인 말들 모두가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사상에서 결론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pp. 14-15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을유
이렇게 직접 작가가 이전 철학의 선이해를 강조하는 경우도 있음
이 뿐만 아니라 충족근거율의 네 뿌리의 출발부터가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서 이것에 대한 선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게 쇼펜하우어 저작들의 특징이기도 함
이걸 실행하는게 힘들어서 1차 저작을 바로 접하거나
문학의 경우에 특히 그런 범례가 많은 것 같은데
전공자 아니면 굳이 그렇게 읽어야할 필요 있나
혹은 아카데미즘이라는 명목으로 당연한걸 합리화시키지는 않으면 좋겠음 한 며칠전부터 계속 그런 사람들 보이길래 얘기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