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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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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펼쳐봅시다. "고차원 통로를 이용하"여 "시간 지연 없이 우주의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도달할 수 있"는 웜홀 항법이 개발되자 우주 연방은 경제성을 이유로 이전의 항법을 금지시켰죠. "제때 떠나지 못"해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 사람들"은 고려조차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이것은 뉴욕주의 도시계획을 총괄했던 로버트 모제스가 롱아일랜드의 고가도로를 낮게 설계하는 바람에 경제적 사정상 버스를 주로 이용했던 흑인들이 존스비치공원에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일화를 떠올리게 하지요.


 김원영과 함께한 에세이에서 김초엽은 이렇게 단언한 적 있습니다. "진보는 단지 배제의 방식을 바꾸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롱아일랜드의 고가도로에서 감지되듯 기술(techne)은 "간헐적이고, 제한되고,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상호작용"(랭던 위너, 2010)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일상적 존재의 맥락에 엉켜들면서 […] 우리 인간됨 자체에 한 부분이"(랭던 위너, 2010) 된,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는 정치(politeia)에 가깝지요. "모든 사람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지 못하는 이러한 기술의 특성은 "아무리 미래를 앞당겨도 누군가는 […] 불완전한 인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이러한 기술관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얼굴에 결코 지워지지 않은 흉측한 얼룩"이 있어 멸시를 당했던 릴리는 인간 배아 시술을 완성시켜 아이들에게 "오직 뛰어난 특성들로만 구성된 삶을 선물"하고 싶어 했지요. 그러나 그녀의 연구는 "결과적으로 […] 세상을 배제의 층계로 나누"어 "아름답고 유능하고 질병이 없고 수능이 긴" 개조인과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믿"는 비개조인을 구획시켰습니다. 「달온의 밤」 역시 이러한 기술관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요. 성간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자 "우주에 간다는 말은" 크게 "생애 한두 번 정도 태양계 여행을 떠나 가니메데와 이오의 기이한 표면을 감상하는" 일시적 여행을 의미하게 되거나 "지구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밀려난" 영구적 정착을 의미하게 되었지요. 당연하게도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와 「달온의 밤」에서 전자에 속한 사람들은 후자에 속한 사람들에게 "경멸"과 "동정"이 석인 "불편한 시선"을 보냅니다.


 앞서 언급한 에세이에서 김초엽은 "기술이 인류를 더욱 나은 세계로 데려다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충분히 고찰"해야 한다고 밝히며 그것이 "가상의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소설이라는 분야에서" 사고실험으로 가능하리라 판단합니다. 김초엽의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단언컨대 "가장 유토피아적인 기술"에서 디스토피아가 실현되는 부분일 것입니다.


2. 장애

 「인지 공간」을 펼쳐봅시다. 격자의 형태로 배열된 공동의 지식은 "발을 헛디디지 않을 만큼 강건한 신체"를 요구했고, "아주 작은 몸집으로 태어"난 이브는 격자에 진입하지 못해 자연스레 공동의 지식에서 소외되었습니다. 공동체는 이브가 일상을 무사히 꾸릴 수 있도록 "낮은 층수에만 접근할 수 있"는 "특수한 사다리"를 제작해주는데, "누군가가 매일 이브에게 긴 설명을 반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진술이 보여주듯 그것의 근저에는 이브를 '의존적인 비정상적 존재'로 설정한 다음 '자립적인 정상적 존재'로 개조하여 주류 사회에 편입시키겠다는 음험한 기획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브의 고유한 감각이 부정된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최초의 이야기마저 지워지고 있"다는 이브의 발견은 "성장한 정신은 성장한 신체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근거 없는 상상"이나 "몽상에 가까운 […] 허황된 생각"으로 취급되어 절하되는데, 이러한 서사는 「캐빈 방정식」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됩니다. "뇌에서 시간을 인지하는 회로 문제가 생긴" 유현화는 "시간 거품을 온전히 감각"해내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신체를 "낱낱이 점수가 매겨"져야 하는 관리의 대상으로 혹은 "낫게" 해야 하는 치료의 대상으로 인식할 뿐이죠.


 『기억하는 몸』에서 이토 아사가 기록했듯 장애의 감각은 결핍보다 충만에 근접합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편한 몸을 만들기 위해 분투해온 기나긴 시간의 축적" 속에서 장애의 감각은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로 긍정됩니다. 그러나 비장애의 시좌에서 구축된 기술은 그것을 결여의 감각으로 정의한 다음(김도현, 2019) 기계론적 세게관 속에서 수리가 필요한 대상으로 가정해 버리죠(한설, 2020).


 그런데 정상으로 여겨지는 감각은 정말로 당연한 것일까요? 미국 남부에 위치한 마서스비니어드섬은 훌륭한 반례를 제공합니다. 주민들은 청각의 상실을 결함으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공용어가 수어였기 때문이었죠(노라 앨런 그로스, 2003). 올리버 색스가 서술했던 것처럼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은 "손상을 가진 환자"가 아니라 "독창적인 소수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그들의 신체적 특성이 결함으로 인식된다면 그것은 주변의 사회와 문화가 그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있기 때문이지요. 「브라운 모션」은 이러한 생각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원형 인류 조안은 후각언어를 사용하는 숨그림자 사람들 사이에서 정상 밖의 범주인 "괴물"로 지칭되지요. 하나 후각언어를 사용하는 단희가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지구에 있었다면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을 것입니다.


 기술은 정상성의 이미지를 앞세워 장애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장애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문화적으로 생성됩니다. 어떤 구조나 기능에 문제가 있어 장애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나 기능을 문제로 생각하기에 장애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낙관적인 미래를 기술이 약속할 때, 거기에는 차별과 혐오를 공고히 다지려는 교묘한 술책이 숨겨져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장애를 극복하애 햘 난관"으로 상정하던 기술을 떠나 "저마다의 신체와 감각으로 세계를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술을 구상해야 합니다.


3. 사이보그

 「로라」에서 세계 트랜스휴먼 연합에 소속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신체를 변형하고 개조하"여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려 합니다. 첨단의 기계로 온몸을 무장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마냥 말이지요. 그러나 '증강'과 '향상'을 내세운 트랜스휴머니즘은 모종의 이분법 속에서 한쪽을 수혜자로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한 '수리'의 논리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본질상 새로운 종류의 착취를 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일찍이 도나 해러웨이는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을 의미하는 '사이보그'가 수많은 이분법적 체계를 와해시키며 "우리의 존재론"이 되리라 적었지요. 그녀의 말마따나 사이보그에겐 "우리[…]를 설명해홨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밝혀주는 힘이 있습니다. 「로라」에서 "세 번째 팔이 실존하는 것처럼 느"끼던 로라는 "어긋난 현실과 인식의 차이를 바로 잡"기 위해 세 번째 팔을 어떻게든 부착하려 합니다. 겉보기에 로라의 결정은 "신체에서 무언가를 […] 추가한다는 점에서" 트랜스휴먼과 비슷해 보이지만, "끔찍한 불일치감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몸에 대한 훼손"까지 감행한다는 점에서 몸 정체성 장애를 지닌 사람들과 훨씬 비슷합니다. 해러웨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라는 "공통 언어를 향한 꿈"보다 "이종 언어를 향한 꿈"을 꾸고 있는 셈이며, 인간과 기계의 접합부를 통해 정상으로도 비정상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존재의 묘형을 제시하여 자신의 '결함'을 '정체성'으로 확립시키고자 하는 셈입니다. 결국 로라는 사이보그로 변모하여 신체의 기이한 감각과 화해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트랜스휴먼과 달리 누구도 착취하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사이보그가 과연 머나먼 훗날의 이야기일까요. 앤디 클락이 주창한 '확장된 마음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은 신체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가령 누군가 시계를 착용한 살마에게 '시간이 어떻게 되나요?'라고 물어보면 그는 '모른다'고 대답하는 대신 '잠시만요'라고 말하며 '안다'는 전제 하에 시계를 확인하겠죠. 여기서 시계를 착용한 사람이 "단지 시간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ㅇ낳고 "실제로 시간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한 주목을 요합니다. "무엇이든 간에 바로 거기에 있으며, 필요할 때면 언제나 값싸고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이해의 묶음으로", 즉 신체의 일부로 기계가 간주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통념과 달리 인간은 "벌거벗은 생물학적 유기체"가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사이보그"죠.


 「관내분실」과 「감정의 물성」은 어떻게 신체와 기계가 교접하는지 보여줍니다. 「관내분실」에서 도서관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고인들의 기억과 행동 패턴을" 데이터로 전환하는 전자적 보철을 이용해 "타인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을 해소합니다. 「감정의 물성」에서 이모셔널 솔리드의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중추신경계에 특정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정서적 보철을 이용해 우울과 같은 감정을 "실재하는 감각"으로 느끼지요. 「관내분실」과 「감정의 분실」은 자기도 보르는 사이에 사이보그가 되어 인지적·심성적으로 확장된 영역을 체험하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결국 "우리는 기술의 공생자이고, 생명과 기계의 혼종체"입니다. 인간과 기계를 서로에게서 분리하는 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하지요. 손을 씻는 단순한 행위만 하더라도 세면기, 수도꼭지, 배관시설, 급수시설 등 수많은 기계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립적인 정상적 존재'와 '의존적인 비정상적 존재'의 구분이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간과 기계의 긴밀한 연결 앞에서, 그러니까 사이보그 앞에서 순수한 자립의 개념은 허구에 불과합니다. 오로지 서로에 대해 의존적일 뿐이지요. 따라서 생산가치를 우회하여 자립과 의존의 이분법에서 파생된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도 재고되어야 합니다. 낸시 프레이저의 계보학적 연구가 지적하듯 "[산업사회로의 전환기까지만 해도] 의존은 비정상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조건이었으며, 개인적 특징이 아닌 사회적인 관계였"(낸시 프레이저, 2017)습니다. "의존에는 어떠한 윤리적 낙인도 찍혀 있지 않았"(낸시 프레이저, 2017)지요.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자립하는 정상적 인간'도 '의존하는 비정상적 인간'도 없으며 그저 '연립하는 사이보그'만 있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를 다시 설계하려 하지 말고 세계를 다시 설계하려 해야 한다고.


 로널드 메이스는 이러한 발상에 기반하여 '보편 설계'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 사이보그에서 강요되는 일정한 능력을 대리하여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사이보그의 감각을 풍요롭게 확대하여 누구나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설계. 혹은, 「브라운모션」의 의미합성기처럼 "늙고 쇠약해져 […] 스스로 입자를 합성할 수 없는 사람들"도 꾸준히 대화에 참가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인지 공간」의 스피어처럼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세계의 모든 기억을 남"기면서 "더 많은 종류의 진실을 만들" 수 있도록 돕는 설계.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위해 그 '대화'를 멈춘 적 있"냐고 반문하는 조안과 "신성모독이라도 되는 듯이" 분개하는 공동체에서 확인된듯 이러한 재설계는 거대한 인식적 개변이 뒤따르지 않는 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4. 공생의 미래

 1967년, 린 마굴리스는 20세기 초중반의 문헌들을 토대로 엽록체나 미토콘드리아 같은 세포의 소기관이 원래는 별개의 세균이었으나 융합의 과정을 거쳐 세포의 일부가 되었다는 '연속 세포내공생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나는 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생을 전제로 한다고 믿는다"고 자신할 만큼 그녀는 '공생'을 진화의 주요한 추동력으로 삼았지요.


 「공생 가설」에서 김초엽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일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마굴리스의 이론을 사실의 차원에서 당위의 차원으로 끌어내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의도적으로 범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원이 "자기 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에 있지 않고 "따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공동체"에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며, 나아가 그것이 "오래된 그리움"을 환기하는 류드밀라의 그림처럼 명백한 회귀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지시합니다. 우리가 공생에서 태어났으므로 공생하며 살아야한다는 이러한 소설의 결론은 「오래된 협약」에서 행성 단위로 발전합니다. "모든 생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적당한 물리·화학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나 사이버네틱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는 거대한 총합체"(제임스 러브록, 2004)인 '가이아' 속에서 공생은 필연적인 의막 아닐 수 없지요.


 돌이켜보면 김초엽이 창조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공생을 제일의 가치로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자료를 참조해 소외된 존재의 시좌를 내면화학, 기꺼이 세계와 맞서기 위해 '목숨을 건 도약'과 '어둠 속의 도약'을 문자 그대로 단행합니다. 「스펙트럼」에서 희진이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루이가 '다르다'고 표시하는 수많은 붉은색들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했는데도 종국에서는 색채언어를 드문드문 읽어냈던 것처럼 그들의 횡단성에는 "오늘의 허황된 허구"를 "내일의 엄연한 사실"(제임스 글릭, 2019)로 바꿔놓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공생을 꿈꾸며 살아간다면 표준의 장벽은 금세 무너질지도 모르며 각자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미래는 더 이상 공상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김초엽은 기술이 어떻게 장애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양산했는지 면밀하게 살피면서도 공생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다른 종류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타진하는 작가입니다. 한때 세간에 유행했던 타자론과 환대론 때문인지 그녀의 소설에 대한 평가는 '(SF답지 않게) 무해한 세계를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소설' 정도로 정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부당한 처사입니다. 그녀의 소설은 SF 특유의 사고실험을 극대화하여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해 온 장애의 문제를 가장 예리하고 정확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김초엽의 소설이 그렇게 느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