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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펼쳐봅시다. "고차원 통로를 이용하"여 "시간 지연 없이 우주의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도달할 수 있"는 웜홀 항법이 개발되자 우주 연방은 경제성을 이유로 이전의 항법을 금지시켰죠. "제때 떠나지 못"해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 사람들"은 고려조차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이것은 뉴욕주의 도시계획을 총괄했던 로버트 모제스가 롱아일랜드의 고가도로를 낮게 설계하는 바람에 경제적 사정상 버스를 주로 이용했던 흑인들이 존스비치공원에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일화를 떠올리게 하지요.
김원영과 함께한 에세이에서 김초엽은 이렇게 단언한 적 있습니다. "진보는 단지 배제의 방식을 바꾸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롱아일랜드의 고가도로에서 감지되듯 기술(techne)은 "간헐적이고, 제한되고,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상호작용"(랭던 위너, 2010)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일상적 존재의 맥락에 엉켜들면서 […] 우리 인간됨 자체에 한 부분이"(랭던 위너, 2010) 된,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는 정치(politeia)에 가깝지요. "모든 사람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지 못하는 이러한 기술의 특성은 "아무리 미래를 앞당겨도 누군가는 […] 불완전한 인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이러한 기술관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얼굴에 결코 지워지지 않은 흉측한 얼룩"이 있어 멸시를 당했던 릴리는 인간 배아 시술을 완성시켜 아이들에게 "오직 뛰어난 특성들로만 구성된 삶을 선물"하고 싶어 했지요. 그러나 그녀의 연구는 "결과적으로 […] 세상을 배제의 층계로 나누"어 "아름답고 유능하고 질병이 없고 수능이 긴" 개조인과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믿"는 비개조인을 구획시켰습니다. 「달온의 밤」 역시 이러한 기술관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요. 성간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자 "우주에 간다는 말은" 크게 "생애 한두 번 정도 태양계 여행을 떠나 가니메데와 이오의 기이한 표면을 감상하는" 일시적 여행을 의미하게 되거나 "지구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밀려난" 영구적 정착을 의미하게 되었지요. 당연하게도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와 「달온의 밤」에서 전자에 속한 사람들은 후자에 속한 사람들에게 "경멸"과 "동정"이 석인 "불편한 시선"을 보냅니다.
앞서 언급한 에세이에서 김초엽은 "기술이 인류를 더욱 나은 세계로 데려다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충분히 고찰"해야 한다고 밝히며 그것이 "가상의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소설이라는 분야에서" 사고실험으로 가능하리라 판단합니다. 김초엽의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단언컨대 "가장 유토피아적인 기술"에서 디스토피아가 실현되는 부분일 것입니다.
2. 장애
「인지 공간」을 펼쳐봅시다. 격자의 형태로 배열된 공동의 지식은 "발을 헛디디지 않을 만큼 강건한 신체"를 요구했고, "아주 작은 몸집으로 태어"난 이브는 격자에 진입하지 못해 자연스레 공동의 지식에서 소외되었습니다. 공동체는 이브가 일상을 무사히 꾸릴 수 있도록 "낮은 층수에만 접근할 수 있"는 "특수한 사다리"를 제작해주는데, "누군가가 매일 이브에게 긴 설명을 반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진술이 보여주듯 그것의 근저에는 이브를 '의존적인 비정상적 존재'로 설정한 다음 '자립적인 정상적 존재'로 개조하여 주류 사회에 편입시키겠다는 음험한 기획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브의 고유한 감각이 부정된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최초의 이야기마저 지워지고 있"다는 이브의 발견은 "성장한 정신은 성장한 신체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근거 없는 상상"이나 "몽상에 가까운 […] 허황된 생각"으로 취급되어 절하되는데, 이러한 서사는 「캐빈 방정식」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됩니다. "뇌에서 시간을 인지하는 회로 문제가 생긴" 유현화는 "시간 거품을 온전히 감각"해내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신체를 "낱낱이 점수가 매겨"져야 하는 관리의 대상으로 혹은 "낫게" 해야 하는 치료의 대상으로 인식할 뿐이죠.
『기억하는 몸』에서 이토 아사가 기록했듯 장애의 감각은 결핍보다 충만에 근접합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편한 몸을 만들기 위해 분투해온 기나긴 시간의 축적" 속에서 장애의 감각은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로 긍정됩니다. 그러나 비장애의 시좌에서 구축된 기술은 그것을 결여의 감각으로 정의한 다음(김도현, 2019) 기계론적 세게관 속에서 수리가 필요한 대상으로 가정해 버리죠(한설, 2020).
그런데 정상으로 여겨지는 감각은 정말로 당연한 것일까요? 미국 남부에 위치한 마서스비니어드섬은 훌륭한 반례를 제공합니다. 주민들은 청각의 상실을 결함으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공용어가 수어였기 때문이었죠(노라 앨런 그로스, 2003). 올리버 색스가 서술했던 것처럼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은 "손상을 가진 환자"가 아니라 "독창적인 소수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그들의 신체적 특성이 결함으로 인식된다면 그것은 주변의 사회와 문화가 그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있기 때문이지요. 「브라운 모션」은 이러한 생각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원형 인류 조안은 후각언어를 사용하는 숨그림자 사람들 사이에서 정상 밖의 범주인 "괴물"로 지칭되지요. 하나 후각언어를 사용하는 단희가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지구에 있었다면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을 것입니다.
기술은 정상성의 이미지를 앞세워 장애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장애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문화적으로 생성됩니다. 어떤 구조나 기능에 문제가 있어 장애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나 기능을 문제로 생각하기에 장애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낙관적인 미래를 기술이 약속할 때, 거기에는 차별과 혐오를 공고히 다지려는 교묘한 술책이 숨겨져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장애를 극복하애 햘 난관"으로 상정하던 기술을 떠나 "저마다의 신체와 감각으로 세계를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술을 구상해야 합니다.
3. 사이보그
「로라」에서 세계 트랜스휴먼 연합에 소속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신체를 변형하고 개조하"여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려 합니다. 첨단의 기계로 온몸을 무장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마냥 말이지요. 그러나 '증강'과 '향상'을 내세운 트랜스휴머니즘은 모종의 이분법 속에서 한쪽을 수혜자로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한 '수리'의 논리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본질상 새로운 종류의 착취를 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일찍이 도나 해러웨이는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을 의미하는 '사이보그'가 수많은 이분법적 체계를 와해시키며 "우리의 존재론"이 되리라 적었지요. 그녀의 말마따나 사이보그에겐 "우리[…]를 설명해홨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밝혀주는 힘이 있습니다. 「로라」에서 "세 번째 팔이 실존하는 것처럼 느"끼던 로라는 "어긋난 현실과 인식의 차이를 바로 잡"기 위해 세 번째 팔을 어떻게든 부착하려 합니다. 겉보기에 로라의 결정은 "신체에서 무언가를 […] 추가한다는 점에서" 트랜스휴먼과 비슷해 보이지만, "끔찍한 불일치감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몸에 대한 훼손"까지 감행한다는 점에서 몸 정체성 장애를 지닌 사람들과 훨씬 비슷합니다. 해러웨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라는 "공통 언어를 향한 꿈"보다 "이종 언어를 향한 꿈"을 꾸고 있는 셈이며, 인간과 기계의 접합부를 통해 정상으로도 비정상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존재의 묘형을 제시하여 자신의 '결함'을 '정체성'으로 확립시키고자 하는 셈입니다. 결국 로라는 사이보그로 변모하여 신체의 기이한 감각과 화해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트랜스휴먼과 달리 누구도 착취하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사이보그가 과연 머나먼 훗날의 이야기일까요. 앤디 클락이 주창한 '확장된 마음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은 신체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가령 누군가 시계를 착용한 살마에게 '시간이 어떻게 되나요?'라고 물어보면 그는 '모른다'고 대답하는 대신 '잠시만요'라고 말하며 '안다'는 전제 하에 시계를 확인하겠죠. 여기서 시계를 착용한 사람이 "단지 시간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ㅇ낳고 "실제로 시간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한 주목을 요합니다. "무엇이든 간에 바로 거기에 있으며, 필요할 때면 언제나 값싸고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이해의 묶음으로", 즉 신체의 일부로 기계가 간주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통념과 달리 인간은 "벌거벗은 생물학적 유기체"가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사이보그"죠.
「관내분실」과 「감정의 물성」은 어떻게 신체와 기계가 교접하는지 보여줍니다. 「관내분실」에서 도서관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고인들의 기억과 행동 패턴을" 데이터로 전환하는 전자적 보철을 이용해 "타인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을 해소합니다. 「감정의 물성」에서 이모셔널 솔리드의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중추신경계에 특정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정서적 보철을 이용해 우울과 같은 감정을 "실재하는 감각"으로 느끼지요. 「관내분실」과 「감정의 분실」은 자기도 보르는 사이에 사이보그가 되어 인지적·심성적으로 확장된 영역을 체험하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결국 "우리는 기술의 공생자이고, 생명과 기계의 혼종체"입니다. 인간과 기계를 서로에게서 분리하는 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하지요. 손을 씻는 단순한 행위만 하더라도 세면기, 수도꼭지, 배관시설, 급수시설 등 수많은 기계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립적인 정상적 존재'와 '의존적인 비정상적 존재'의 구분이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간과 기계의 긴밀한 연결 앞에서, 그러니까 사이보그 앞에서 순수한 자립의 개념은 허구에 불과합니다. 오로지 서로에 대해 의존적일 뿐이지요. 따라서 생산가치를 우회하여 자립과 의존의 이분법에서 파생된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도 재고되어야 합니다. 낸시 프레이저의 계보학적 연구가 지적하듯 "[산업사회로의 전환기까지만 해도] 의존은 비정상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조건이었으며, 개인적 특징이 아닌 사회적인 관계였"(낸시 프레이저, 2017)습니다. "의존에는 어떠한 윤리적 낙인도 찍혀 있지 않았"(낸시 프레이저, 2017)지요.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자립하는 정상적 인간'도 '의존하는 비정상적 인간'도 없으며 그저 '연립하는 사이보그'만 있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를 다시 설계하려 하지 말고 세계를 다시 설계하려 해야 한다고.
로널드 메이스는 이러한 발상에 기반하여 '보편 설계'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 사이보그에서 강요되는 일정한 능력을 대리하여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사이보그의 감각을 풍요롭게 확대하여 누구나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설계. 혹은, 「브라운모션」의 의미합성기처럼 "늙고 쇠약해져 […] 스스로 입자를 합성할 수 없는 사람들"도 꾸준히 대화에 참가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인지 공간」의 스피어처럼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세계의 모든 기억을 남"기면서 "더 많은 종류의 진실을 만들" 수 있도록 돕는 설계.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위해 그 '대화'를 멈춘 적 있"냐고 반문하는 조안과 "신성모독이라도 되는 듯이" 분개하는 공동체에서 확인된듯 이러한 재설계는 거대한 인식적 개변이 뒤따르지 않는 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4. 공생의 미래
1967년, 린 마굴리스는 20세기 초중반의 문헌들을 토대로 엽록체나 미토콘드리아 같은 세포의 소기관이 원래는 별개의 세균이었으나 융합의 과정을 거쳐 세포의 일부가 되었다는 '연속 세포내공생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나는 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생을 전제로 한다고 믿는다"고 자신할 만큼 그녀는 '공생'을 진화의 주요한 추동력으로 삼았지요.
「공생 가설」에서 김초엽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일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마굴리스의 이론을 사실의 차원에서 당위의 차원으로 끌어내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의도적으로 범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원이 "자기 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에 있지 않고 "따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공동체"에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며, 나아가 그것이 "오래된 그리움"을 환기하는 류드밀라의 그림처럼 명백한 회귀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지시합니다. 우리가 공생에서 태어났으므로 공생하며 살아야한다는 이러한 소설의 결론은 「오래된 협약」에서 행성 단위로 발전합니다. "모든 생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적당한 물리·화학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나 사이버네틱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는 거대한 총합체"(제임스 러브록, 2004)인 '가이아' 속에서 공생은 필연적인 의막 아닐 수 없지요.
돌이켜보면 김초엽이 창조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공생을 제일의 가치로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자료를 참조해 소외된 존재의 시좌를 내면화학, 기꺼이 세계와 맞서기 위해 '목숨을 건 도약'과 '어둠 속의 도약'을 문자 그대로 단행합니다. 「스펙트럼」에서 희진이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루이가 '다르다'고 표시하는 수많은 붉은색들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했는데도 종국에서는 색채언어를 드문드문 읽어냈던 것처럼 그들의 횡단성에는 "오늘의 허황된 허구"를 "내일의 엄연한 사실"(제임스 글릭, 2019)로 바꿔놓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공생을 꿈꾸며 살아간다면 표준의 장벽은 금세 무너질지도 모르며 각자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미래는 더 이상 공상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김초엽은 기술이 어떻게 장애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양산했는지 면밀하게 살피면서도 공생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다른 종류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타진하는 작가입니다. 한때 세간에 유행했던 타자론과 환대론 때문인지 그녀의 소설에 대한 평가는 '(SF답지 않게) 무해한 세계를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소설' 정도로 정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부당한 처사입니다. 그녀의 소설은 SF 특유의 사고실험을 극대화하여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해 온 장애의 문제를 가장 예리하고 정확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김초엽의 소설이 그렇게 느껴지기를 바랍니다.
좋은 글 추천 먼저 누르고 읽겠읍니다,,
플로우 차트 계획은 더 읎느요
아래 댓글 보면 아시겠지만, 여기 오면 항상 욕을 먹어서... 올리기가 여러모로 무섭네요.
음 사실 본인이 평론가임을 밝히고 활동을 시작해서 자의든 타의든 어그로가 상당히 끌려있긴 함..... 그래서 글 하나 쓰면 단순 욕이든 긴 반박글이든 공격적인 성향의 댓글들이 달리는 거고. 하지만 걍 욕 박는 거면 무시하거나 삭제해버리면 되고 밑에 댓글 중에 욕 먹는 글이 있나 싶긴한데 뭐 얘기 하다가도 걍 무시해버려도 되는게 디시임.
나도 쓸데없이 철학에 관심 가진다느니 율리시스 쉴드치다느니 쿤데라무새니 욕 오지게 먹지만 걍 완장차고 다니고 있고 ㅋ 암튼 올릴 맘이 안든다면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대부분 갤러들은 평론이라 플차 호의적으로 보고 있는 거 같고 국문학 까는 여론이 있으면 옹호 여론도 필요하다 생각하니 할 의지 있다면 활동 자주 해줬으면 한다 ㅎ
평론가 아조씨 대단한 거시야요
평론가 아죠씨의 초엽눈나 평론이라니... - So it goes
감사합니다 선생! 혹시 굳이 '해명하기'라고 제목을 지은 이유가 있을까요?
모종의 사건 이후로 디씨에 발도 붙이지 않으려 했는데, 지인을 통해 얼마 전에 독서갤에 올라온 글-SF에 대한 몰이해로 가득찬-을 읽게 되었고, 이렇게 SF가 오독되게 놔둘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적게 되었습니다.
무슨 글 때문인지 대충 감은 오네. 디씨가 워낙에 말이 거친데다가 기본적으로는 그냥 자기 생각 맘대로 적는 공간이라 몰이해로 가득찬 글들이 가끔 나와요.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그런 말들에 너무 상처받지 말고, 무슨 일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여기도 가끔 들르고 그래유
답변 감사합니다. 저도 언젠가는 선생님과 같은 시선으로 sf를 바라보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ㅎㅎ
초엽누나는 개추야
잘린 거에요, 일부러 끊은 거에요?
추천 후 보관!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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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면 좋겠습니다.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19 -김도현, 장애학 함께 읽기, 그린비, 2009 -일라이 클레어, 망명과 자긍심, 현실문화연구, 2020 -수진 웬델, 거부당한 몸, 그린비, 2013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2018
트랜스휴머니즘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면 좋겠습니다 -마크 오코널, 트랜스휴머니즘, 문학동네, 2018 -신상규,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아카넷, 2014 -앤디 클락, 내추럴-본 사이보그, 아카넷, 2015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세상을 이렇게 볼 수 있어야 평론가가 될 수 있구나..
나랑 같은책 본거맞아? 짧은 소설에서 이렇게 많은 글이 나오는구나
저는 기술이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한다는 전제 자체가, 특히 장애에 안좋게 작용한다는 전제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골라보는 편향적인 시각의 결과물이라 생각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문제점에 비하면 그들의 실질적인 생활이나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된 것이 너무나도 압도적이거든요. 따라서 '자신이 인식하는' 문제점을 자신의 방식대로 잘 풀어나갔다는 평가는 모르되, '예리하고 정확하게' 사회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는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향후 소설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낭만적 선악구도와 결론을 정해놓고 과정을 억지로 짜맞추는 이야기가 아니라, 설득력 있는 과정을 거쳐 결론에 이르는 전개를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장애인 당사자가 그렇게 말해도 편향적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신가요...?
개인적 배경과 연관지어서는 딱히 얘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만... 위 댓글에서도 분명 자신이 인식하는 문제점을 잘 풀었을 수도 있다고 했지요. 굳이 개인적 배경을 언급하자면, 저자가 어떤 사회적 문제점을 인식하였을 때 그 문제점을 자신의 개인적인 영역으로 끌고 왔다는 것이 그 문제점에 대한 예리하고 정확한 인식을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한 개인의 '당사자'가 그렇게 얘기했으니 그게 편향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가령 현대에 넘쳐나는 고도근시 안구장애자들에게 안경과 콘택트렌즈와 라식이라는 기술의 은총이 너희에게 사회적 배제와 차별을 가져다주었나 아니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나 물었을 때, 답변이 한 쪽으로 쏠린다면 그건 편향적인 대답이 될까요 아니면 그 반대가 될까요?
청각장애를 가진 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공 와우일까요, 아니면 누구나 수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회일까요...? 지체장애를 가진 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로봇 의족일까요, 아니면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문턱을 없앤 사회일까요...?
222.234/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는 있다고 봅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느니 차라리 생물의 진화 자체가 열등과 우등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도 결국엔 인간이라는 생물체 사회의 유지와 번성의 결과물 중 하나니까요.
위에 올린 장애학 관련 도서를 읽으셔도 좋고, 아래 링크를 읽으셔도 좋을 듯 싶네요.
https://www.google.com/am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Amp.html%3fidxno=34505
기술의 속성에 대해서는 위에서 제가 인용한 랭던 위너의 저작과 STS의 최신 성과가 답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승한// 전부 다 할 수 있으면 현실적으로는(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말고) 좋겠죠. 아예 압도적인 기술복지로 청각장애를 없애면 문제가 없을 거고요. 다만 저는 작가의 개인적 배경과 별개로, 기술의 활약상을 볼 때 사회가 '외면한' 문제를 '예리하고 정확하게' 다뤘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능력 있는 기술자들이 많고, 우리는 기술 덕에 알게 모르게 우리의 장애를 보완받고 있으니까요.
우리 사회가 장애를 외면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음... 단적으로 시내만 가도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없는 건물이 꽤나 많지 않나요? 한국 수어는 법률상으로 한국어와 같이 국어의 지위에 놓여있는데, 대부분 영어를 먼저 배우지 않나요?
장애인 당사자를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통념과는 다르게 그분들은 그렇게까지 비장애인이 되고 싶지 않아 하세요. 자신의 정체성을 이미 긍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장애를 지닌 채로 경제, 문화, 정치 등등의 활동을 하고 싶어 하시죠.
그건 경제성, 어떻게 보면 기술이 충분히 발전을 안해서(구글완전번역이나 공중부양 휠체어가 개발이 안 되어서) 문제지 기술 발전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뭘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건 장애인 뿐만이 아니죠. 비장애인도 그건 똑같아요. 왜냐하면 충분한 자원과 기술이 없으니까요. 여기서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격차를 좁혀 주는 것 중에 얼마 안 되는 게 기술 발전이죠. 장애를 치유하기로 했건 간직하고 가기로 했건 간에 그건 똑같다고 봅니다.
제가 위에서 보편 설계를 언급했듯 기술의 효능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시혜적인 태도로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 기술과 모두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도록 돕는 기술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건 작가도 피력했던 의견이고요.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749
누군가는 그런 식의 구분을 원하겠지요. 누군가는 쓸데없다고 여길 거고요. 그리고 수요가 존재하는 이상 기술이 발전을 하겠죠. 확실한 건 그런 식의 구분을 하든 하지 않든 전부 인간의 노력에 따른 '기술 발전' 이며, 그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고전적 선악구도로 아둥바둥 끼워맞추는 건 현실과도 참 거리가 멀어 보일 뿐더러 별달리 설득력도 없고 흥미도 떨어진다는 겁니다. 적어도 저한테는 말이죠.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진짜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장애인을 포함해서 어떤 정체성 집단이던 한 개인이 전체를 대표해서 사회적 이슈에 '이렇다' 답을 내리는 거,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1.239에게 동의함. 좋은 지적이었음.
당연히 인공와우가 수화보다 더 좋고 날아다니는 휠체어가 문턱 없는거보다 백배 좋지 이걸 말이라고 하나 ㅋㅋㅋㅋㅋ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장애학이라는 학문을 제가 개괄하고자 쓴 글이 아니라 해당하는 부분은 괄호 속에 간략히 적었습니다.
그런 기적의 기술이 역사적으로 없었기 때문에 기술철학을 하시는 분들이 회의론을 계속해서 보이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과 관련된 부분은 랭던 위너나 브뤼노 라투르 같은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했고요....
음.. 기술철학을 현란하게 인용하며 논증하는 글을 원하시면 원고료라도 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제가 뭣하러 비공식적인 지면에서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야 하는지...
실제로 말씀하신 부분은 기술철학에서 쟁점이 많은 부분입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지지하는 의견(랭던 위너, 자크 앨륄 등)과 그와 반대되는 의견(앨빈 토플러, 레이 커즈와일 등)을 다룬 저작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음... 평론을 그러면 어떻게 써야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가르쳐주시면 배우겠습니다.
그런데 라투르 정도면 상당히 유명한 철학자 아닌가요? 거의 전작이 번역되어 있을텐데... 인용도 많이 되고...
제가 오늘 이후로 다시는 디씨 안 올 생각이어서 이야기를 해주실 거면 빨리 해주시와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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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평론에서 이론을 도구적으로 쓰지 않으려면 어떤 방식이 좋을까요? 혹시 전범이 되는 평론을 보여주실 수 있나요?
제가 이제 졸려서... 본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랭던 위너-김도현-미셸 푸코-이토 아사-노라 앨런 그로스-올리버 색스-트랜스휴머니즘-도나 해러웨이-앤디 클락-빅터 핀켈스타인-낸시 프레이저-린 마굴리스-제임스 러브록 등 많은 인용 문헌이 근거로 저는 삼았고,
이것을 자세하게 풀지 않은 것은 이것이 어디까지나 김초엽론이기 때문입니다. 장애학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었으면... 음... 아예 스타일 자체가 달랐겠죠..? 정신분석학을 끌어와서 문학을 논의하는 사람에게 정신분석학의 과학적 근거가 없냐고 따지지 않는 것처럼, 사실 여기서도 선생님이 논의는 다소 엇나갔다고 생각하고요.
평론가마다 입장은 각기 다르겠지만, 제게 평론은 문학의 영역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제게 문학은 논리의 영역을 넘어서는 어떤 깊이를 확보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고요.
'수사적'이라 하셨는데, 저는 평론이 거의 그런 식으로 쓰여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의 이론을 누군가가 끌어올 때 우리가 문제삼는 것은 그것이 정합적인 인용인가지,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부정할 슨 없는 사실인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음... 선생님이 넌지시 말했듯 모든 글에는 예상 독자가 있기 마련이지요. 독서갤 정도면 제가 인용한 텍스트를 그러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수학 대중교양서로 예시를 들자면, 퍼펙토이드 공간을 이해시키기 위해 중고등학교 수학 정도를 끌어오지, 간단한 산술 법칙부터 끌어오지 않지 않습니까.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제가 위에서 들었던 저작에 그대로 있고... 그리고 이런 논쟁은 이미 수도 없이 있어 와서 정말 저기에 다 적혀있습니다. 선생님의 주장과 저의 주장 모두요. 굳이 공회전하는 논의를 여기서 피로하게 하고 싶진 않네요.
저 님 평론 좋아하니까 글 마니마니 써주세요 진짜 응원이야
SF 장르가 유토피아적 기술에서 디스토피아가 오는게 흔하지 않음? 하긴 우빛속에서 개개인 혹은 집단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묘한 디스토피아는 좀 신박했음ㅋㅋ - dc App
한심한 글이네. 혹시 내가 싼 글에 대한 반박이라면 나도 반론글 올리겠음.
https://m.dcinside.com/board/reading/181557
그거 때문이 아니라
http://m.dcinside.com/board/reading/187334
이거 말하는 거 같은데
그래? 뭐가 되었든 이 글이 너무 역겨워서 반론을 하긴 해야겠음.
아니 근데 글이 맘에 안들면 그냥 반박글 쓰면 되지 정중하게 쓴 글에 맘에 안 든다고 욕부터 박고 시작하노ㅋㅋㅋ
나는 평론가보다 평범한 대중의 평가가 훨씬 가치있다고 생각해. 네 감상문 잘 읽었음ㅇㅇ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88670&_rk=Zxh&page=1
반론 기다리겠음.
댓글보고 그럼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