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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으로 유토피아 분석해 봄. 예전에 썼던 것도 피드백 받아도 될까?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1]가 21세기 지금까지도 논의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어가 던져주었던 초시대적 혜안이 21세기까지 유효”[2]하다는 방증인 동시에 현대 사회가 여전히 16세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토피아가 실현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일지와 같은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의 관심 속에 존재한다. 김재철은 미셸 푸코가 주창한 생명 정치(biopolitique) 개념을 통해『유토피아』를 현대적 맥락에서 해석하려 했다. 그는 모어가 상상한 사회 구조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자체의 모순성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주권적 권력—즉 나치즘 혹은 스탈린의 전체주의와 같은 죽음정치권력—으로 되돌아”[3]갈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째서 주권 권력이 죽음정치권력으로 회귀하는지에 대해선 김재철과 미셸 푸코 모두 “그 논리와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4]. 한편, 조르주 아감벤은 생명 권력이 죽음정치권력으로 회귀하는 이유를 조명한 철학자이다. 그는 푸코의 생명정치 이론에 동의를 표하면서도, 생명 정치가 죽음 권력으로 회귀하는 이유를 한나 아렌트와 칼 슈미트의 이론을 통해 노정한 바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아감벤의 정치 이론을 통해 작품 『유토피아』를 살펴봄으로써 유토피아가 실제로 죽음 권력으로 회귀하는지를 확인하고, 나아가 『유토피아』가 현대에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지 탐색해보고자 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정치는 예외 상태를 구별하는 행위이고 주권 권력은 예외 상태를 구별하는 주체이다.[5] 즉, 법이 적용되는 범위와 적용되지 않는 범위를 구분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이며 구분하는 주체가 주권자라는 말이다. 예컨대 2020년 우리나라는 코로나에 걸린 환자들에게 치료비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미국, 태국 등 49여개의 미지원 국가에서 온 외국인, 귀책 사유가 있는 국민 등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였다. 이 때 치료비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는 행위가 정치이고, 그 주체인 한국 정부가 주권 권력인 셈이다. 이 관점에서 모든 인간은 사회로부터 언제든 추방당할 수 있는 상태에 처해있다.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선 주권자가 규정한 대로 행동해야만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인간이 실제로 갖고 있는 다원성이 인간을 동질적인 국민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유예되고 제한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6]는 데에 있다. 다시 2020년 한국을 살펴보자. 코로나로 인해 관련 규제가 늘어나며, 사람들이 누려왔던 몇 가지 자유가 침해받고 있다. 이 때 사람들은 규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추방당한다는 사실 탓에 반강제적으로 자유의 제약을 받아들인다. 이렇듯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현대 생명 권력은 필연적으로 죽음 권력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고 아감벤은 성토한다.
유토피아 역시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추방한다는 점에서는 아감벤이 설명하는 정치 구조와 부합한다. 노예 제도와 종교 단락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유토피아의 “노예는 주로 이 나라 시민으로서 극악무도한 범법자이거나, 외국인으로서 자기 나라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다.(140쪽) 그렇기에 노예는 언제든 “사형에 처”해 질 수 있는 인물들이자, “인간 본성이” 서서히 파괴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인물들이다.(147, 103쪽) 유토피아가 규정하는 최소한의 사회 보장으로부터 배제당했다는 점에서, 노예는 아감벤이 설명하는 사회 바깥으로 추방당한 인간 그 자체다. 무신론자도 마찬가지로 추방당한 인간에 포함된다. 유토피아인들은 “악은 벌을 받고 선은 상을 받는다는” 정언에 반대하는 사람을 “인간도 아닌 자로 간주”한다.(175쪽) 이들은 “시민의 일원으로도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이들 역시 사회 바깥으로 추방당한 인간이다. 위와 같이 추방하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아감벤의 정의에 따라 유토피아는 근대적 의미의 주권 권력에 속한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다원성이 제약 받는다고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감벤의 논의와 대조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인간의 본이 존재한다는 가정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인들은 “덕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최상의 선으로 이끌어” 간다고 생각한다.(121쪽) “인간애는 인간에게 가장 알맞은 덕목”이라고도 믿는다.(122쪽) 반면, 이러한 “인간 본성의 존엄성을 극도로 추락시키는 자는 단호하게 법으로 다스린다”.(175쪽) 일련의 장면들은 인간에겐 오로지 하나의 본성(nature)이 존재한다는 유토피아인들의 믿음을 시사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들에겐 제약받을 다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본성을 가지고, (이상적인 인간이 되겠다는)비슷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유토피아인들이 관리를 선출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해마다 서른 가구를 한 단위로 하여, 예전에는 시포그란투스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필라르쿠스라고 부르는 한명의 관리를 선출합니다…… 시포그란투스는 모두 2백 명이고, 이들이 왕을 선출합니다…… 트라니보루스는 매년 선출되지만 사소하거나 경미한 이유로 교체되지는 않습니다.”(90쪽)
시포그란투스는 작게는 자신이 선출된 30가구를, 넓게는 유토피아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왕을 선출할 권한이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이를 추측할 수 있다. 그런 대표를 매년 새로 선출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유토피아인 중 누구를 뽑아도 대표성을 가진다는 유토피아인들 사이의 유사성을 함의한다. 바로 이 유사성 때문에 아감벤과 미셸 푸코, 김재철의 분석과 달리 유토피아는 죽음 권력으로 회귀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러한 유사성을 길게 유지할 수 있는 걸까?
유토피아의 동일성이 유지되는 근간에는 철저한 교육이 있다. 라파엘 휘틀로다이우스는 유토피아 사회가 유지되는 바탕을 “어리석음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사회제도 내에서의 성장과 교육과 좋은 독서” 덕분이라고 설명한다.(118쪽) 교육의 중요성은, 플라톤 역시 강조한 바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과 양육이라네. 훌륭한 교육을 받으면 절도 있는 사람이 되어 모든 것을 쉽게 파악할 것이기 때문이네…… 나라의 정치체제는 출발이 좋으면 선순환을 이루며 성장할 것이네.”[7]『유토피아』에서 공화국을 상당 부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은, 유토피아 역시 교육과 양육이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있음을 암시한다. 즉, 유토피아가 죽음 권력으로 회귀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교육에 있는 셈이다.
정리하자면, 유토피아는 예외 상태를 구별한다는 점에서 근현대적 의미의 주권 국가와 유사하다. 하지만, 주권 국가가 인간의 다원성을 제한할 수 밖에 없는 반면, 유토피아는 철저한 교육을 통해 인간 본성의 통일을 이룸으로써 자유를 성취했다는 점에서 대조를 이룬다. 물론 『유토피아』가 현대 주권 권력이 가지는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른다. 작품은 교육을 통해 인간 본성을 단일화하는게 가능한 일인지, 만약 가능하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을 통해 가능한지 등을 해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가 제시하는 교육과 토론이라는 새로운 길이 현대 사회에도 큰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간 우리는 우리의 정치와 사회에 과하게 비관적이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접어버린 것도 같다. “우리의 준비상태가 아직 멀게만 느껴”[8]진다는 이화용 연구자의 결론처럼 말이다. 이제는 비관에서 벗어나 유토피아가 그리는 세상처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충분한 토의와 교육을 거칠 시기라고 나는 믿는다.
[1] 토마스 모어(2012), 『유토피아』, 열린책들 : 이하 언급되는 작품의 내용은 본문에 페이지를 병기한다.
[2] 이화용(2012), 「토마스 모어의 세계」, 동서인문학(46), 245쪽.
[3] 김재철(2018),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나타난 사목 권력과 통치성」, 동서비교문학저널(46), 96쪽.
[4] 김재철(2018),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나타난 사목 권력과 통치성」, 동서비교문학저널(46), 96쪽.
[5] 조르조 아감벤(2008),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새물결, 60-61쪽.
[6] 윤재왕(2016), 「예외상태와 주권의 역설 - 아감벤의 칼 슈미트 해석에 대한 비판」, 강원법학(47), 375쪽.
[7] 플라톤(2014), 『국가』, 아름다운 날, 154쪽
[8] 이화용(2012), 「토마스 모어의 세계」, 동서인문학(46),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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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ㅅㄱㅅ. 다른것도 기회되면 올려봄 - dc App
유토피아를 푸코와 아감벤의 담론으로 해석할려는 시도가 되게 참신해서 잼게 읽었음. 다만 아감벤이 지적한 장치와 푸코가 지적한 규율 사회 모두 다양한 수단을 통해 순종적인 육체를 만드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글에 나오는 유토피아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띄고 있음. 푸코가 지적하는 것 중 하나가 모든 지식은 정치적이라는 건데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유토피아인들이 덕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최상의 선으로 이끌어” 간다고 믿는 모습 역시 권력이 설계한 믿음이라고 볼 수 있음. 또한 이러한 믿음이 교육으로 강화된다는 것 역시 여기의 연장선이고. 이런 면에서 유토피아는 여전히 전체주의적인 믿음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라고 볼 수 있음.
"주권 국가가 인간의 다원성을 제한할 수 밖에 없는 반면, 유토피아는 철저한 교육을 통해 인간 본성의 통일을 이룸으로써 자유를 성취했다는 점"에서 앞문장과 뒷문장이 결국은 같은 말을 하는 거임. 다만 전반적으로는 되게 참신하고 좋은 글인 거 같음. 읽으면서 되게 잘썼다고 생각했고. 나두 글 저정도로만 쓸 수 있으면 소원이 없을듯ㅠㅠ
이게 맞는 듯. 유토피아 나름의 의의를 찾으려다보니 저런 어거지 결론이 나왔다 ㅠ ㅠ ㅇㅈ하고 다른것도 가져와봄. - dc App
굳이 의의가 현대에도 의미를 가질 필요는 없음. 예를 들어서 토마스 모어는 르네상스 시기의 사람이고, 근대성에 대한 논의 자체가 아직 시작하기도 전에 이 책을 썼음. 그런 점에서, 근대성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푸코와 아감벤의 관점으로 봤을 땐 문제점이 있는 책임. 하지만 모어의 글은 실제로 자본론에 인용될 정도로(이건 나무위키 피셜임. 진짠지는 글쓸때 확인해봐야겠지) 근대의 토대를 만든 글이라고 볼 수 있음.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는 그 당시에는 센세이셔널한 작품이고 충분히 의의를 가지지만 현재 이러한 문제점이 있다 정도로만 써도 충분할듯
굳이 변론해보자면, 난 시각의 차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음. 유토피아는 모든 인간의 정신이 헤겔이 말한 것 처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반면, 현대 사회에선 그러한 믿음 자체가 사라졌고, 그렇기에 유토피아엔 다원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헤겔이 말하는 자유를 성취했다(?) 그래도 명확한 지적인듯.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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