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1.
고통스러운 꿈을 시로 그린다면
박서원 <난간 위의 고양이>(세계사, 1995)
박서원의 시는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르게 읽힌다. 마치 자신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고, 이에 분노하다가, 결국 체념하고 포용하며 마음을 정리하는 듯한, 일종의 고백록처럼 읽혔다. 개인적으로는 너무나도 날것에 가까운, 그러나 강렬하고 이미지가 휘몰아치는 2부를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읽었다. 그 때문일까, 3부의 시들은 2부보다 좀더 차분한 목소리였기에 그 강도가 떨어지는 게 아쉬워하던 찰나, 시집의 마지막에 위치한 <門으로 가는 길>, <항해>, 그리고 <나 그토록>이라는 세 편의 시가 가진 묘한 어루만짐의 감각이 시집을 전체적으로 닫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세 편의 시는 1장의 <생리불순>, 2장의 <마리아가 목수의 아들 예수에게 주는 메시지>, 그리고 3장의 <나 그토록>이었다. 우선 <생리불순>은 시인의 개인사를 수업을 통해 들었기 때문인지 더욱 아련하기도 했고, 동시에 그럼에도 자신의 자궁을 향해 ‘지구가 생성되기 전의 카오스 같은 상태’라는 표현을 쓰고, ‘비 오길 기다리는 홈통 … 새롭게 등을 밝히려는 절정의 깨끗한/정거장……’으로 이어지는 그 표현들이 결국 끝남으로 없어지고 버려진 것이 아닌 언젠가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라는 단호한 비유들로 읽혔다. 특히 ‘천만에!/나는 내 자궁에다 더 깊이 속삭인다. 천만에!’라는 선언이 가지는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좋았다.
<마리아가 목수의 아들 예수에게 주는 메시지>는 가차없는 신성모독의 목소리, ‘主여/씹새끼’라는 강렬한 욕설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수직으로 12번 반복되는 ‘主여’ 끝에 붙는 게 어떤 찬미나 고백이 아닌, ‘씹을 할 새끼’라는 가장 천박한 욕으로 예수를 지칭한다. 제목도 굳이 ‘예수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붙여 그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 즉 섹스와 무관할 수 없는 인간의 아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리고 길게 나열된, 막달레나 마리아이자 시인이 당한 성폭력에 대한 성토와 이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태도가 무척이나 당당하다. 악마와 천사가 나오는 마지막 부분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 특유의 폭력과 해학이 인상적으로 읽혔다.
<나 그토록>은 ‘나는 행복하네’라는 시어의 반복이 치미는 슬픔을 자아냈다. 앞선 2부의, 꿈 속의 목소리를 그대로 시로 그려낸 듯한 시인의 고통스럽게 물화된 이미지들을 읽은 뒤 다가온 시인의 ‘행복하네’라는 고백이 얼마나 자기최면적인지. 연어로 형상화된 화자가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곳이 내 자궁이었던 그곳이라니. 앞선 시 <항해>의 마지막 ‘아주아주 잘 가고 있어요/잘살고 있어요 훨씬’이라는 시어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나는 괜찮다, 나는 문제없다고 중얼거리는 시인의 얼굴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아서, 도무치 떨쳐버릴 수가 없는 시였다.
2.
당연이라는 말의 무게
김승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세계사, 1999)
김승희 시의 전반에 깔린 정서는 당연함에 대한 거부다. 당연함이라는 말은 너무나도 쉽게 사람들의 의심이 담긴 목소리를 깔아뭉갠다. ‘그건 당연한 거야’라는 말엔 ‘남들은 다 그런 보편성을 받아들이고 편하게 사는데 왜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불편을 감수하느냐’라는 긴 문장을 경제적으로 요약한 폭력이다. 그렇기에 김승희의 거부는 일상의 폭력을 반대하는 항의이자 왜 그런 일탈을 인정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으로 다가온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시는 <왈, 가라사대>, <제도>, 그리고 <모순의 무릎>이었다. <왈, 가라사대>는 성현들의 말을 빌리는, 즉 관습과 권위에 호소하는 행동들로 형상화된 사회의 폭력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원치 않는데도 사회의 관습에 ‘입양’되어 ‘너답게 된’다. 시인은 그런 찍어내듯 양산되는 국화빵과 같은 모양의 꽃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봄꽃이 되기를 소망하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부평초처럼 흘러가는 인생은 ‘자연사인지 의문사인지’ 모를, ‘자화상인지 타화상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내던져질 뿐이라고 계속 호소한다.
<제도>는 색칠놀이를 하는 아이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경계’를 알아버린 걸 본 엄마의 시선이다. 평생 관습에 반대하던 시인임에도, 엄마라는 위치에 놓인 순간 그 관습의 화신이 되어 자식에게도 그걸 되물림 해주는 것에 반발하듯, 엄마를 죽여라! 라고 발랄한 어조로 이야기를 한다. 화자의 상황과 그 목소리의 톤이 너무 이율배반적인데, 그 괴리감이 오히려 시가 풍기는 서글픔을 증폭시키는 느낌이다.
<모순의 무릎>에서도 역시 당연함에 저항하는 시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 시에서의 저항은 어딘가 결이 다르다. 무릎 아래를 스스로 잘라버리는 저항의 결과로 찾아오는 결과물은, ‘피거품의 부력으로 둥둥 날아다니는’ 삶, ‘사는 동안 무릎 꿇고 항복할 위험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문단의 두 질문은 그런 삶이 행복한가? 그리고 그런 사람은 무엇인가? 로 끝난다. 종이인형처럼 무릎을 잘라버리고, 무릎이 없는 사람이 되는 강렬한 이미지가 그 질문으로 인해 더욱 배가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런 삶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3.
터부를 감싸는 자연
김선우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
시집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는 어머니, 꽃(특히 피를 상징하는 붉은 계열의 꽃들), 그리고 체액을 비롯한 각종 분비물들이다. 그런데 이 이미지들은 결국 하나로 엮이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인식에서 분비물은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고 언급하는 것마저 터부시된다. 그런데 <양변기 위에서>와 <어미木의 자살1>에서 밑을 닦아주는 애기호박잎과 오줌 방울에 젖은 은행잎의 이미지는 더러움의 상징보단 순수함, 자연, 순환의 이미지로서 제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은 어머니, 그리고 (흔히 어머니 자연이라고 부르는)자연와의 연결고리로 그 이미지가 순화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앞서 분비물의 더러움을 순화시켰던 자연은 또 붉은 계열의 꽃을 통해 활기찬 생의 에너지를 표현하기도 하고, 피의 강렬한 폭력성을 흩트러뜨리는 역할을 맡으며, 생리혈과 같은 분비물의 환유로서 제시되기도 한다. 시집에서 언급되는 붉은 꽃들의 종류도 매우 다채로운데, 이를 나열해보자면 붉은 다알리아(<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얼레지(<얼레지>)붉은 동백꽃(<만약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면>), 붉은 수수꽃(<무정자 시대>), 깨꽃 붉었다(<빈 집>), 꽃잎을, 하혈을, 마지막 꽃잎을(<어미木의 자살2>), 피를, 붉은 꽃송이를(<집이 서늘하다>), 산벚꽃잎을 열자 철쭉이, 철쭉 꽃술을 열자 붉은 목단이 뭉클거리며 피어올랐지요(<꽃밭에 길을 묻다>) 등으로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포인트로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세 이미지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지만 시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시는 <관계>였다. 아마 연가시의 시점에서 쓰여진 것 같은 이 시는 어쩐지 수업 주제였던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엮어서 읽혀졌는데, 여성의 몸에 잠식된 남성적 성 소비관념으로도, 반대로 남성의 뇌리속에 깊숙이 박힌 현실과 괴리된 성적 인식으로도 보여서 뭔가 섬찟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특히 ‘모든 끝장은 단호한 거야 난 네게 빚없어/(놀랍지 않아? 날 키운 건 너야)’라는 마지막 시어가 굉장히 기억에 남는다. 달팽이(무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잡은 연가시(‘너’를 파멸시키는 존재)가 숙주였던 달팽이의 최후를 만끽하는 듯한 그 말은 몇 번을 곱씹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4.
여성들의 손을 잡아주는
나희덕 <그녀에게>(예경, 2015)
나희덕의 시를 읽으면 어떤 아련함 같은 게 스며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삶에 대한, 특히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관조를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게 만든다. 인상적이었던 시가 너무 많아 다 적지는 못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나 서른이 되면>, <삼킬 수 없는 것들>, 그리고 <다시, 십 년 후의 나에게>였다.
<나 서른이 되면>은 올해 읽은 시 중 가장 좋았다. 가장 마음에 와닿은 부분은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러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였다. 인생의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시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좋았다.
<삼킬 수 없는 것들>의 삼킴 장애는, 개인적으로 뇌졸중을 앓았던 아버지가 떠올라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삼킴이라는 자연스러운 행동마저 일종의 학습을 통해 익혀진다는 것, 그리고 그 당연한 행동의 장애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곁에서 너무나도 똑똑히 바라봤기 때문일까, 시어에서 드러나는 삼켜내서 치워버려야 하는 것들이 목구멍에 힘을 잃어 울컥 토해져 나오는 그 이미지가 와닿았다. 삼킬 수 없어 뱉어내지만 그걸 남들에게 보이길 부끄러워하는 인생이, 그리고 ‘삼킬 수 없는 것들은/삼킬 수 없을 만한 것들이니 삼키지 말자./그래도 토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자.’라고 말하며 그런 걸 장애로 여기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자고 말하는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다시 십 년 후의 나에게>에서는 여성으로서 삶의 흐름이 유리병 속에 담긴 편지라는 이미지로서, 일종의 타임캡슐로 과거에서 현재로, 다시 현재에서 미래로 줄곧 이어지고 있다. ‘또 하나의 목숨을 제 몸에 기를 때만이/비로소 짐승이 될 수 있는 여자들의 행복과 불행/그러나 아이가 태어나 자란 만큼 내 속의 여자들도 자라나’와 같은 부분, 그리고 ‘다시, 십 년 후의 나에게/내 몸에 깃들여 사는 소녀와 처녀와 아줌마와 노파에게/……/두려움이라는 말 대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의 두 부분은, 아이를 임신한 여자의 막연한 두려움을 어루만지는 여자 안의 수많은 여자들의 목소리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특히 소녀-처녀-아줌마-노파가 가지는 그 다양한 이미지들이 여성성으로 뭉뚱그려진 개념 속에 숨겨지고 은폐되어 있지만, 그 모든 것이 한 여자의 삶이라는 듯 말하고 있는 듯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