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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극장의 여자들>과 <정년이>
여성국극단이 보여주는 젠더전복성의 현대적 재해석
1950년대의 한국을 떠올리면 무엇이 먼저 생각이 날까. 우리는 그 시대에 대해 잘 모른다. 고작해야 광복 이후의 혼란, 전쟁으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허허벌판, 낙후된 도시와 다 쓰러져가는 시골집의 가난, 4.19로 이어지는 정치 등의 큼지막하고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떠오를 뿐이다. 그런 폐허와 혼란에 문화는 일종의 사치처럼 느껴진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 역시 문화를 즐겼다. 영화와 라디오 방송부터 악극, 국극 등의 공연무대가 당대의 대중문화로 널리 퍼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극단, 즉 여성국극단이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이다. 각종 극단들이 부진한 시기에도 여성국극단만은 서울뿐만이 아니라 지방에서도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 6.25전쟁이 한창이었던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도 여전히 공연이 계속될 정도였다.
이젠 아무도 큰 관심을 주지 않는 판소리나 국악도, 정확히 그것이 어떤 장르인지는 몰라도 그런 문화가 존재했고 또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그런데 여성국극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던 위명과는 다르게 현대엔 아예 사멸해버리고 말았다.
앞서 언급한 이야기들을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도출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 어째서 우리는 여성국극단이라는 존재를 잊고 말았는가? 둘째, 1950년대에 어떻게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극단이 탄생할 수 있었는가? 셋째, 여성국극단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배경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근대 극장의 여자들>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1950년대 전후 한국 사회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어져 온 ‘여성들의 무대’를 주목한다. 1910년대의 대중극의 유형들에서부터 1920~30년대의 레뷰와 가극 무대, 1950년대의 여성국극단에 이르는 흐름을 통해 앞선 질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
1장에서는 1910년대의 신파극의 도입을 중심으로 일본을 통해 도입된 근대 문물이 당대 조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분석을 보여준다. 과거 ‘화류비련극’이 기생 여주인공이 패배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기생-가정극’은 ‘연애’를 매개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기생이 부르주아 가정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통해 가부장제 안으로 편입되는 일련의 변화를 분석한다. 이 분석의 연장선상에서 근대 공연문화에 외국연극이 ‘번역’되어 유입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전통적인 여성상의 재현과는 다른 파격적이고 이국적인 ‘연애극’은 여성의 육체성을 부각시키고, 이는 즉 여배우의 등장으로 연결되었다는 지적이다.
2장에서는 레뷰와 가극 공연이라는, 지금의 뮤지컬과 유사한 당대의 유행 장르를 중심으로 ‘소녀 연예인’들의 등장을 분석한다. ‘소년과 어린이, 청년, 신여성’과 같은 용어가 근대적 역어로 사회에 편입되었던 것에 비해, ‘소녀’는 그 흐름에 올라타지 못했다. 교육받은 여성은 곧 ‘신여성/모던걸’이 되었고, 소녀뻘 여자들은 소녀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소녀’가 사회적 존재가 된 것은 다국적 공연단/여성 공연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즉 ‘연예인화’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소녀 공연단의 공연 레퍼토리가 보여주는 경향은 문화를 차별-전시하는 박람회 문화의 등장과 맞물려 있었다. 일본에서 주로 활동했던 소녀 공연단은 ‘조선문화’를 진열하는 전시품의 역할을 수행했다. 즉 ‘조선 문화’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서구화된 일본 문화’와의 거리감을 유지시키고 이국적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한 소비재로서 작동했다.
소녀는 섹슈얼리티와 보이시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교육받은 여성’이라는 세일즈 포인트를 내세운 레뷰 공연은 경쾌하면서 선정적인 여성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이자 이러한 이미지를 상품으로 파는 유통망이었다. 동시에 미국의 재즈 문화와 맞물린 공연 기획, 소녀가극단에서 남성 역을 여자가 맡는 등의 변화는 이들에게 보이시함의 이미지도 부여되었다. 이런 특징은 소녀들에게 모던걸의 자유분방한 이미지와 국제적인 상품으로서의 면모를 부여했다.
3장에서는 앞선 시대의 변화 속에 드디어 문화의 주류가 된 ‘여성국극단’을 다루며 그 특징과 문화적 파급력, 그리고 부상과 침몰 속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한국에서 여성공연집단의 역사는 그 뿌리가 깊다. 무당과 여사당패가 근대 이전부터 이어져 온 집단이라면, 극장 문화가 형성된 뒤에는 각종 기생조합을 통해 여성연극이 지속되었다. 이들은 1920년 일본에서 연극을 배우고 온 자들을 통해 쇠퇴하게 되었으나, 여성가극단의 등장으로 대체되었다. 이들은 해방 이후 여성국극단체를 세우게 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기존의 전래의 춤과 노래를 통해 연극을 하는 전통 위에 신파극/외국 가극의 형식에 영향을 받아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여성국극단의 독특한 특징이라면 여성들로만 이뤄져 있기 때문에 남장하고 남자 역을 맡는 배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존 전근대 연극에서 남성들이 여성 역을 맡는 것이 여성 배우들에 대한 사회적인 금기 때문이라면, 남장 연기는 이런 금기와는 무관한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다. 여성들만의 연기라는 특징은 여러 가지 미학적/정치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연극의 내용은 철저히 영웅적인 남성과 순종적인 여성이라는 가부장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2, 그런데 그 배역은 모두 여성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젠더와 성에 대한 개념을 전복시킨다.
3. 여성 관객은 여배우들의 로맨스에 열광하게 되는 것은 외적으로는 동성애적 코드에 대한 환상에 대한 반응이며, 내적으로는 성별의 특성을 규정하는 사회적 관습에 대한 일탈이다.
여성국극은 당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성행했지만 60년대에 들어서 쇠퇴하게 되었다. 그 원인에는 크게 3가지가 꼽히는데, 연극 레퍼토리가 상고시대를 배경으로 낭만적인 사랑을 그려내는 내용으로 일관한다는 점, 창이나 무용 등의 배우 역량의 질적 하락, 그리고 영화계의 부흥과 연극계의 재정비 등으로 설 자리가 갈수록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근대 극장의 여자들>은 여기에 더해 당대 사회문화의 변동이 이들의 부흥과 몰락을 추동했다는 분석을 더한다.
1950년대에 벌어진 한국전쟁은 정치와 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대중의 불만이 들끓는 시기에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지 않는 상고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여성국극은 당시의 시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가부장제의 일시 붕괴와 여성 지위의 향상은 기존 남성 위주로 운영되던 창극단에 반발하여 여성국극단을 형성하는 흐름을 만들었으며, 동시에 여성국극단의 소비층인 여성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속한 산업화는 다시 남성들의 활동을 촉진시켰고 동시에 전통적인 열녀 담론을 토대로 현모양처를 추켜세우며 유교적 가부장제의 복원을 이루었다. 동시에 전통문화정책은 ‘전통의 복원’을 기치로 정부 주도하에 각종 전통문화 보호라는 명목하에 인위적인 판단을 가했다. 이에 따라 창극정립위원회가 결성되어 창극에 있어서 판소리가 회복되었으며, 여성국극은 일종의 아류/변종으로 취급되었다. 또한 교육인구의 증가로 이전과 달리 근대적 신념을 사회적으로 널리 퍼트리려는 풍조가 강화되면서 문학/연극계에서도 엘리트주의 담론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 여성국극의 활성화를 불러왔던 외부적 요소들이 하나하나 무너지는 와중에 내부적으로도 그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전근대/비서구적 풍모가 강한 시대착오적 공연양식으로 몰락하고 만 것이다.
<근대 극장의 여자들>은 남성중심적/전기적 작업에 천착했던 기존 공연 문화사 연구와는 달리 기존 학계가 시선을 주지 않았던 ‘여성 연기자’들의 존재에 집중했다. 극장이라는 근대의 공간에서 탄생한 여성 연기자라는 새로운 근대 주체의 탄생 과정, 여성 공연 단체의 활동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인 소란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면서 이들이 20세기 공연 문화사에서 갖는 흐름을 추적했다. 그런 연구의 성과들은 단순히 학술적 연구에 그치지 않고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뮤지컬, 웹툰 등의 새로운 문화적 흐름과 결부되어 하나씩 소개되고 있다.
네이버 웹툰 <정년이>는 여성국극 배우가 되려는 정년이를 중심으로 당대 여성국극 배우들과 그들의 극단 생활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2019년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했고, 2020 올해의 양성평등 문화콘텐츠 상을 받으며 드라마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정년이>에서 주목할 점은 여성들로만 구성된 여성국극단을 소재로 하면서도 그 서사의 흐름이 전형적인 소년만화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이면서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빛을 보지 못하던 주인공이 환경의 변화를 맞이하면서 라이벌을 만난다. 라이벌은 주인공과 정반대로 엘리트적 교육을 받고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며 갑작스럽게 나타나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나가는 주인공에게 열등감을 품지만, 주인공은 개의치 않고 친구로 여기면서 그의 장점을 스펀지처럼 흡수해나가며 우정을 다진다. 이러한 클리셰적인 요소는 여성국극단이 갖고 있었던 ‘수행적 젠더’의 특성과 전복성이라는 낯선 개념을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작품은 당시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적극적인 여성서사로서 작동할 수 있는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는데, 6.25참전 여군들을 향한 주인공의 무의식적인 차별, 일상에서도 남성을 연기하며 남성젠더를 수행하는 고 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여군들의 경우 근대적 젠더 구분법에서 본다면 무척이나 이질적인 여자+군인이란 존재들을 조망하며, 당장 자신도 남성역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정년이가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군인일 리가 없다고 단정짓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사회가 만든 젠더적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럼에도 그들의 존재 자체가 성 역할의 구분이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고 사장의 경우 ‘세상을 거대한 여성국극 무대’라고 표현하면서 각각 남자와 여자를 연기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무대에서 일탈하며 삶을 살아가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지만 동시에 재밌는 일이 될 것이라 표현한다. 이는 기존 여성국극단이 지녔던 한계, 즉 극중에서만 가능했던 과거의 일탈이 극을 넘어 현실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처럼 <정년이>는 여성국극단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기존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연기자들을 다시금 주목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동시에 현재 대두되고 있는 여성 서사는 여성국극단이 보여주었던 젠더전복적인 상상력과 접목되어 과거 그들이 지녔던 한계를 뛰어넘는 현대적 재해석의 장을 마련한다. 당대로서는 파격적이었지만 결국에는 가부장제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국극단의 한계와는 달리, <정년이>의 캐릭터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의문을 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당시 사회적으로 강제되었던 고정된 성역할에 반기를 보이기도 하며, 여성이 남성성을 가질 수 있고 이를 얼마든지 표출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현대에 걸맞는 방식으로 여성국극단을 재소환하고 있다.
정년이 생각보다 읽을만한가보네
재밋슴 츄랴이츄랴이 댓글만 거르면 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이버 댓글은 걸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