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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처음 아Q정전을 접한 곳은 다름 아닌 초등학교 시절의 구몬 학습지였다. 초등학교 시절 풀었던 국어 문제지는 고전 문학들 중에서 3페이지 정도 발췌해 빈칸이나 맞춤법 등을 채우는 것이 주를 이루었는데, 책의 전문을 읽지는 못했지만 온갖 명작들의 격렬한 감정선과 널뛰는 문체를 단편적으로 맛보기할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같이 들었던 수학이나 과학에 비해 국어의 진도를 빨리 뺄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지문을 읽는 것이 학교 수업에 나오는 지문들보다 훨씬 재미있었던 덕분이다. 이 맛보기의 대상들도 다양해, 걸리버 여행기가 소인국 여행 이외의 여행도 존재한다는 것도, 그레고르의 등에 사과가 박혀버리는 설마설마했던 전개도, 중립국에 가기를 주장해 남한과 북한으로 가는 것을 거부한 후 바다에 투신하는 엔딩도 이 시기 덕분에 1차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강렬한 작품의 편린들이다. 이 기라성 같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 단편적인 기억들 중 단연 나에게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아Q가 자기합리화를 억지로 해내는 장면이었다.


 초등학생의 눈으로 바라본 아Q는, 확연하게 이질적이었다. 다른 등장인물들의 성격에 대해 단정짓고 요약하는 것을 좋아하던 그 무렵의 나는, 어째서인지 아Q의 행동과 성격에 대해서는 곧잘 정의내리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의 얇디 얇고 순수한 관점으로는 자기 합리화의 습성에 대해서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요, 그 외에도 풍자를 위한 아Q의 뒤틀린 사고방식과 행동거지를 정상인의 범주에 벗어나지 않도록 결론내리는 것이 매우 힘든 행동이었다는 것이 두번째로 큰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지한 고찰을 포기한 채, 그저 아Q를 '웃기는 또라이' 이상의 해석을 고찰해보는 것을 포기하고 저 정도의 관점을 유지한 채 먼발치에서 관망했다. 몇 년 후 우연한 기회에 아Q라는 존재가 중국인들을 풍자하기 위한 창작품이라는 설명을 듣고 납득했으나, '그 시절의 중국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니 납득 이상의 발상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히 알고있는 책을 다시 읽는 것이 내용을 아예 모르는 책을 읽는 것보다 더 나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딱히 마땅한 대체재를 찾지 못해 결정에 오랜 기간이 걸리진 않았다. 기왕 읽는 김에 다른 작품도 포함된 열린책들 출판사의 중단편집을 고르는 것으로 나 자신과 타협을 한 후, 『아Q정전』을 다시 읽었고 이것은 옳은 결정이었다고 자평한다. 『아Q정전』을 포함한 루쉰의 작품들은 그 당시 중국의 혼란한 사회상을 알면 알수록 더 느끼는 바가 큰 작품들이고, 초등학생 때 혼란해하고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것도 이런 배경 지식이 전혀 없어서 그랬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국인들과 중국의 문화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작품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 중단편집은 총 15편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에는 중국의 오래된 관습인 식인 풍습과 개가에 대해 과하게 척을 지는 풍토 등이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농민들로 대표되는 하층민들과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지식인들, 즉 대다수의 '중국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와 1920~1930년대 중국인들의 생활 묘사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들로, 정도와 핵심으로 삼는 주제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저 세가지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이 5~6페이지에서 60여 페이지까지 길이에 국한되지 않은 채 수록되어 있다. 이 중 당대 중국인들의 생활 묘사는 작가의 생활상과 가치관이 진하게 묻어 나오는데, 특히 일본에 갔다 온 이후 사뭇 바뀐 변발에 대한 인식을 낯설어하는 묘사는 루쉰 본인의 유학 복귀 이후의 상황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흡사하다. 한국 근현대 문학들에는 우리나라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감성이 있는 것처럼,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루쉰의 소설을 읽고 그들의 생활상에서 비롯되는 감성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루쉰이 쓴 작품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아Q정전』은 그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세가지 특징을 전부 충족함과 동시에 각각의 특징들이 여타 소설들보다도 강렬하게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Q의 캐릭터성은 당시 중국인들의 노예 근성과 허영심을 투영하는 대상으로써,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얕잡아 보다가 흠씬 두들겨 맞기도 하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치졸하게 괴롭히는 등 추악한 모습을 사형당할 때까지 보여준다. 이러한 추한 행적들 중에서도 가장 백미는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 맞은 다음에 아Q가 때린 사람이 자신에 비하면 어린아이니까 일부러 맞아줬다는 등의 자기합리화로, 그는 자기 마을의 모든 사람을 업신여겼고 그로 인해 손해도 많이 보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창의적인 자기합리화를 남용한 결과 더더욱 오만하고 더더욱 열등감에 찬 존재가 되어 강도들의 일행으로 몰린 후 사형당하는 것으로 생을 비참하게 마무리하게 되었다.


 아Q의 행동거지나 발상이 가장 추악해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아Q의 주변 인물들 역시 마냥 긍정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아Q가 명백한 약자인 비구니를 희롱할 때 말리기는커녕 아Q와 같이 히히덕대며 좋아한 사람들 역시 같은 중국인들이며, 아Q에게 다짜고짜 드잡이를 당한 소D라는 어린 인물 역시 아Q에게서 정신승리만 뺀 인물이라는 혹평을 들었다. 그리고 혁명 이후 혁명군들을 사칭해 부잣집을 약탈하고 도망간 사람들 역시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한 생활을 하던 마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하층민들은 작품 내내 부정적인 역할과 행적을 떠맡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하층민들의 무지와 비인간적인 성향 외에도, 지식인들 역시 루쉰의 다른 작품들에 드러나던 것처럼 부정적인 묘사가 드러난다. 하층민들에게 들이민 잣대처럼 흠결을 직접적으로 조명하지는 않았지만, 아Q가 싫어하는 조씨 일가와 전씨 일가들은 저런 하층민들에게 무관심하면서 고압적인 태도와 행동을 고수하기만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이들이 혁명당원임이 드러난 다음에도 이런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고, 이는 오히려 신분은 상승했지만 그에 걸맞는 위정자로써의 관용은 전혀 드러나지 않아 신분 상승 이후를 더더욱 부정적으로 볼 여지도 충분하다. 사람은 무릇 높은 위치를 차지하면 차지할수록 더 큰 책임도 떠맡기 마련이니까.


 루쉰의 다작 활동이 이루어진 시기는 우리나라의 개화기처럼 기존에 옳다고 생각하던 전통적인 가치가 새로 등장한 문물과 세력에 의해 부정되고 격하되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더 나은 가치와 세계가 한순간에 뒤집히던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혁명이 일어나 외세의 입김에 더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는 세력이 권력을 쥐게 되었지만, 이들 역시 인민들에게 따스한 관심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하층민의 삶에 무관심했던 청 왕조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음을 『아Q정전』을 통해 주장한다. 이 소설은 격동하는 동남아시아의 정세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한 지식인들과 하층민들을 계몽하고 중국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고찰해볼 것을 주장했지만,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 정확히 어느 쪽이며 전통적인 가치와 새로 발돋움한 가치 사이에 우열을 정해 주지는 못했다. 소설에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사람이 없는 것과, 인민들에 대응하는 인물은 존재하나 사상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루쉰 역시 계몽의 필요성 자체는 통감했지만 정확한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했던 탓일 것이다. 물론 루쉰이 비판 이외의 것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역량을 아늑히 넘어선 필요 이상의 고평가를 받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인민들에게 던진 사회적 메세지는 당대의 지식인들과 인민들에게 와 닿지 않던 것도 아니었으며, 중국이라는 국가가 걸어온 20세기의 역사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있을 수 없는 일과 비현실적인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 광풍이 몰아친 시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