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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은 내 최애중 하나임. 항상 읽어줘서 고맙다. 담번엔 좀 더 최근 작가로 써볼게.


참고:


김승옥 "역사"

-1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6969

-2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6971


한병철 "피로 사회"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6575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0943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0795


최인훈 "라울전"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34498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c84fa11d0283195504478ca9b7677dc322d30c9369b474f48c350454b6af8280248393ec9ac7cb7bee07f99b73769974812af95e09fb0a05c


이야기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청준 소설의 다층적 구조가 가지는 함의


         이청준은 언어에 민감한 작가다. 그는 일찍이 언어사회학 서설을 집필해 언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려 한 바 있다. 이로부터 한순미는 이청준 소설이 서구적 언어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기존 언어에서 동양의(침묵의) 언어로 전이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분석이 지극히 언어철학적인 담론에 머문다는 점, 언어와 명시적으로 관련된 이청준 소설들의 분석에만 국한됐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 이청준 소설 세계가 가지는 다양한 주제 의식과 그 기술 방식에 대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이청준이 언어로 대표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일체를 다층적 구조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는 시선에서 그의 소설들을 살펴보려한다.

        고전적인 서양 철학은 다분히 환원주의적이다. 몇 가지 추상적인 개념들을 도입해 복잡한 문제를 보다 단순하게 환원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비트겐슈타인을 필두로 한 20세기 언어-논리 철학자들은 그 극치에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본인의 저서 논리철학논고에서 세계를 언어에 대응시키고, 이를 쪼개 세상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요소 명제를 도입한다. 나아가 그는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라고 선언하며, 철학의 완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세상을 쪼개려던 비트겐슈타인의 노력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 1931년 괴델이 불완정성 정리를 증명해내며 낮은 층위의 도구로 해결할 수 없는 높은 층위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는 곧 무언가를 쪼개어 분석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함을 시사한다. 후일 등장하는 들뢰즈, 가타리 역시 고전 서양 철학이 가진 동일성(일자적 철학)으로 다른 사물들을 설명하려 했던 플라톤 이래 철학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헤겔의 변증법을 비판하며, ()와 중성을 강조한 것은 블랑쇼였다. 이와 같은 기존 철학의 이분법적 성격에 대한 비판은 "사물은 부분의 합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불교 사상, 그 중에서도 "관계가 우주의 사실임을 말하는" 원효의 화쟁 사상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청준이 벤야민과 하이데거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앞서 개괄한 철학사적 흐름이 그의 소설 속에서 발견된다.

        먼저, 이청준 소설은 "세계를 지각적으로 나누어 범주화하는" 사고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다층적인 구성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강화한다. '병신과 머저리'는 세 개의 층위를 가진다. 가장 아래층에 형이 쓴 소설이, 그 위에 형의 이야기가, 맨 위층에 서술자 ''의 이야기가 각각 위치한다. 형은 6.25 이후 정신적 문제에 직면한다. 그는 본직인 의사를 휴업하고, 소설을 쓴다. 소설이 현실의 재현에 해당한다는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행위는 자신의 세계가 가지는 문제를 보다 낮은 층위에서 해결하려는 논리적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하지만, 형의 소설은 형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형은 소설을 찢어버리게 된다. 한편, '' 역시 초상화를 완성하거나, 형이 소설을 쓰는 과정을 바라보는 등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마주한 명료한 얼굴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 역시 자신의 문제를 보다 낮은 층위에서 해결하려는 논리적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의 시도 역시 실패하고 만다. "그것은 나의 힘으로는 영영 찾아내지 못하고 말 얼굴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의 고백이 실패를 암시한다. 마치 괴델처럼, 이청준은 낮은 층위의 도구로 해결할 수 없는 높은 층위의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또 다른 소설 '이어도'는 논리(언어)에 기반한 사고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서 대안을 모색한다. 이 소설 역시 두 개의 층위를 가진다. 하나는 천남석 기자가 이어도의 존재를 찾아헤매는 숨겨진 층위이고, 다른 하나는 천남석 기자의 자살을 규명하고자 하는 중위의 바깥쪽 층위이다. 천남석 기자는 이어도라는 장소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인생과 섬 사람들의 인생"이 가지는 의미를 밝히려한다. 섬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가 공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1차 논리적 접근이고, 헤겔적 접근이다. 하지만, 이어도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천 기자가 "이어도라는 섬이 실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난 순간에 오히려 그 섬을 보게 된 것"이라는 양주호의 설명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선우 중위 역시 마찬가지로 천 기자가 자살했는지, 아닌지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논리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다. 이 때, 선우 중위의 질문에 대한 여자의 대답이 심상치 않다. 여인은 오로지 침묵으로 대응한다. "그녀 자신이 온통 어두운 침묵의 수렁이었다." 이는 논리와 언어에서 벗어난 선불교적 대답에 해당한다. 논리의 세계에 사는 선우 중위는 이 침묵을 듣고는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 이어도의 복합적 층위는 이처럼 선우 중위와 천남석 기자의 이분법적 접근에 대한 비판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안인 화쟁의 언어를 소개하는데 영향을 준다.

         이 때 문제가 하나 생긴다. 이 두 소설이 각각 지시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혹은 서구적 사고방식은 구체적으로 무얼 지시하는가? 병신과 머저리에서 말하는 이분법은, 약자의 배제, 나체화의 폭력성을 의미한다. 형이 죄책감을 느끼는 대상은, 관모에게 엉덩이를 드러내고 누운 김 일병, 혹은 김 일병의 나체이다. 김 일병은 전쟁 상황 속에서 그 어떤 사회적 보조도 받지 못하는,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벌거벗은 생명 혹은 호모 사케르 그 자체이다. 그의 생사여탈권은 권력자인 관모가 쥐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김 일병은 관모의 손에 죽고 만다. 한편, ‘는 환부 없는 환자이자, 멀쩡히 애인을 뺏기고도 화가 나지 않는 불구자이다. 그 모습은 무력한 김 일병과 겹치며,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배제된 인물, 호모 사케르를 상징한다. 바로 이와 같이 문명안의 사람문명 바깥의 사람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병신과 머저리는 문제시하고 있다. 반면, 이어도는 이상향과 현실의 이분법에 대해 비판한다. 선우 중위를 포함한 정부의 파랑도 수색 작업은, 이상향과 현실세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플라톤적 사고방식과 닮아있다. 파랑도가 구체적인 섬의 형태로 존재할 것이라는 환상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그러나, 정작 천남석 기자, 양주호 등은 이상향의 부재를 통해 파랑도를 파악한다. 이는 예의 불교적 사고방식 ()의 세계가 곧 물질세계를 의미하는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을 드러낸다. 이 때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관철하는 주체가, 폭력을 수행하는 군인인 것은 필경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위 두 소설들은 상이한 주제들을 다루지만, 이분법적인 폭력성을 다층적인 구조를 통해 비판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벌레 이야기는 상기한 두 소설들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서술자인 ''가 주인공인 아내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진행한다는 점, 아내가 기독교라는 낮은 층위의 도구를 통해 맞닥뜨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점, 그리고 한 층 높은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기에, 소설이 모종의 이분법적 사고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전의 소설들과 달리 서술자 의 이야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내용이 거의 아내위주로만 서술되어 있어 소설이 가진 층위들이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소설들과 달리 이런 구성을 취한 이유가 무엇일까? 텍스트가 비판하는 모종의 이분법적 사고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아내에게조차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는 행위는 부정이고 침묵이자, 앞선 단락들을 통해 설명한 바와 같이, ‘이분법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기에, 아내의 침묵은 역설적으로, ‘가 대안이 필요한 존재, 곧 이분법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는 어떤 점에서 이분법적인 인물인가? 다음의 인용을 살펴보자.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게는 다른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그럴 수 있다 고 믿지도 않았다. 내게는 다만 그 아내의 절망과 아픔을 안타까와하면서 귀에도 들 어가지 않을 부질없는 소리들로 그녀의 심사만 어지럽혀댔을 뿐 다른 위로의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 인용문에서 는 아내 뿐 아니라 스스로조차 능동적으로 타인을 용서할 수 없는 인간으로 격하시키고 있다. 범죄자조차 용서해야만 한다는 것은, 김집사, 아내, 그리고 까지 모두 공유하고 있는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레비나스와 데리다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범죄자, 혹은 이방인에게 절대적인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논의는 타자가 자신에 대한 폭력을 스스로 극복하려는 능동적 주체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비판받았다. , 레비나스와 데리다는 모두 주체-타자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타자에게서 능동성을 거세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라는 말이다. 이 폭력성은 와 김집사에게까지 확장할 수 있다. 그들은 신이라는 주체와 인간이라는 타자를 분리하고, 인간을 그 어떤 능동적 선택도 할 수 없는 벌레의 위상으로 추락시킨다. ‘를 서술자로 내세우는 복합적인 구성은 이러한 상황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준다. ‘를 서술자로 내세웠지만 의 생각, ‘의 행동을 지움으로써, 또 주인공인 아내의 생각을 직접 확인할 수 없게 함으로써 자체적으로 타자화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벌레 이야기주체-타자의 이분법적 구분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텍스트이며, ‘를 서술자로 등장시키는 구성 방식이 주제의식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앞서 분석한 세 개의 이청준 소설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낮은 층위의 문제로 상위 층위의 문제를 풀 수 없음을 보여 이분법이 가지는 폭력성을 노정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병신과 머저리문명안의 사람문명 바깥의 사람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이어도는 이상향과 현실의 이분법을, 벌레 이야기는 주체와 타자의 이분법을 각각 비판한다. 이 때, 복합적 구성 방식은 주제의식을 한층 부각시키는 효과를 준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이 이청준 소설 전반에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인지, 이청준이 말하는 불교적 대안은 구체적으로 어떤 불교를 의미하는지 등이 여전히 해명되지 않았다. 또한, ‘다층적 구조라는 다소 거친 표현으로 이청준 소설의 구성 방식을 설명할 수 있는지, 그게 합당한지 역시 설명이 부족하다. 더 엄밀한 이론과 추가적인 분석이 필요해보인다. 이 글이 후속 연구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