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성性이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론은 '우물에 빠진 어린아이의 비유'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위기에 처해져 있는 모습을 갑작스럽게 목격하였을 때, 대개 놀라고 측은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런 마음은 어떤 이해 관계나 다른 이기적인 감정이 일어나기에 앞서, 순수하게 그 사람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 무수한 예외 상황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맹자의 성선론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성선론을 둘러싼 맹자의 논의는 이 비유가 전부는 아니다. 특히나 고자편에서 성선론은 그것에 반대하는 학자들과의 토론 속에서 그 자세한 내용과 논거들을 드러내고 있다. 또 고자, 맹계자 등과 이루어지는 맹자의 토론들은 그의 성 개념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자 편의 구절들을 통해 그의 성선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또 이것이 어떻게 맹자의 '왕도정치론'과 연결되었는지, 또 후대에는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간략하게 알아보자.
1. 성은 무엇을 위해 논의되어야 하는가?
고자가 말했다.
"사람의 본성은 갯버들과 같고 의義는 갯버들로 만든 그릇과 같으니, 사람의 본성으로써 인仁과 의를 행하는 것은 갯버들로써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맹자가 말했다.
"그대는 갯버들의 본성을 그대로 살려서 그릇을 만드는가? 아니면 갯버들을 억지로 구부리고 꺾은 후에 그릇을 만드는가? 만일 갯버들을 구부리고 꺾어서 그릇을 만든다면, 마찬가지로 사람의 본성을 구부리고 꺾어서 인과 의를 행한다는 것인가? 그대의 이러한 이론은 틀림없이 세상을 이끌어서 인과 의를 해치게 할 것이다."
위 인용문은 고자 편의 맨 처음으로 나오는 구절이다. 이 부분의 핵심 내용은 '성에 대한 이론들, 특히 성선론이 어떤 식으로 정치철학과 연결되는지 잘 보여준다. 정치가 인간이 타인과 살아가면서 지켜야할 사회 질서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정치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변형시키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자는 정치가 반드시 그 변형의 대상인 인간의 본성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갯버들로 그릇을 만들 때 그 성질을 그대로 살려서 그릇을 만들듯이, 무언가를 변형시키더라도 그것은 늘 재료의 성질을 반영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실 나무를 가공하여 목재 가구를 만든대도 나무가 가지고 있는 성질을 가구에 반영할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나무를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무'라는 점이 주는 어떤 특질 때문에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변형 행위는 엄연히 원재료의 본성에 의거한다. 따라서 맹자는 만일 인간의 본성을 억지로 구부려서 인의를 행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인의를 해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에게 인간의 성은 마치 '자연법'처럼, 정당성 있는 정치 행위의 근거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맹자의 성선론 역시 정당성 있는 국가의 건설을 위한 '자격'이 무엇인 지에 대한 문제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후술하도록 하자.
2. 성은 현상의 양태가 아니다
고자 편의 두 번째 구절에서, 고자는 강물에 대한 비유를 통해 자신의 성무선악설을 주장한다. 강물은 동으로 길을 터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로 길을 트면 서쪽으로 흐른다. 그는 이를 인간의 본성에 빗댄다.
이 비유에서 고자는 한 가지 생각을 전제로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은 그것을 변형시키는 방향에 따라 흘러가기만 하므로, 물의 본성에는 동서의 구분이 없다. 곧 그가 말하는 본성은 사물이 지금 당장 보이는 모습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물이 변형에 따라 흐르는 모습을 보이므로, 그것의 본성은 '동서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맹자는 동서에 대한 비유 대신에 좀 더 일관적인 양상을 볼 수 있는 '물의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인위적 변형으로 인해 드러나는 현상을 본성과 연관짓는 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물을 인간이 변형시킨다면 위로 올라가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물의 본성인 것은 아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물은 분명 아래로 흐른다. 그는 사물의 모습이 본성에 따른 것인지 외부의 영향을 받아 본성을 잃어버리고 나타난 것인지를 명확히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비추어 볼 때 맹자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들에 대해 다루는, 이른바 형이상학에 해당하는 영역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물의 모습이 그대로 본성인 것이 아니라 본성이 왜곡되어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성은 현상과 어느정도 분리된, 형이상학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성 개념을 단순히 실제 인간들의 관찰되는 양상으로 치환하지 않고, 좀 더 본원적인 차원에서 그것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3. 생리적 본능은 성이 될 수 없다
고자가 말했다.
"자연스런 생리적 본능을 본성이라고 한다."
맹자가 물었다.
"자연스런 생리적 본능을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흰 것을 희다고 하는 것과 같은가?"
"그렇다."
"그러면 흰 깃털의 흰 색이 흰 눈의 흰 색과 같고, 흰 눈의 흰 색이 백옥의 흰 색과 같은가?"
"그렇다."
"그렇다면 개의 본성은 소의 본성과 같고, 소의 본성은 사람의 본성과 같다는 말인가?"
이 구절에서는 형이상학적인 성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맹자의 생각이, 생리적 본능을 성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과 함께 보여진다.
먹고 마시는 존재의 본성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두는 것은 언뜻 보면 직관적이고, 당연해보인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그 중에 분류되는 다양한 종류의 사물들의 고유성을 무시하게 된다. 흰 깃털, 흰 눈 등은 모두 희지만 분명 각자가 가진 고유한 성질이 따로 있다. 만일 생리적 본능을 본성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구분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개의 본성, 혹은 돌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대개 개가 어떤 생물인 지, 돌이 어떤 물질인 지와 연관하여 그 사물의 본성으로정의 내리고자 할 것이다. '무언가의 본성'이란 말은 본디 무언가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만일 개의 본성과 소의 본성이 같다면 '개'니 '소'이니 하는 말 자체가 무의미 할 것이며 애초에 양자가 구별될 만큼 다르게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4. 사회 규범에 대한 준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을까?
이후 4장과 5장에서는 비슷한 주제로 고자와 맹계자에 대항해 맹자가 토론을 벌인다. 맹계자와의 토론에서는 그의 제자가 말을 전해주는 방식의 대리전을 치르긴 했지만 말이다(게다가 막타는 제자가 침). 여기서 고자는 맹자와 한 가지 사항에서는 일치를 본다. 바로 '인', 즉 즉각적인 감정으로 드러나는 남에 대한 사랑 같은 것들은 확실히 본성에서 비롯한 내재적인 것이 맞다는 점이다. 상술한 '우물에 빠진 어린아이의 비유'에서 보이듯 일단 사람이 정말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남을 걱정하는 마음이 이따금 나타난다는 것 자체는 확실해보인다. 그러나 고자는 이런 즉각적 감정과 사회 규범에 대한 준수인 '의'를 구분하고, 의는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외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 "연장자를 공경하는 경우 그 사람이 나이가 많기에 내가 연장자로 공경하는 것일 뿐, 연장자로 공경하는 원리가 원래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이것은 어떤 흰 사물을 희다고 여기는 경우 밖에 있는 그 흰색을 따라서 내가 그것을 희다고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의는 외재적인 것이다."
맹자가 말했다.
"흰 말을 희다고 하는 것과 흰 사람을 희다고 하는 것은 다를 것이 없지만, 나이 많은 말을 나이 많다고 여기는 것과 나이 많은 사람을 연장자로 공경하는 것이 다를 것이 없을까? 그리고 또 그대는 '나이 많음'을 의라고 하는가, '나이 많은 자를 공경함'을 의라고 하는가?"
여기서 고자는 공경 행위가 자신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나이 많음이라는 외재적 기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들어 의가 외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맹자는 중요한 점을 한 가지 지적한다. 공경 행위는 단지 객관적으로 나이 많음을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이가 많아서 '공경심이 드는' 나의 내재적인 감정이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의는 이 '감정이 일어난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지, 나이 많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고자가 말했다.
"내가 내 동생은 사랑해도 나와 관계 없는 진나라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데, 이것은 안에 있는 나의 마음을 기준으로 그렇게 느낀 것이다. 그러므로 인은 내제적인 것이다. 한편 내가 초나라 사람 중 나이 많은 이도 공경하고 나의 어른으로 나이 많은 이도 공경하는데, 이것은 나의 밖에 있는 나이 많음을 기준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는 외재적인 것이다."
맹자가 말했다.
"내가 진나라 사람이 요리한 불고기 요리를 좋아하는 것이 내 자신이 요리한 불고기를 좋아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다른 사물에도 그러한 점이 있다. 그렇다면 불고기를 좋아하는 것도 외재적인 것이란 말인가?"
여기서 고자는 보다 자세하게 서술하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다. 즉각적 감정으로 나오는 인의 경우, 나와 연관이 많은 이에게는 느껴지나 그렇지 않다면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에 의에 따라 나이 많은 이를 공경하는 것은 나와 관계가 없더라도 일어나는 것이다. 나와의 직접적 유대와는 무관하게 나이 많음이라는 외재적 기준에 의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의는 외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간단한 비유를 들어 이를 반박한다. 불고기를 좋아하는 식욕도 역시 나와 관련이 없더라도 불고기라면 좋아하게 만든다. 그러나 식욕은 분명 내재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와 무관한 사람의 나이 많음이 공경심을 유발한다고 해서 이를 의가 외재적이라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고 맹자는 말한다.
맹계자와의 대리 토론에서 맹계자는 어째서 가까운 형을 진심으로 공경하면서 손님이 오거나 등의 상황에서는 손님을 먼저 대접하는지 묻는다. 맹자는 일상적으로 공경하는 것은 형이고, 일시적으로 공경하는 것은 손님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맹계자는 '숙부를 공경해야 할 때는 숙부를 공경하고, 동생을 공경해야 할 때는 동생을 공경한다면 역시 의는 외재적인 것이지 내재적인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그에 대한 대답은 대리전을 수행한 제자 공도자가 한다.
"우리가 겨울철에는 끓인 물을 마시고 여름철에는 찬 물을 마시는데, 그렇다면 마시고 먹는 것도 또한 내재적 욕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재적인 것이란 말인가?"
고자와 맹계자와의 토론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맹자학파의 의에 대한 기본 입장은 '사회적 규범을 준수하는 것 역시 내재된 공경심에 의거한 것이므로 본성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의 역시 그 적용 자체는 상황에 따라 다른 대상에게 이루어질 수 있어도, 그것이 의 자체가 외재적이란 뜻은 아니다.
위의 사항들을 조합해봤을 때, 맹자는 바람직한 사회질서를 건설해나갈 근거이자 인간의 고유한 것으로서 성을 바라보았다. 또 인간에게 내재적인 것이 확실해보이는 감정적 사랑과 함께 사회 규범을 준수하려는 마음 역시 내재적임을 주장했다. 이런 그의 시도들은 선함을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하는 성선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5. 운명과 본성
명命과 성性이라는 글자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거의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명줄이 짧다'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명은 태생적으로 정해진 바꿀 수 없는 무언가를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명령'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외부의 사회에 의해 강제된 어떤 역할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맹자는 당대 사람들이 명과 성을 혼용하는 것과는 달리 양자를 엄밀히 구분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음 내용을 한 번 보자.
입은 좋은 맛을, 눈은 아름다운 색을, 귀는 좋은 소리를, 코는 좋은 냄새를, 팔다리는 편안함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좋아하는 것은 타고난 성에 속하지만 그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명에 달려 있다. 그래서 군자는 그것을 본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부자 사이에는 인仁이, 군신 사이에는 의義가, 손님과 주인 사이에는 예禮가, 현자에게는 지智가, 성인에게는 천도天道가 명에 속하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본성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것을 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맹자 <진심하> 24장
맹자가 말했다. "(인의예지는) 구하면 얻을 수 있고 내버려두면 잃게 되는데, 이 경우에는 구하는 것이 (그것을) 얻는데 유익하다. 이는 구하는 대상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부귀영달은) 구하는 데 일정한 방법이 있고 얻는 데도 명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구하는 일이 (그것을) 얻는 데 유익하지 않다. 이는 구하는 대상이 내 밖에 있기 때문이다.
-맹자 <진심상> 3장
누군가가 최대한 많은 재화를 얻기를 바란다고 해보자. 그런데 많은 재화를 얻는 일은 그 사람이 아무리 지혜로운 수를 써서 노력한다 해도, 결국 '운명'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다. 분명히 오를 것이었던 주식이 완전히 폭락하는 수도 있고,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전쟁이나 재해 등이 일어나 사업 기반이 파괴될 수도 있다. 이는 그 지향 자체는 자연적일지언정 구하는 것이 인간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바깥의 조건에 인간은 수동적으로 따라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간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것은(설령 그것이 처음에는 외부로부터 들어왔다 해도) 바깥의 무언가가 아닌, 어디까지나 스스로가 어떻게 할 것인가가 구하는 대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에 대한 추구는 외재적인 명이 아닌, 내재적이며 주체적인 성에 근원을 두고 있다.
맹자는 눈과 귀 같은 감각기관은 사유 능력이 없어 외부에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반면, 사유기관인 마음은 외부에 휘둘리지 않고,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며,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인간을 끌고 가고 세계와 교류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같은 선천적 특성이라 해도 윤리와 물질적 욕구는 근본적인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맹자에게는 외부에 의해 결정되는 명과 순수히 자신에게 내재된 것에서만 연원하는 성은 구분된다.
6. '요리사' 군주
7장에서 맹자는 인간 본성의 보편성에 주목한다. 같은 종자의 곡식을 비슷한 토질과 환경에 심고 똑같은 인간의 공력을 들인다면 곡식들은 다 비슷하게 자라게 된다. 이처럼 같은 본성을 가지고 비슷한 환경에 처해져 있다면, 사람 역시 비슷한 기호와 욕망을 드러낸다.
맹자는 옛날 중국을 훌륭하게 통치하였던 군주들을 유명한 요리사나 음악가에 비유한다. 요리사가 많은 이들이 맛있어하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본성과 환경이 비슷해 맛의 기호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의는 '마음의 기호'로, 성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마음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정치를 한 자들인 것이다.
인간 미각이 가진 동일한 성질과 유사한 환경은 일반적인 맛의 기호를 형성하고, 우리의 정신이 가진 동일한 본성(선)과 유사한 환경은 일반적인 사고의 지향을 형성해낸다. 곧 '일반적인 옳음'에 대한 합의가 형성되는 것이다. 군주는 이러한 일반적인 옳음을 체득하고 이에 따라 통치함으로서 백성들의 자발적인 충성을 얻는다. 여기서 성선론은 국가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근거로서 작용한다.
7. 맹자가 쌓아올린 토양
사회구조를 모색하는 일에 관해서 국가의 정당성이 어디에 근거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국가라는 현실적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는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하늘'로부터 온 천성적인 도덕법칙을 근거로 국가론을 구성함으로서, 현실 정치에 대한 강한 비판과 시정 요구의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절대적인 하늘의 자연법칙으로부터 올바른 국가의 근거를 찾는 경향은 후대의 유학자들에게도 계승되어 내려왔음을 우리는 동중서의 춘추번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 자신을 기를 수는 있어도 만들 수는 없는 인간과는 달리 하늘은 인간을 만들어내기에, '인간다움'이란 오직 절대적 하늘에서만 온다는 동중서의 주장은 하늘이 내린 천명으로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 정치의 근거로 활용하는 맹자의 영향이 보여진다.
한편 손영식 교수는 고대 중국에서 주로 점성술을 통해 파악되었던 '천명'이 맹자 대에 와서 '민심'이라는 대중의 일반의지로 발전했으며, 다시 송대에 이르러서는 '공론'이라는 형태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민심과 달리 공론은 일반적 선 뿐만 아니라 변형되지 않는 '천리'에 부합해야 한다는 조건이 동시에 붙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맹자는 유교의 전반적인 정치사상의 흐름과 백성관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자료
박경환 역, "맹자"
손영식, '루소와 주자의 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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