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정이현의 단편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을 읽고 쓴 글임. 재미있음. 츄라이 츄라이.
참고:
이청준 "병신과 머저리", "이어도", "벌레 이야기"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7809
김승옥 "역사"
-1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6969
-2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6971
한병철 "피로 사회"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6575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0943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0795
최인훈 "라울전"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34498
상처 아래를 들춰보면:
정이현 「삼풍 백화점」을 통해 보는 현대 사회
「삼풍 백화점」, 그 속을 들여다보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하며 1445명에 달하는 고객과 종업원이 큰 피해를 입는다. 정부는 전국의 모든 건물을 조사하며, 이후 같은 사건의 발생을 막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19년이 지난 2014년 4월 16일,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한다. 이 사고로 무려 304명이 죽고, 우리 사회는 큰 충격에 빠진다. 침몰사고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됐고, 정부는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겠다 다시 한 번 약속한다. 그로부터 다시 6년 후, 2020년 9월 22일, 어업관리단 소속 공무원이 북측 해역에서 총을 맞고 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규모는 다르지만 일련의 사건들은 국가가 피해자들을 “죽게 내버려 둔” 참사라는 점에서 상통한다. 유사한 사건들이 멈추지 않고 잇달아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는 현대 사회가 법을 조금 고친다고 해결되는 사소한 결함 이상의 심각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지는 고사하고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해명된 바 없다. 어떻게 해야 문제를 파악할 수 있을까?
언표(enonce)들은 “자신이 말하지 않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어서 “하나의 ‘숨겨진 담론’을 형성”하곤 한다. 이 언표들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숨겨진 담론”을 파악하려 한 것은 미셸 푸코였다. 그러나, 유의미한(해석할 수 있는) “언표란 본질적으로 드문(rares) 것이”기에, 목적에 맞는 언표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삼풍백화점」은 (참사가 발생하는 현대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찾겠다는) 우리 목적에 부합하는 텍스트이다. 정이현의 소설 「삼풍 백화점」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다루면서도, 사건 자체에서 충분한 거리를 두고 현대 사회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마치 푸코가 된 것처럼 소설 「삼풍 백화점」의 언표들을 꼼꼼히 검토해봄으로써 현대 사회의 틀(epistēmē)을 적극적으로 해명할 것이다.
삼풍 백화점과 판옵티콘 사회
삼풍 백화점에선 오 층에서 비빔냉면을 팔 때, 사 층은 스포츠용품을, 삼층은 남성복을, 이층은 여성복을 판다. 이 지점에서, 우린 삼풍 백화점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복합적 장소임과 동시에 층과 층이 명확히 구별을 이루는 단절된 장소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실제로, 삼풍 백화점엔 “사치와 향락에 물”든 소비자의 세계와 생계를 간간이 유지하는 판매자의 세계가 동시에 존재하며, 이 둘은 완전한 단절을 이루고 있다. 나와 동년배인 R과 S의 대화에서 이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상하다, 바지 디자인이 변했나 봐. 나 너무 짧아 보이지 않아? S는 전신 거울 앞 에서 이리저리 옷태를 보았다. 아니에요, 손님. 잘 어울려요. ...바짓단을 잡기 위해 R이 S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S는 결국 그 바지를 사지 않았다.”
S가 반말을 쓰는 반면, R은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다. 마지막에 S가 바지를 사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서 이뤄지는 의사소통 행위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며, 따라서 단절되어 있다. R이 S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는 묘사는 그 단절을 한층 부각시킨다.
단절은 격리인 동시에 감금이다. R을 포함한 삼풍 백화점의 아르바이트생들은 그렇기에 수감자로 변모하고 만다. 잠깐 감옥의 죄수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사회에서의 이름을 상실하고, 죄수 번호로 불린다. 가지고 있던 모든 개성을 박탈하고, 죄수라는 아이덴티티 하나만을 부여한다. 이 시선에서 아르바이트생이 입는 유니폼은 수감자의 상징이다. “다 똑같은 옷 입는 것보다는 그래도 자유복이 나을 거 같다.”는 ‘나’의 발언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유니폼은 ‘똑같은’ 옷이고, 따라서 개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지나는 사람이 봤다면 그 대리가 나에게 입히려는 것이” “죄수복이라고 짐작했을 것이다”는 R의 반응에 대한 ‘내’ 생각은, 이 점을 적확하게 짚어낸다. 실제로 유니폼을 입는 순간, 이전까지 자유롭게 “일을 도와주던 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 ‘나’가 더 이상 이전의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인이었을 때 가졌던 신분인, “학생”도 R의 “친구”도 의미를 잃어버린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오로지 아르바이트생으로만 파악된다.
그렇다면, 삼풍 백화점의 아르바이트생들만 수감자이고, 사회는 자유를 의미할까? 그렇지 않다. 후술하겠지만 감옥은 삼풍 백화점에서 이윽고 사회 전체로 범위가 확장된다. 잠시 저자 정이현의 인터뷰를 살펴보자.
“정이현 어떤 결말에서도 결국 인물은 완벽한 타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 람인가봐요.”
이 때 정이현이 말하는 ‘완벽한 타자’란 무엇인가?
“차미령 ... 그런데 어떤 인간에게도 있는 그런 타자성이 이 소설에서 마이너리티의 몸을 빌어서 현상한다는 것에 주목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이현 그럴 수도 있겠죠. 저는 사실 소수자, 마이너리티라는 말이 어쩌면 참 주관 적인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든요. ...각각의 시각으로 보면, 누구나 다 마이너리 티일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말하는 완벽한 타자란 스스로를 소수자로 파악하며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키는 인간형을 의미한다. 이 맥락에서 타자는 사회(다수)로부터 격리된 인물, 즉 수감자를 의미한다. 이 때 주목할만한 사실은 정이현이 말하는 ‘완벽한 타자’ 개념에서 타자화를 수행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통제하게 만드는 사회, 푸코는 이런 사회를 판옵티콘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 정이현이 바라보는 현대적 인간이란 판옵티콘의 수감자이다.
사회 전체를 판옵티콘으로 바라보는 정이현의 시각은, 세 가지 형태로 「삼풍 백화점」에 드러난다. 먼저, 등장인물 일체에게 이름이 없다는 점이 이를 시사한다. 말했다시피, 수감인들은 이름을 갖지 못한다. 놀랍게도,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직급 혹은 특징으로만 어설프게 인식된다. ‘나’와 맞선을 본 남자는 치과 의사로, ‘나’의 남자친구는 증권회사 신입사원으로, 친구들은 R과 S로, 그나마도 싸이월드에서 12명이나 더 있는 상태로 서술당한다. 반면, 숫자에 관한 정보는 굉장히 자세하게 서술한다는 점에서 인간 전체가 단순한 숫자(인구수)로만 인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릴적 ‘나’는 숫자의 대소를 전혀 분간하지 못했다. 하지만, 삼풍 백화점이 무너진 후 ‘나’는 “사망자 오백일 명, 부상자 구백삼십팔 명”이라고 피해자들을 일축한다. 어떤 청년이 혹은 어떤 소녀가 몇 시간 버틴 끝에 구조되었는지는 알면서도, 그들의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는다. 또한, 삼풍 백화점 붕괴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죽였다는 점 역시 사회 구성원 전부가 수감인이라는 시각을 밝힌다. 손님이든, 직원이었든, 심지어는 아르바이트생이었든 모두 붕괴에 휩쓸렸다. 이 사실은 시민 전체가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인간인 ‘수감인’이라는 것을 추측케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인식 변화에서도 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나’는 처음엔 중간자의 역할을 한다. 백화점에서 비빔냉면을 먹은 후,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씩 아래로” 내려가며, 각 층을 바라본다. R과 S의 대화에서도 역시, ‘나’만은 둘 모두에게 반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 뿐이 아니다. 유사한 알레고리가 소설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 “『행복이 가득한 집』과 『워킹우먼』”을 번갈아 읽는다던지, 스쿨버스를 통해 강남과 강북을 오간다던지 하는 장면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를 경험하고 ‘나’는 삼풍 백화점에 다신 찾아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가 분명하게 말하진 않지만, “어떤 년”, “기본도 안 된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취급을 받은 직후 그녀가 R을 찾지 않게 되었다는 서술로 연결되는 소설의 구조로부터, 독자는 그녀가 겪은 모멸감이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바로 그 예측으로부터 그녀가 겪은 모멸감의 정체가 결국 -“어떤 년”이란 표현이 마치 자기 소유의 사물을 대하는 뉘앙스라는 점에서- 타자화에서 비롯했다는 사실까지도 어렵지 않게 나아갈 수 있다. 즉, ‘나’의 변화는 어쩌면 자신도 ‘완벽한 타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세 징후를 모두 종합한다면, 「삼풍 백화점」이 포착한 현대 사회는 판옵티콘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신빙성을 갖는다.
상처 아래를 들춰보면
우리는 「삼풍 백화점」이 가지는 두 가지 테제를 추출했다.
1. 현대 사회는 거대한 수용소이다.
2.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은 빈부와 관계없이 수용소의 수감자이다.
「삼풍 백화점」이 정이현 작가의 유일한 자전 소설이라는 점, 그녀의 소설이 우리 사회에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 테제는 충분히 현대 사회로 확장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는 구성원 모두가 ‘완벽한 타자’ - “물속에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방향으로 물의 흐름을 따라 계속 흘러가야 하는 시체”라는 틀을 생산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처음의 논의로 돌아오자. 현대 사회에 ‘참사’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그 사건들을 ‘참사’라고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지, 현대 사회에서만 이 같은 참사가 유독 많이 일어나서가 아니다. 예컨대 1700년대, 공개처형이 합법적으로 이뤄지던 프랑스에선 매년 200명을 사형하면서도 그것을 참사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는 ‘참사’에 대한 인식이 최근에 생겼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삼풍 백화점, 세월호, 연평도 공무원 사건을 참사로 인식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죽음 자체가 가진 비극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보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들의 타자성을 떠올리게 만드는 현대 사회의 틀 때문이다. 정이현이 “그곳을 떠난 뒤에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거리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선 글을 정리하기 힘들다, 라고 말한 바탕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간에 그 ‘타자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가 담겨있는 듯하다.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거리를 두지 않으면, 작가 자신 역시 ‘완벽한 타자’로 추락하여 능동적으로 글을 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삼풍 백화점」이라는 텍스트 하나와 그 안에 포함된 적은 수의 언표들로 현대 사회의 구조를 단언하는게 다소 무리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풍백화점」이 현대 문학상을 탄 작품인 만큼, 작품이 가지는 통찰은 분명 신뢰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삼풍 백화점」을 통해 읽어낸 우리 사회는 상처를 들춰보고 나서야 이미 죽은 지 오래라는 사실을 깨달은 시체 군집에 불과하다. 상처를 꼬매는 것만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란 말이다. 어떻게 다시금 인간으로 복권할 수 있을지, 그 방법에 대한 논의가 시급해 보인다.
달콤한 나의 도시 재밌어
같은 정씨인 정영문 읽어보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츄라이 해볼게 - dc App
'완벽한 타자' 추가적인 설명좀 ㅋㅋ
완벽하게 대상화된 사람을 의미하려 씀. - dc App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문학 수업 과제 - dc App
ㄱㅅㄱㅅ - dc App
매번 잘 읽고 있음. 근데 너무 글씨가 작다... 그나저나 공대생이라더니 무슨 빡센 문학수업을 듣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