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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몇 년 전 유명 연예인이 맡은 한 광고의 카피 문구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카피 문구의 말마따나 본다는 것은 큰 축복임이 분명하다. 낮과 밤,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이 세계의 모든 구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을 우리는 바라봄으로써 이해한다. 인간의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예민하면서 근간이 되는 것이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하지만 본다는 것이 마냥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볼 수 있는 자는, 보아야 할 운명을 지닌 자는 항상 행복할까? 세계와 그것을 구성하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 질문에 대해, 주제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대답하고 있다. ‘불행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필요하다고.’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물에 빛이 비치고 여기서 반사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면, 우리는 그것을 사물로 인식한다. 사물이 빛을 모두 흡수하면 사물은 검은 덩어리로 보이고, 반대로 사물이 모든 빛을 반사하면 그것은 흰색 덩어리로 보인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눈이 멀었지만,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르게 시계(視界)가 검은색이 아닌 밝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경계마저 허물어 버린 채 백색으로 다가온다.
주인공인 안과의사가 눈먼 자들의 눈을 처음 봤을 때, 눈은 매우 깨끗했다. 그렇기에 그는 수정체가 희뿌옇게 되는 백내장이나, 시계가 어둡게 변하는 흑내장이 아닌 ‘백색 흑내장’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백색 흑내장’이라는 명칭은 그들이 겪는 질병을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형용 모순적인 단어는 이것이 단순한 소재 차원의 질병이 아니라 강력한 알레고리로써 역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겠습니다”라는 말이 영어로, “Oh, I see”라는 것은 이 소설과 연관 지어 생각해볼 때 꽤 유의미하다. 본다는 것은 ‘앎’과 직결된다. 우리는 봄으로써 알고, 또한 그 앎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결국 ‘눈먼 자’란 ‘앎’을 망각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흔히 무지(無知)는 어둠과 지(知)는 밝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소설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 단순한 무지의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봄으로써 세계를 안다면 그 매개체인 빛은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눈먼 자들의 상태는 지식(빛)의 결핍이 아닌, 지식(빛)의 과잉으로 앎을 상실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 은유는 정보 과잉이 만연하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매스미디어의 정보 과잉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대중들은 자신을 정보에 선택적으로 노출시킨다. 인간의 인지능력은 한계가 있으며, 정보를 정성 들여서 수용하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정신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정보의 증가는 오히려 정보의 무의미화를 불러온다. ‘정보의 과잉’은 ‘정보의 결핍’과 동의어가 된다.
결국 ‘눈먼 자들’이란 정보 과잉으로 인해 정보들을 변별할 능력이나 의지를 잃은 자들을 뜻한다. 초기에 실명된 ‘눈먼 자들’이 격리 조치되는 장소가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정신병원이라는 점은 소설 속의 질병이 신체적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더 나아가면 이 질병은 개인적인 무지뿐만 아니라 시선 혹은 감시의 문제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 감시의 역할을 한다. 소변을 보고 난 뒤 손을 안 씻을 확률이, 사람이 있을 때보다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더 높다는 것은 시선이 감시의 역할을 한다는 증거이다.
한편 ‘눈먼 자들’의 공동체는 개인들의 변별력 부재에 대해서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차원에서 감시자가 없는 사회 또한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국, 눈이 먼다는 것은 비위생, 폭력, 무질서와 항상 동일 선상에 놓이는데, 이것은 의사의 말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싸움이란 건 언제나 실명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지.\"

무질서나 폭력은 단순한 충동이나 성향이 아니라 앎의 부재, 분별력의 부재, 즉 \'눈멂\'이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본다는 것은 앎’이라는 판본의 음각된 뒷면이기도 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역설적으로 눈뜬 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미래와 연관된다. 의사 아내는 모든 사람이 눈먼 세계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자이다. 그녀가 어떠한 연유에서 눈이 멀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지만, 역으로 그녀의 행동과 생각을 통해 ‘눈뜬 자’의 조건과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녀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눈먼 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한다. 그녀는 다가올 위협과 문제점들을 알고 있으며 공동체의 질서와 다수의 이익을 보장해준다. 그녀는 ‘눈먼 자들’이 점심을 가지러 갔다 올 때 쉽게 병실을 찾아오게끔 다리에 밧줄을 묶는 것을 제안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일뿐만 아니라, 식량을 통제하려는 악당들이 등장했을 때 과감하게 그들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단순한 공동체의 수장이 아니라 질서 잡힌 공동체를 위한 교육자,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해주는 책임자의 역할을 한다.
데리다의 중요 개념 중의 하나인 ‘미결정성’은 체계 내부에 속하지만, 체계의 완결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를 뜻한다. 이것은 체계가 확장될 수 있다는 징표이며, 완결 과정은 결코 완결될 수 없다. 의사 아내는 ‘눈먼 사회’의 ‘미결정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을 감시하던 군인마저 눈이 멀어버린 세계 속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눈을 뜨고 있다.
그녀는 ‘눈먼 자들의 도시’가 가진 모순점들을 해결해 나가며 사람들을 더 나은 미래로 이끈다. 눈먼 자들의 뒤처리와 그들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그녀는 한편 유일하게 ‘눈먼 사회’의 참극을 오롯이 지켜보는 존재이기도 하다. 세계의 모든 타락을 가장 민감하고 핍진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은 일견 선지자 혹은 그리스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구원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그녀의 행동은 기독교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녀는 기독교 신자도 아니며, 신적인 정신력을 가졌다기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살인을 하기도 하며, 십계명에서 금하는 간음을 용서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본다는 것이 앎을 뜻한다는 은유를 받아들인다면 구원자란 믿음이나 신앙심이 투철한 자가 아니라 결국 ‘볼 수 있는 자’라는 말이 된다. 물론 여기서 본다 함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시각적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지식이며 분별력이고 예지력이다. 앎을 통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작가의 관점은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불교적 혹은 “무지는 악이다”라는 말을 남긴 소크라테스에 가깝다. 기독교의 구원에서 중요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이다. 신비, 미신, 종교를 뜻하는 \'mystic\'의 어원인 mystikos라는 그리스어가 ‘눈과 입을 닫는다’라는 뜻인 것은 이 소설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의미하는 바가 크다. 신실한 신자란 눈뜬 자이기보다는 눈먼 자에 가깝다. 주제 사라마구가 『예수복음』을 쓴 것과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해석도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작가의 이러한 시선을 단순히 반기독교로 보는 것은 이 소설을 너무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게 될 것이다. 그보다는 인간 이성과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작가의 믿음과 소신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종종 눈먼 자들의 모습을 지옥에 비유하는 소설 속의 구절들은 분별을 잃은 인간의 비참한 모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성적인 인간이 부재하는 현실에 대한 작가의 문학적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이러한 요청이 힘을 얻는 것은 단순한 알레고리나 사상의 힘만은 아니다. 그의 소설을 지탱하는 한 축이 알레고리와 사상이라면 다른 한 축은 리얼리즘적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단순한 장면 묘사에서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 이야기의 전개와 흐름에 있어서도 핍진성을 잃지 않는다. 소설의 리얼리티는 독자들을 소설 속의 환상성을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처럼 편안히 받아들이게 한다. 일견 ‘환상’과 ‘리얼리티’는 반의적인 개념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주제 사라마구는 소설을 통해 하나의 틀 안에 이질적인 두 개의 요소를 함께 담아냈다. 환상성은 핍진성 속에서 더욱 빛이 나며, 핍진성은 환상성 속에서 더욱 단단해진다. ‘환상적 리얼리즘’은 마치 ‘백색 흑내장’처럼 우리의 머릿속을 잠식해나간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눈먼 자들의 도시’의 모습과 닮아 있다.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 정보 과잉의 사회이다. SNS와 흥미 위주의 매스미디어의 정보들은 대중들을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판단할 수 없게 하고 궁금해하지도 않게 한다. 사회적 모순들은 더욱 심화되며 모든 악이 전염병처럼 창궐한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이러한 가치 함몰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 있어서도 신념의 부재가 두드러진다. 사람들은 미래를 보지 않으며 감각할 수 있는 것들에만 열중한다. 그렇기에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지금 이 시대의 한국 독자들에게 유의미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놀라웠던 점은,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눈이 멀어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눈먼 자들의 행위가 아닐까. 물론 우리는 소설을 ‘보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눈먼 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경험적인 시각이 아니라 활자라는 추상적인 도구를 통해 추상의 영역에서 세계를 이해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막연하게 경험적으로,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세계를 질서 잡힌 총체성 있는 세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활자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설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있는’ 존재들이며, 우리를 추상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작가는 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 뜬 자가 아닐까. 읽는 내내 눈먼 세계를 여행하던 우리는 소설이 끝나는 순간, 활자에서 여백으로 옮겨지는 순간,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열리게 된다. 계속 눈을 감고 있거나, 뜨거나.